[빛과 식물]
['다홍치마'는 이제 그만]
빛과 식물
인간이 빛 속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을 기억하는 반면,
식물은 빛 자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철학자 마이클 마더의 책 ‘식물-사유’ 중에서
나는 식물 애호가이긴 해도 찬양론자는 아니다. 식물은 인간과 달리 ‘홈리스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가끔 징그러울 만큼 탐욕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마치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는 아기처럼, 식물은 빛 쪽으로 손과 입을 내민다. 하지만 아기는 배가 차면 곧장 흥미를 잃는 반면, 식물은 배가 부르는 줄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식물은 낮 내내 빛을 말 그대로 들이마시고 집어삼킨다.
그럼에도 산소 가운데 식물이 만든 것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식물이 좀 더 탐욕스러워지길 바라는 마음도 든다. 우리의 숨통이 트이려면 우선 광합성의 부산물인 산소가 있어야 할 테니까. 빛은 우리를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이마시는 산소의 기원이기도 하다.
-황유원 시인·번역가, 조선일보(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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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치마'는 이제 그만
질문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속담이 뭘까. 서로 돕고 사는 걸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주위에 대한 관심이 많고 말을 얹기 좋아한다는 의미에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속담은 따로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초록색 당의(위)와 붉은색 치마. 덕혜옹주가 돌 때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황실 복식이다. /문화재청
청상(靑孀)의 과부보다 홍상(紅裳)의 처녀가 낫다는 전근대적 어원은 차치하고, 이 속담이 오랫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을 사로잡아 왔다고 생각한다. 이 속담은 가치에 대한 비교를 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 있고, 같은 값을 치른다면 그중 더 낫고 좋은 것을 골라야 한다는 의미다.
집을 살 때 같은 값이면 조금이라도 서울 중심부에 가깝고, 조금이라도 더 넓은 곳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단지 아파트를 사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선 당연하다 못해 진리와도 같다. 집으로 예를 들었지만 다른 예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속담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항상 ‘더 좋은 것’을 찾아 애쓴다. 문제는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서 더 좋은 것의 기준이 뭐냐는 거다. 어차피 같은 값이 전제라면 절대적인 가치가 크게 차이 나진 않을 터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일 때 우리는 평균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고르고, 그 선택지는 보통 정답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늘 정답이 뭔지 찾아 헤맨다. 조금이라도 정답에서 어긋나는 것은 오답이 되고, 오답을 고르면 정답에 비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차라리 개인의 선택에 국한되는 문제라면 혼자 고민하고 끝일 텐데, 다른 사람의 선택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누군가 집이나 차나 직장을 골랐을 때 우리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데, 그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아?”라고 묻는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가진 것의 빛이 바래 보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좋은 것, 뛰어난 것을 추구하는 향상심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산업화 시기 한국의 빠른 성장을 이끌어 온 주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에 가치를 매겨 비교한다면 결국 가장 좋은 것 한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작게나마 흠결이 있게 마련이다. 그 흠결에 집착해 다양한 선택지의 가능성을 묵살한다면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
기자는 패션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요즘 옷 가게에서 다홍색 치마보다는 검은색과 같은 무난한 색상이 더 인기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크림색, 민트색, 노란색 등 온갖 색깔의 치마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내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야 한다면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겠다. 그 결과가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이기우 기자, 조선일보(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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