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를 정책 경쟁이 아닌 반대파 제거에 쓴 선조의 비극
시대를 읽지 못한 선조
일본 침략이 임박한 것 알았지만 선조는 위기 대응 실행하지 않아
왕권 유지에 붕당을 이용하면서 공론은 사라지고 정쟁만 남아…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재앙 초래

폭풍 전야의 고요. 1591년 1월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2년 3월까지의 ‘선조실록’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전쟁으로 많은 사료가 소실된 탓도 있겠지만, 그 시기 조정은 유난히 고요하다. 사료가 온전하지 않기는 선조 즉위 초반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경연에서는 국가 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논의가 이어졌고,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뒤에는 정치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직전 1년여의 침묵은 의미심장하다.
위기 인식은 충분히 있었다
이 시기 조정의 관심은 여전히 정쟁에 머물러 있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을 둘러싼 ‘관작 남용’ 논란, 일본 통신사의 엇갈린 보고, 정여립 사건 이후 정철의 제거와 서인계 인사의 대거 등용이 주요 현안이었다.
전쟁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조는 철환을 마련해 훈련할 것을 건의했고, 비변사는 호남과 영남의 읍성을 증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백성의 원성이 커지자 공사는 중단되었다. 임진왜란 두 달 전에는 신립 등을 각 도에 보내 군비를 점검했지만, 실록은 군읍들이 “형식적으로 법만 피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이 일본의 전쟁 준비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과 침략 움직임을 여러 경로로 파악했고, 1590년에는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내 일본의 정세를 살폈다. 이듬해에는 명나라에 히데요시의 ‘가도정명(假道征明)’ 계획까지 알렸다. 임란 발발 33개월 전인 1589년 8월 경연에서 선조는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성을 잘 지켰는데, 지금은 하루 이틀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난다”고 탄식했다. 전라우도 방어사 변협은 그 원인을 “인심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백성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며, 병력이 많고 성곽이 견고해도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死長之心]이 없으면 성은 끝내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조 역시 “일본이 우리나라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으며, 수만 명이 쳐들어올 기세”라고 우려했다. 국론이 흩어지고 민심이 떠났으며 일본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진단을 국가를 바꾸는 행동으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조선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정보 부족이 아니라 실행 부재였다.
붕당 갈등을 왕권 유지에 이용
도대체 선조는 무엇을 놓쳤을까. 대내적으로 그는 즉위 초 개혁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이황·조식 등 당대 최고 학자들을 불러 국정을 논했지만, 그들의 핵심 제안을 정책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특히 이이가 제안한 경제사(經濟司) 설치와 국가 개혁 구상은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을 방안이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도 국가를 바꾸는 동력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조정은 종계변무의 성과를 기념해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문제를 논의하고, 일본에서 보내온 공작새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전쟁 구상을 면밀히 분석하거나 명나라와 공동 대응 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국가의 중심 의제로 떠오르지 못했다. 선조 정권은 위기를 알고도 그것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선조실록’을 다시 읽으며 특히 눈에 띈 것은 붕당정치에 대한 선조의 인식이었다. 그는 조선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군자붕당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흔히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을 붕당정치의 출발로 본다. 그러나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 세력이 갈리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발생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정치 원리로 해석한 이이의 통찰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사진 속 선조실록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다. /국가유산청
이이는 1574년 ‘만언봉사’에서 조정의 비판과 공론을 사사로운 당파싸움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듬해 실제로 붕당이 형성되자 ‘성학집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구양수의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군자에게만 붕이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군자의 붕당을 공론을 모아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로 보았다. 따라서 임금은 붕당을 없애려 할 것이 아니라, 군자들이 학문과 정책으로 경쟁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이가 동인 인사들과 가까웠으면서도 세력이 약한 서인에 자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인과 서인이 비슷한 힘으로 정책을 놓고 경쟁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선조 역시 한때 “군자라면 그 붕당이 있음을 걱정하지 말고 적음을 걱정해야 한다”며 “나도 율곡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조의 이해는 거기까지였다. 군자붕당론의 핵심은 붕당이 인재와 정책으로 경쟁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었지만, 선조는 동인이 강해지면 서인을, 서인이 강해지면 다시 동인을 끌어들여 서로 견제하게 했다. 갈등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바꾸기보다 왕권 유지에 이용한 것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589년 정여립 사건이었다. 선조는 붕당을 통해 국정을 발전시키기보다,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거하는 길을 택했다. 서인 정철을 앞세운 대대적인 동인 숙청은 붕당을 공론을 형성하는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쟁 집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신료들은 나라를 위한 정책 경쟁보다 당파의 존립과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게 되었고, 조정의 공론은 점차 힘을 잃어 갔다.
내부 결속 약화되며 대재앙으로
그렇다면 공론을 위한 붕당은 왜 정쟁의 도구로 변해 갔을까. 이정철 교수는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에서 그 원인을 선조 초 사림(士林)이 지녔던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에서 찾는다. 사림은 두 세대에 걸친 사화를 견디며 대의의 힘을 경험했다. 대의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기득권 세력을 훈구로 규정하는 강력한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뒤 그 대의는 공론을 세우는 힘이 아니라 상대를 배척하는 명분으로 변질되었다. 운동의 시대에는 진실이었던 대의가, 집권 이후에는 독선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된 것이다.
1582년 율곡이 만언소를 올려 시폐 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유성룡마저 당론에 따라 반대했다. 박순의 탄식처럼,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선 지식인들은 ‘사슴’(당파의 승리)을 좇느라 ‘태산’(국가의 안위와 미래)을 보지 못했다.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타협은 ‘불의와의 타협’으로 여겨지기 쉽다. 상대를 척결해야 할 소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공론은 사라지고 정쟁만 남는다. 아무리 선한 진정성을 지닌 지식인이라도 진영의 승리를 공공의 이익보다 앞세우면 국사와 민생을 위한 개혁은 멈추고 정치는 소모전으로 전락한다.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편벽되어 말하는 데 중도를 얻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에서 모두가 중도에 맞는 말만 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세종 시대에도 대신들은 어전에서 서로를 간사하고 불충한 자라고 공격했고, 김종서 역시 뇌물 수수와 토지 전횡 혐의로 거듭 탄핵받았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국가 발전의 힘으로 바꾸는 지도자의 역량이다. 세종은 “임금의 신임을 받으면 동료의 미움을 사는 것은 예로부터의 풍토”라고 진단하고, 비난이 거셀수록 사실을 확인해 인재를 보호했다. 반면 선조는 유력 세력을 번갈아 끌어들여 서로를 견제하게 했다. 그 결과 율곡 이이가 꿈꾸었던 ‘정책 경쟁의 붕당’은 사라지고, 상대를 제거하며 균형만 맞추는 ‘시소 정치’만 남게 되었다.
선조 시대가 이전처럼 국제적 평화가 이어진 시기였다면, 그는 큰 탈 없이 나라를 이끈 평범한 국왕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시대는 북방에서 여진 세력이 급성장하고, 남방에서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을 꿈꾸던 격변의 시대였다. 선조 역시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 역량을 그 방향으로 집중시키지 못한 채, 눈앞의 정치적 갈등을 수습하는 데 머물렀다. 그 대가는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파국으로 돌아왔다.

선조실록 24년(1591년) 2월 16일의 한 대목. 이순신을 불차탁용(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벼슬에 등용)한 것을 사간원이 비판하자 선조는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조선일보(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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