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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를 헤쳐갈 대한민국 필살기, 조선업] ....

뚝섬 2024. 11. 26. 09:09

[트럼프 시대를 헤쳐갈 대한민국 필살기, 조선업]

[74년 만에 美 해군에 보은하는 'K조선'] 

[日과의 기술전쟁 승리로 이끈 4大 선봉장]

 

 

 

트럼프 시대를 헤쳐갈 대한민국 필살기, 조선업

 

[강경희 칼럼]

변변한 선박도 못 만들던 때 인재부터 키웠다
조선 입국, 해양대국 꿈의 반세기 성장사
세계 최고 조선 산업으로 한미 동맹 새 물꼬 터야
 

한화오션이 보유한 친환경 선박 기술, 스마트십 기술, 스마트 야드 기술 등을 필리 조선소에 효과적으로 접목해 북미 지역에서 기술·원가 경쟁력을 갖춘 조선소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사진은 필리 조선소 전경. /한화그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조선업’을 콕 찍어 언급하면서 한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대한민국 산업에 놀라운 것이 많지만 특히나 조선 산업은 기적을 일궜다. 본격 도약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울산의 현대 미포조선소, 거제의 옥포조선소 등이 준공된 1970년대이지만 씨앗은 1950~1960년대부터 뿌려졌다.

 

변변한 선박 만들 기술이 없어도 인재부터 길렀다. 1946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공과대학에 9개과를 설치했는데 항공조선과를 신설했다. 학과는 생겼지만 가르칠 교수도, 교재도 없었다. 조선공학도들이 기계과 수업을 들으며 미국 조선학회 자료 등을 구해 함께 해석하고 토론했다. 1947년의 2회 입학생들은 동숭동 교정에서 길이 6.5m 소형 선박을 만들다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이승만 박사가 기거하던 이화장 전화선이 끊겼다. 사고 원인을 들은 이 박사가 교정을 찾아가 학생들을 격려하고 부식도 챙겨줬다.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일본 잠수함 설계 경험이 있는 김재근 교수가 학과 신설 2년 6개월 만에 부임해 교육의 기틀을 잡았다. 6·25전쟁 중에 졸업한 초창기 조선공학도들은 대학 마치고 곧바로 강단에서 후배도 가르치고 미 해군 함정 수리도 담당했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출발부터 군·민 합동, 산·학 협력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미국 원조로 미네소타 대학이 주관하는 서울대 재건 계획이 가동됐다. 공학·의학·농학을 중심으로 교수진을 미국에 연수시키는 1950년대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산업화에 인재 공급의 밑거름이 됐다. 조선공학과는 미네소타대 대신 MIT로 연수를 갔다. 교수도 없이 학과만 달랑 만들었는데 10여 년 만에 모든 교수진이 명문 MIT로 연수를 다녀왔다. MIT 실험실과 같은 기자재도 들여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이주 교민들이 힘들게 모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1954년 인하공대를 설립했다. 인하공대 개교 학과 6개에도 조선공학과가 포함됐다.

 

조선업 청사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다. 1968년 신설한 초대 청와대 경제2수석(경제1수석은 김학렬)에 36세 젊은 엔지니어를 발탁했는데 세계 최고 조선소에서 역량을 쌓은 인재였다. 1951년 서울대 조선항공과에 입학한 신동식은 스웨덴 코쿰 조선소에 어렵게 취업 문을 뚫었다. 선박 설계를 배우고 세계적 명성의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국제 검사관,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일했다. 박 대통령이 방미 길에 그를 설득해 청와대로 데려왔다. 신동식 경제2수석이 거제도를 수십 차례 오가며 초대형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조선업의 성공은 기업인 정주영을 빼고는 논할 수도 없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배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우리가 하는 건설 공사를 육지에서 수상으로 장소를 옮겨 건설하는 차이일 뿐”이라며 1972년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해 조선소 지으면서 선박 건조도 동시에 마치는 기염을 토했다.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건조되는 선박의 절반을 일본이 수출했다. 1970년대 후반 한 일본 언론이 ‘한국의 조선업을 진단한다’는 기사를 냈다. “한국 조선업이 결코 일본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기사 말미에 “그러나 각 대학의 조선학과에 좋은 인재들이 많이 입학했다. 이들이 기적을 이루어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문장을 여운처럼 달았다(박중흠 전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회고). 정부 리더십, 탁월한 기업가 정신에, 두껍게 형성된 조선업 인재들이 뭉치니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조선업은 명실공히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중국 조선업의 팽창으로 수주량은 1, 2위를 다투지만 고부가 선박 제작은 압도적 1위다. 트럼프의 ‘조선업’ 언급에 태동기를 떠올린 건 조선업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 산업이기도 하지만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수호(守護) 산업으로 출발했다. 나라의 토대를 건설한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일찌감치 그 중요성을 알았다.

 

지난해 미 해군 측이 우리나라 조선소를 샅샅이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 트럼프 발언이 돌발적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이 군함을 척척 만드는데 미국의 군함 건조 능력은 급격히 쇠퇴해 위기감이 상당하다. 트럼프 2기에 조선업 분야에서 미국과 기술 협력 방안을 주도적으로 제안해 나간다면 한미 동맹의 새로운 물꼬를 터나갈 수 있다고 본다. 당연히 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여 민·관 전문가 팀을 만들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

 

-강경희 논설위원, 조선일보(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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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만에 美 해군에 보은하는 'K조선'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피란민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미 해군 수송함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국 ‘조선왕’ 헨리 카이저가 2차 세계대전 때 3800척이나 만든 리버티 수송함 중 한 척이었다. 후버댐 건설에도 참여한 건설 업자 카이저는 선박 건조법을 혁신해 한 척당 건조 시간을 355일에서 17일로 단축했다. 기록 경신을 위한 시험 제작에선 4일 15시간 만에 리버티 한 척을 완성하기도 했다.

 

▶카이저의 혁신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배를 만들 때 용골부터 세우고 나무, 철판을 붙이던 방식을 버리고, 선박 부품이 들어간 블록을 공장에서 먼저 만든 다음, 조선소로 가져와 최종 조립했다. 또 하나는 리벳(버섯 모양 못)으로 철판을 붙이지 않고, 용접으로 철판을 붙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의 조선소가 배를 워낙 빨리 만들어 내자, 카이저에게 ‘론치얼랏(Launch a lot·대량 진수) 경(卿)’이란 별명이 붙었다.

 

▶조선 강국 미국이 1920년에 제정된 존스법(Jones Act)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 법은 미국에서 만든 선박만이 미국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물품을 운송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 조선사에게 자국 선박 독점권을 준 것이다. 경쟁력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조선소들이 1960년대부터 미국 조선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선 사실상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등 군함 건조만 이뤄지고 있지만 생산성은 한심하다.

 

▶미국 조선업 몰락은 세계 안보 지형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지탱하는 미 해군이 몇 수 아래로 보았던 중국 해군에 밀릴 위기다. 중국의 선박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항공모함 수는 11대3으로 미국이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전투함 숫자는 370척 대 280척으로 중국에 역전됐다. 미국 싱크탱크가 “한국·일본 조선사에 빨리 SOS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고, 상원의원들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지난 2월 미 해군성 장관이 한국 조선소를 방문, “원더풀”을 연발하고 돌아가더니, 엊그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화오션이 미 해군 함정 정비 1호 계약을 따낸 것이다. 앞으로 한국 조선소 도크에서 미 항공모함을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미 해군 함정 MRO(유지·보수) 사업 규모는 연간 20조원에 이른다. 실적이 쌓이면 미 해군이 군함 건조를 맡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 군함에 피란민 운송 신세를 졌던 한국이 74년 만에 미국이 해군력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지원국으로 거듭났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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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과의 기술전쟁 승리로 이끈 4大 선봉장

 

한국 산업계에서 최고의 극일(克日) 선봉장으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꼽힌다. 그는 1974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뒤, 40여 년간 줄곧 기술 전쟁을 이끌었다. 이 회장의 극일 화두는 '일본을 철저하게 제대로 배우고 아는 것'이었다. 그는 2004년 삼성전자 임원들 앞에서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우리가 소니보다 기술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가? 소니를 선생님으로 대하라. 우리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다"며 크게 화를 냈다. 삼성의 안일한 태도를 꾸짖는 말이었다. 그 후 삼성은 TV 시장에서 세계 1위 소니를 넘었다.

고(故) 박태준 회장은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 산업화의 불을 댕겼다. 박 회장에게 극일이란 목숨 걸고 하는 치열함이었다. 그는 "포항종합제철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제철소 건설에 일제식민지 배상금이 쓰였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권혁기 교수(일본학)는 "일본의 힘을 빌려, 일본을 능가한 사례"라고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팅 회사의 최고경영자 앞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울산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우리나라의 조선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 회장은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보다 300년 빠르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이를 현실화시켰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 갔다가 충전해 여러 번 쓰는 2차 전지를 보고, 20여 년간 세계 1위에 오를 때까지 끈질기게 연구개발을 밀어붙였다. 2005년엔 2000억원 가까운 적자를 냈는데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공할 날이 온다"며 독려했다. LG화학은 2009년 일본의 니켈수소 배터리보다 50% 이상 출력을 높인 제품 개발에 성공했고, 전 세계 20여 개 자동차업체에 공급하며 일본보다 한발 앞섰다.  

-성호철, 산업부 기자, 조선일보(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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