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일하면서 무슨 수로 혁신을 하는가" ]
[‘덜 하기’에서 ‘더 하기’로… 풍향 바뀌는 ‘일자리’ 시대정신 ]
[머스크식 '주80시간 근무']
['새로운 박정희'도 나와야 한다!]
"적게 일하면서 무슨 수로 혁신을 하는가"
"세상 바꾸려면 땀 흘려야" 머스크도 잡스도 한목소리
우린 '주 52시간' 초과 다툼… 땀 흘려 성공한 경험 잊어선가
일론 머스크 전기 표지 사진/사이먼 & 슈스터
어릴 적 읽은 소년지엔 종종 미래의 모습이 그려졌다. 온종일 빈둥거리며 놀아도 모든 게 풍요로운 천국이었고 혁신을 거듭하면 그런 날이 온다고 했다. 자라면서 혁신을 주도하는 나라가 미국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90년대 애플 광고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고 했는데, 미국은 에디슨부터 빌 게이츠를 거쳐 잡스와 머스크, 젠슨 황까지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가 끝없이 탄생하는 나라다. 그들 덕분에 세상이 더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머스크가 트럼프 2기 정부효율부를 맡아 지난주 낸 구인 공고가 ‘무엇으로 혁신을 이루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혁신의 대명사이니 적게 일하고 많이 받는 조건을 달 줄 알았는데 거꾸로였다. 주 80시간 일을 시키고 월급은 한 푼도 안 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런 공고를 냈다간 악덕 사업주란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노동은 없다. 나는 머스크가 줄 보상은 ‘혁신적인 리더와 함께 일하고 성공한 경험’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경험이 커리어 가치를 높여 더 좋은 회사,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현실적 판단도 물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우리 시대 두 명의 걸출한 혁신가인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의 평전을 썼다. 전기에 소개된 두 사람은 직원에게 과중한 노동시간과 열정을 요구하는 리더들이었다. 머스크는 일할 때 ‘광적인 긴박감’을 강조했다. 스페이스X 우주선 로켓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단지 긴박감을 잃지 않게 하려고 단 몇 주 만에 로켓을 세울 스탠드를 완성하라고 지시하는 식이다. 전기차 모델3 출시를 앞두고는 네바다 공장에 죽치고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직원들을 주 7일 노동으로 내몰았다. 잡스 평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1984년 매킨토시 출시를 앞두고 마지막 3일은 퇴근도 못 하게 막았다. 직원들에게 “해군이 되느니 해적이 되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표 달성에 매진하라 다그쳤다. 밤샘 끝에 과업을 완수하면 “여정 자체가 보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기에는 이런 두 사람에게 매료된 직원들의 증언이 여럿 실려 있다. 잡스가 생일을 맞으면 직원들은 고속도로 광고판을 사서 ‘생일 축하해요, 스티브.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ㅡ해적 일동’이라 썼다. 협력업체들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잡스는 납품 시간을 촉박하게 제시한 뒤 협력업체 경영진이 고개를 저으면 ‘빌어먹을 고자X들(Fucking Dickless Asshole)’이란 막말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밤샘으로 납기를 지킨 한 업체는 잡스가 한 욕설 머리글자를 딴 ‘팀 FDA’라 새긴 재킷을 만들어 자랑스레 입고 다녔다. 머스크의 닦달에 시달린 직원들도 기적 같은 성공을 맛보면 태도가 달라졌다. ‘지옥문이라도 선탠오일을 들고 따라 들어갈 마음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머스크의 구인 공고에 “나라를 기업처럼 운영하려느냐?”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 나라라고 다를 게 있나. 우리에게도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이 땀 흘리자”던 리더가 있었다. 그의 리더십은 강하고 매서웠지만 많은 국민이 그를 진짜 리더로 존경한다. 그의 여정에 동참해 성공을 맛봤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며 따뜻한 말을 하는 리더가 대세다. 그러나 본질은 머스크와 잡스처럼 성공을 경험하게 하고 땀 흘린 만큼의 보람을 안기는 리더, 그래서 여정에 동참한 것을 보상으로 느끼게 하는 리더다. 최근 주 52시간 초과 근무 허용 여부를 두고 우리 사회에 논란이 일고 있다. 혁신가의 나라 미국에서도 첫손 꼽는 혁신가는 여전히 열정과 헌신을 효율의 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정작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할까 고민한다. 우리가 땀흘려 성공한 경험을 해본 지 너무 오래돼 이러는가.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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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하기’에서 ‘더 하기’로… 풍향 바뀌는 ‘일자리’ 시대정신
[박중현 칼럼]
EU 보고서 “노동시간 감소가 美에 뒤진 원인”
日 알바 근무시간 늘리려 ‘103만 엔 벽’ 허물기
韓 반도체 R&D 인력 주 52시간제 예외 추진
글로벌 경쟁 속 달라진 ‘싸움의 법칙’ 적응해야
“사람 수 많아봐야 소용없어요. 기술 개발 마지막 단계에선 몇몇 핵심 인력이 얼마나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20여 년 전 방문한 한 대기업 연구소의 소장이 들려준 얘기다. ‘시라소니’ 같은 싸움꾼들이 수십 명과의 난투에서 살아남는 비결로 ‘적이 많아도 상대는 결국 주변 4명뿐’이라고 했다던 ‘싸움의 법칙’을 연상시키는 말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국이 글로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리튬이온 배터리, 유기발광다이오드 같은 기술이 모두 이런 식으로 개발됐다. 그 소장은 연구원들이 노닥거리는 시간이 아깝다며 커피 자판기 전원 줄을 가위로 자르고, 추석 연휴에 귀향 중인 연구원 차를 돌리게 해 일 시킨 일화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지금이라면 ‘갑질 상사’로 낙인찍히고, 주 52시간제 위반으로 고발됐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초격차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예전과 달리 핵심 인재들도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없게 만드는 여건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제품 출시가 코앞이어도 주 52시간 규제에 맞춰 오후 6시면 연구실 불을 끄고 퇴근할 수밖에 없어서다. 여야가 입법을 추진 중인 ‘K칩스법’에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넣어 달라고 산업계가 요청하는 이유다.
제조업 강국 독일에선 요즘 근로자의 과도한 ‘병가(病暇)’가 논란거리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독일 공장 직원들이 너무 자주, 그것도 금요일에 집중적으로 병가를 낸다는 이유로 직원 집을 불시에 찾아 꾀병 여부를 확인한 게 계기였다. “테슬라 공장은 인원이 부족하고, 작업량이 많아 병가가 많은 것”이라고 금속산업노조가 반발하자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경영자(CEO)가 “독일의 높은 병가율은 기업 입장에선 문제”라며 테슬라 역성을 들었다.
독일 근로자의 1인당 평균 연간 병가 일수는 19.4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과도한 병가가 없다면 마이너스 0.3%였던 작년 독일의 경제 성장률이 플러스 0.5%로 높아졌을 거란 분석도 있다. 두 달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의뢰로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낸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과의 경쟁에서 유럽이 뒤처진 이유로 첨단 산업에 대한 투자 부족, 낮은 생산성과 함께 노동시간 감소를 꼽았다.
지난달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해 야당과 연정을 통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게 된 일본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요즘 청년, 주부의 알바 근로시간 연장을 가로막는 ‘103만 엔(약 930만 원)의 벽’과 씨름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총리로 만들어준 연정 파트너 국민민주당의 총선 핵심 공약이 ‘103만 엔 벽 허물기’였기 때문이다.
103만 엔은 일본에서 23세 미만 대학생 자녀가 알바로 돈을 벌었을 때 부모가 부양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연소득의 상한이다. 그 이상 벌면 연말정산 때 공제를 못 받는다. 지금은 150만 엔으로 높아진 배우자 공제 기준도 예전에 103만 엔이었기 때문에 이 선을 직원들의 배우자 수당 지급 기준으로 삼는 기업이 많다. 통상 하루 4∼5시간, 주 3∼4일 일하는 주부, 청년 알바가 근로시간을 늘렸다가 소득이 이 선을 넘으면 가족 전체로 볼 때 경제적으로 손해여서 더 일할 의지를 꺾는 제약이 된다는 비판이 많다.
한국에선 주 5일,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게 휴일 하루 치 일당을 더 주도록 하는 ‘주휴수당’이 일본의 103만 엔처럼 근로시간 연장 기회를 막는 벽이다. 주휴수당은 근로 여건이 열악하던 1953년 일본의 법을 베껴 만든 제도로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나라에만 남아 있다. 높은 최저임금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자영업자가 많아 ‘15시간 미만 초단기 알바’는 한국 파트타임 일자리의 표준이 됐다. 수입이 더 필요한 근로자는 따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 중 최장 근로시간의 오명을 벗기 위해 덜 일하고,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는 유럽식 근로 형태를 지향점으로 삼아 왔다. 지금도 야당과 노동계는 ‘주 5일제’로도 부족하다며 ‘주 4.5일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선진 각국은 다른 나라보다 강한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들은 더 많은 경제적 보상을 위해 근로시간을 늘리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은 일론 머스크가 “주 80시간 일할 용의가 있는 초고지능(super high IQ) 혁명가를 모집한다”고 한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일자리와 관련한 시대정신이 빠르게 바뀌는데 한국만 다른 길로 가선 곤란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동아일보(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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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 주 80시간 일할 사람 찾는데 우리는 주 52시간 예외 0.7%뿐. 황새 뛰는데 뱁새 기는 중.
○첫 한국계 美 상원 의원 앤디 김, 이민 1세대 부친도 주목. 끊길 듯 이어지는 이런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의 힘.
-팔면봉, 조선일보(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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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식 '주80시간 근무'
테슬라 창업주 일론 머스크는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무섭게 일에 몰두하며 한계를 돌파하곤 했다. 2017년 전기차 모델3 출시를 앞두고 그는 네바다 공장에 진을 친 뒤 네댓 시간만 잠자며 임직원들을 무자비하게 굴렸다. 그가 엔지니어들에게 부여한 목표는 ‘생산 능력을 3배로 끌어올리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직원들은 밤 10시까지 일하고, 공장 바닥에서 눈을 붙인 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는 이렇게 무자비한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머스크 평전엔 그가 기업 현장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2021년 머스크는 우주 탐사기업 스페이스X의 텍사스 발사대를 찾았다. 그런데 일하는 직원이 안 보였다. 금요일 밤늦은 시각이니 사람 없는 게 당연했지만 머스크에겐 용납될 수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그는 ‘열흘 내 발사 준비’라는 촉박한 시한을 제시하며 다른 사업장에서 지원 인력을 차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비행기든 자동차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즉시 이곳으로 오라”는 이메일을 날렸다. 새벽 1시였다.
▶머스크가 경영하는 기업엔 삶의 질이나 워라밸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을 비상 상황에 몰아넣고 한계점까지 밀어붙여 성과를 뽑아내는 게 그의 주특기였다. 머스크는 이를 ‘광적인 긴박감’이라 불렀는데, 못 견디고 회사를 떠나는 ‘피난민’들도 속출했다. 그의 비전에 공감해 기꺼이 주말도 반납하는 추종자들이 남아 전기차에서 자율주행차, 저궤도 위성, 인간형 로봇 등에 이르는 혁신을 이루어냈다.
▶머스크는 첨단을 달리는 혁신 기업가지만 경영 수법은 첨단과 거리가 멀었다.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분야에 뛰어들어,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고, 터무니없는 목표를 내건 뒤, 독재자처럼 권한을 틀어쥐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비전을 현실화했다. 그의 성공 신화를 보면 “이봐, 해봤어?”라며 조인트 까는 정주영의 1970년대식 리더십이 떠오를 때가 많다.
▶트럼프 2기 ‘정부 효율부’ 수장으로 내정된 머스크가 구인 공고를 내면서 ‘주 80시간 근무’를 조건으로 걸었다. “주당 80시간 이상 기꺼이 일할 수 있는 초고지능의 ‘작은 정부’ 혁명가들이 필요하다”고 썼다. 한국 같았으면 당장 주 52시간제 위반 혐의로 고발되고, 악덕 기업인으로 매장당했을 것이다. 필요한 곳에는 초과 근무를 인정하는 유연한 제도와 문화,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밤낮없이 일할 준비가 된 인재들의 열정이 미국을 혁신 국가로 만들었다.
-박정훈 논설실장, 조선일보(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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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박정희'도 나와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정, 균형, 포용으로 위장된 발전 저항 문화로 뒤덮여 있다
"해봤어?"라는 정주영의 도전, "세계 넓다"는 김우중의 모험, "안 되면 죽자"던 박태준의 분투
이런 '박정희의 가치' 되살려야 우리도 살고 자손도 산다!
# 20년 전인 1999년 '문화적 가치와 인류 발전'이란 주제로 미국예술과학학회 심포지엄이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열렸다. 이 심포지엄의 내용은 당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시점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가 그것이다. 책의 부제 역시 '어떻게 가치가 발전을 만드는가?'였다. 당시 우리는 외환 위기를 헤쳐 나오느라 '문화'니 '가치'니 하는 얘기에 별반 관심 둘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심포지엄을 주도했고 우리에게는 '문명충돌론'으로 더 잘 알려진 새뮤얼 헌팅턴은 '대한민국'을 책의 첫머리에 띄우며 지금은 시사 상식처럼 되어버린 '한국-가나' 비교론을 제시했다.
# "1960년대 한국과 가나의 1인당 GNP를 포함해 여러 경제지표는 난형난제였다. 그런데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 규모를 지닌 나라가 되었지만 가나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도 안 되었다." 이것이 '한국-가나' 비교론의 골자다. 하지만 정작 헌팅턴이 강조했던 것은 그런 격차를 만들어낸 것이 다름 아닌 '문화'였고 그 안에는 한국인 특유의 '가치투쟁'이 녹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국인의 치열한 가치투쟁이 만들어낸 문화가 엄청난 발전과 성장상의 격차를 만들어낸 진짜 원인이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 지난 반세기에 걸친 한국인의 가치투쟁은 단적으로 '도전, 모험, 분투'의 세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 맨손으로 현대그룹을 일궈냈던 정주영의 강원도 통천 사투리에 담아낸 "해봤어?"라는 한마디가 '도전의 가치투쟁'을 압축한 것이라면, 세계 경영의 큰 판을 벌였던 대우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모험의 가치투쟁'을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었다. 또 제철입국을 선포하며 "제철소 성공 못하면 우향우해서 포항 바다에 다 빠져 죽자"는 박태준의 투박하고 처절한 외마디는 '분투의 가치투쟁'이 응집된 시대의 어록이었다. 그리고 이런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시대정신과 문화를 형성했던 것이다.
#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더 이상 도전하지도, 모험하지도, 분투하지도 않는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시대정신과 문화는 그저 촌스러운 외마디 구호로 퇴색돼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해진 표현처럼 외면되고 말았다. 그 대신 공정, 균형, 포용이란 아주 잘 포장된 가치들이 전면화되었다. 도전, 모험, 분투의 벌거벗은 가치는 공정, 균형, 포용이란 잘 포장된 가치들 앞에서 마치 화려한 스펙의 자식을 키워낸 남루하고 못 배운 부모의 모습처럼 뒷걸음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토록 절박하게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을 벼려왔기에 공정, 균형, 포용이란 가치가 설 땅도 생긴 것 아닌가.
# 지금의 40대까지는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오죽하면 '一日三食 完全保障(일일삼식 완전보장)'이 큼지막한 선거포스터에 버젓이 유일한 공약 사항으로 찍혀 있었을 정도로 우리는 극한적인 가난과 기아선상에 서 있었다. 그 처절한 가난과 남루함을 일거에 남들이 부러워할 대상으로 돌변시킨 원동력이 다름 아닌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으로 일궈낸 '발전지향의 문화'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때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남들이 보았던 민주주의의 장미꽃을 우리가 직접 피워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역시 사회구조상 중산층이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졌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그 누가 부인할 건가. 실제로 우리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사람이 굶어 죽는 기아선상의 가난을 몰아내고, 심지어 IMF 외환 위기마저 최단기간에 극복하며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잘살아보세"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발전지향적 문화' 덕분 아니었던가.
#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발전지향적 문화'가 아니라 '발전저항적 문화'로 뒤덮여 있다. 그 '발전저항적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공정, 균형, 포용'이란 이름의 가치다. '발전지향적 문화'가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부(富)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를 만들고 새로 창출하는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분투하며 저마다의 가치투쟁을 벌인다. 국가는 그런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에서 개인과 기업이 겉돌지 않도록 걸림돌을 제거하는 규제 완화와 경제생태계 활성화에 온 힘을 기울이는 '기업가형 국가'가 된다. 반면에 '발전저항적 문화'로 뒤덮인 사회에서는 부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롭게 부를 창출하기 위한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투쟁'은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 거부한 채, 오로지 이미 존재하는 부를 '공정하게' 나누고 '균형되게' 갈라먹으면 그게 '혁신적 포용'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화되어 버린다. 이런 '발전저항적 문화'에서 국가는 이미 존재하는 부를 세금으로 쓸어모아 퍼주기와 나누기에만 골몰하는 '징수 배급형 국가'로 전락해 버린다.
# 지금 '새로운 노무현'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 균형, 포용이란 이름의 가치는 노무현의 가치다. 그렇다면 지금 '새로운 박정희'도 나와야 한다. 도전, 모험, 분투의 가치는 박정희의 가치다. 두 개의 가치는 충돌하고 다툴 수밖에 없다. 진검승부하듯 제대로 다투면 거기서 새로운 미래 가치가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나라와 미래가 전진할 수 있다면 회피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대대적인 가치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내일을 결정한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조선일보(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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