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정당정치의 기대와 희망까지 사라지고 있다] .... ['가짜 베토벤']

뚝섬 2023. 6. 2. 08:23

[정당정치의 기대와 희망까지 사라지고 있다]

[민주당, 왜 “임금님 벌거벗었다” 외치는 사람 하나 없나]

[‘21세기 베토벤’의 사기극]

['가짜 베토벤'] 

 

 

 

정당정치의 기대와 희망까지 사라지고 있다

 

[김형석 칼럼]

국가 질서 파괴해도 법적 책임 묻기 힘든 현실
文 정부 병폐, 치유하기보다 부추기는 민주당
反민주적 행태 계승하면 비판 피할 수 없다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얼마 안 되는 경제적 부정으로 감옥에 갔는데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 손실을 국가에 남겨 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업적이 성공적이었다고 국민의 칭찬을 끌어내려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우도 그렇다. 최모 여인과 가족에 대한 특혜와 작은 비리로 국민의 질타를 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그에 비하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고 당 대표가 된 이재명이 경기도지사 재임 기간에 보여 준 사회경제적 부조리는 견줄 바가 아닌데, 나는 단돈 일 원도 받은 적이 없다는 발언을 할 수 있는가라는 얘기들이다.

그들도 감옥에 가야 한다든지, 왜 책임을 묻지 않느냐는 불평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현실이 사회적 상식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는 우려와 걱정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법조계 사람들은 어떤 일을 위법으로 하면 처벌될 수 있으나, 그보다 큰일을 저질러도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자신은 불법을 면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필요한 권리는 자신이 차지하고 뒤따르는 의무와 책임은 동료나 부하들에게 전가한다. 정치자금이나 필요한 지원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받을 수 있게 먼저 처리하는 길을 택하곤 한다.

더 중요한 문제는 사소한 법적 위법은 증거가 있으나, 큰 경제질서의 파괴는 정치적 범악이기 때문에 법과 정치가 문제 삼기 어렵거나 책임을 물을 법규 밖으로 밀려난다. 법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을 심판 처리할 수 있어도, 국가나 사회적 질서 파괴의 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국민과 역사가 원전 비리와 경제적 손실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은 성장주도 소득 정책으로 성공했다. 지금은 소득주도성장 같은 무지에서 오는 정책을 수용 계승하는 자유국가는 없다. 민주당도 정부의 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非)문 세력이었던 이재명이 대선 후보가 되었으나, 국민은 ‘국민의힘’ 정부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비판과 동정으로 바뀌고 있다. 민주당은 진보를 운운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도덕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지금은 정당이 필요악의 정치 주체가 되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국민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묻는다. 지난 5년 동안 문재인 정부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업적을 남겼기에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업적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 무너져 버렸다. 다시 우리가 집권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그에 대한 믿을 만한 해답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고, 현재의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가 남겨 준 정치 사회적 병폐를 치유해 주기보다 더 부추기고 있다. 문 정권의 과거를 연장하고 싶은 욕망뿐이다.

문재인 정부는 왜 실패했는가. 21세기 초반을 맞고 있는 정치 현실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성행했던 후진국과 공산국가 이념에 융합시키거나 그 이념에 맞추어 가려는 방향과 노선을 택했다. 북한과의 관계가 작용했고 중국의 위상과 비슷한 정치 방향이 북한과의 공존과 평화를 위하는 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을 남겼는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부터의 정치와는 반대로 이념을 위한 정권으로 변신했고 법치국가의 정도를 이탈했다. 민의(民意)보다 이념을 앞세우는 정권을 위한 정치의 과정을 택했다. 우리의 정치이념만이 국민 복지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386에서 586으로 이어진 운동권의 정치 방향을 따른 것이다.


촛불혁명이라는 개념을 선도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에서 개선 그리고 개혁으로 가는 길이다. 투쟁에서 혁명을 앞세우는 정치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선택이었다. 그 실천 개념으로 나온 것이 적폐 청산이다.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국제적 협력을 단절시키면서 우리의 길을 택한다는 신념이다. 세계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거부해 온 노선이다. 그런 5년을 보냈기에 대한민국의 처지에서는 무엇을 건설했고 무엇을 남겼는가를 묻게 된다. 모든 방향이 다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방법과 과정이 비(非)·반(反)민주적이었다는 뜻이다. 그 방향과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민주당이라면 국민의 정상적인 비판과 판단을 피할 수 없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지도자는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고, 정치인들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을 사랑하는 국민의 기대를 위해서라도.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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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왜 “임금님 벌거벗었다” 외치는 사람 하나 없나

 

[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사람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사람의 처신에서 느껴지는 그 ‘사람의 값’이다. 주로 특정 에피소드를 통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81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한 청년이 암살을 시도했다. 총알이 몇 발이나 몸에 박힌 채 응급실로 실려간 그는 그 심한 통증 속에서도 온 국민을 한번 크게 웃게 해 주었다. 진찰하러 들어온 의사에게 그가 던진 “당신 (나와 같은) 공화당원이지요?“라는 그 질문, ‘그래야 내가 안심하겠다’는 의미의 그 조크는 온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위기 속에서도 내면의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우리 대통령’의 그 느긋함을 읽은 것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한 곡조 뽑았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속에서 만면에 웃음을 띤 바이든 대통령이 그를 포옹하는 장면은 두 나라 국민 모두를 흐뭇하게 해 준 장면이었다. 일국의 국가원수로서 자신의 외적인 위엄을 포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윤 대통령의 인간적 품격에 다소 플러스가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품격 노출은 이렇게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정의감, 애국심, 상식, 용기, 결단력 등이 다 ‘품격’ 소재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 품격이 드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2017 중국을 방문했을 대통령은 3 4일간 방문 기간 끼니 여덟 끼를 사실상 혼자 먹었다. 누구보다 중국인 친구가 절실히, 또 많이 필요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런 기괴한 처신을 한 데에 참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히 그는 ‘품격’ 면에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대통령을 수행한 대한민국 기자단 여러 명이 공항에서 중국 공안들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마디로, 세계 외교 사상 유례가 없는 기괴한 사건이었다.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에 대한 문 대통령의 침묵이었다. 중국 정부에 항의하기는커녕, 진상 조사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내내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심히 굴욕적인 결말이었다. 그런 굴욕을 태연히 자초하는 대통령의 그 품격,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는 그의 임기 초반이었다. 그 후 4~5년간 그의 통치 스타일을 보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통치 기간 내내 거의 모든 면에서 그 ‘굴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가 중국에 보였던 바로 굴종 모습이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바로 ‘진보’ ’내 편’이었다. 그는 임기 중 내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에게 무조건 퍼 주고, 봐 주고, 챙겨 주었다. 한마디로 그의 ‘품격’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공감하리라 믿는다. 그의 조건 없는 굴종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것은 국민적 불행을 불러와 버렸다. 바로 ‘국민 분열’이다. 즉 ‘환호하는 진보’와 그에 반발하는 그 이외의 사람들 간의 대결과 갈등, 그것이 낳은 분열이었다. 대한민국 70여 년 역사에서 우리 국민이 이런 식으로 두 조각으로 ‘쫙’ 갈라진 적은 정말 없었다.

 

그것은 비극적 현상을 하나 낳아 버렸다. 불행히도 바로 문재인의 낮은품격 우리 국회까지 전염되어 버렸다는 불행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우리 국회의 최악 저질화’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모’ 등의 단어들이 상징하는 야당 의원 질의의 ‘저급성’ ‘저질성’ ‘경박성’ 등은 정말 우리가 일찍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이제 상당수 국민은 그 야당 의원들 ‘질의’를 질의라기보다 일종의 ‘생떼’라고 느끼는 듯하다. 참으로 품격의 심각한 추락이다. DJ, YS, 노무현 같은 비전을 가진 리더들, 그리고 그들의 수제자들이 대정부 질문에서 보여주었던 그 진정성, 용기, 기개 넘치는 질의는 이제 우리 국회에서는 완전히 아득한 옛 추억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 우리 야당에는 또 다른 거대한 폭풍이 함께 덮치고 있다. 바로 당의 근간이 되는 리더들의범죄 혐의 퍼레이드. 한마디로 근대 선진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전무후무한 진풍경이다. ‘처럼회’ ‘개딸’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거의 광신적 지지 그룹이 있는 그 과격하고도 불길한 열기와 합쳐져 이 나라 야당은 정말 전무후무한 ‘품격’ 추락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추락이 문재인 집권 5년 동안 일어났다. 불과 5 만에문재인급품격으로 나라 국회마저 추락해 버린 것이다. 문제는 미래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민주당의 쇠망은 거의 불가피하리라고 나는 본다. 의원 수백 명의 제1 야당에서 의원 1명의 정당으로 폭삭 망해버린 일본 사회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리 국민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엄청나게 똑똑하며 동시에 용감한 국민이다. 우리는 세계 선진국 중 유일하게 20세기 들어 소위 민중 혁명을 두 번이나 일으킨,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경력을 지닌 국민이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은 ‘정의’를 위해 ‘분노’할 줄 알고 또 그 분노를 실행에 옮길 만한 용기를 충분히 가진 국민이다. 그런 국민 앞에서 정파가정의 저렇게 함부로 짓밟다니…. 나는 솔직히 그들이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하루빨리 대오각성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당의 그 품격, DJ·노무현급 품격을 되찾아야 한다. 한때 그 당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이 당에는 어찌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늑대’가 한 마리도 없는가? 그것이 도저히 어렵다면 “임금님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어린아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성철 IGS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조선일보(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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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베토벤’의 사기극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010년대 초반 일본에는 ‘21세기 베토벤’ 열풍이 분 적 있었다. 사무라고치 마모루(佐村河内守)라는 남성이 그 주인공으로, 젊은 시절 청력에 문제가 생겨 나중에는 거의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타고난 절대음감으로 게임, 드라마,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에서 명곡을 작곡했다는 휴먼 스토리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피폭자 2세로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배경도 그에 대한 신비함과 호감을 더했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은 ‘히로시마’로 명명되었고, 클래식으로는 이례적인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화제를 모았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가 실의에 빠져있을 그가 피아노 소나타 진혼곡을 작곡하는 과정이 공영방송 특별 기획으로 편성될 정도로 그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의지의 상징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사무라고치의 명성이 절정을 달리던 2013년 2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그의 곡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 대작(代作)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추궁이 계속되자 그는 결국 의혹이 사실임을 실토하였고, 곧이어 정체를 드러낸 고스트 라이터는 무려 18 동안 곡을 대신 써주었으며 그의 청각 장애도 거짓이었다고 밝혀 충격을 더했다. 사죄 기자회견 후 사무라고치가 종적을 감추자 ‘들을 수 없기에 더욱 음악에 진심을 담을 수 있었다’던 그의 호소에 감동했던 사람들은 파렴치한 사기극에 허탈감과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절박함을 호소하는 빈자(貧者) 코스프레로 동정을 모으며 인기를 누린 국회의원이 회기 중에 수십억 원대의 코인 거래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을 접하는 한국인들의 심정도 사무라고치에게 느낀 일본인들의 당혹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본연(本然)이 아닌 가공의 모습으로 영달을 꾀하는 것이야 어디에나 있는 일이지만, 도덕성을 상실한 공적 인물을 국민이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일은 언제라도 재연될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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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베토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鎭魂曲)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이 곡이 하마터면 다른 사람 작품으로 음악사()에 남을 뻔했다. 1791년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를 찾아와 두툼한 돈 봉투를 내밀며 진혼곡 작곡을 부탁했다. 그때는 귀족이 돈 주고 음악가에게 곡을 의뢰하고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는 일이 꽤 있었다. 그 사람은 발제크라는 백작의 심부름으로 죽은 지 1년 된 백작의 아내를 기리는 곡을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당시 서른여섯 나이에 벌써 병이 깊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짓는 것처럼 '레퀴엠' 작곡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모차르트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다섯 달 만에 숨을 거뒀다. '레퀴엠'은 모차르트 제자가 마무리해 발제크 백작 이름으로 처음 발표됐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모차르트와 발제크가 주고받은 계약서가 나오면서 '레퀴엠'은 원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그래도 해피엔딩이다. 음악사는 절절한 진혼곡을 얻었고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또 한 번 빛났다. 조이스 하토라는 영국 출신 여성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2006년 그가 죽은 뒤 남편이 음반을 냈다. 하토가 마지막 6년 동안 녹음한 것이라는 음반은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음반 엔지니어였던 남편이 다른 사람 연주를 가져다 조작해 만든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대가(大家)는 아니었지만 양심적 음악가로 살아온 하토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다.

▶어제 그제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은 좀 더 고약하다. 올해 쉰하나인 사무라고치 마모루는 일본이 떠받드는 작곡가였다. 그는 원폭(
原爆) 피해자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작곡을 배웠고 서른다섯에 청력(聽力)을 잃었다고 떠벌렸다. 그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곡했다는 '교향곡 1번 히로시마'는 2008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G8 하원의장 회의 기념 콘서트에서 초연된 뒤 CD가 18만장이나 팔렸다. 일본 안팎에서 그를 '현대의 베토벤'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가 작곡가로서 18년 동안 내놓은 곡은 모두 한 음악대 강사에게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또 알려진 것과 달리 귀도 멀쩡하다고 한다. 한 불우한 음악가의 뜨거운 예술혼()에서 위안을 얻으려 했던 대중의 열망은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수많은 미디어가 앞다퉈 감동과 미담(美談)을 전하려는 시대의 약점을 '가짜 베토벤'은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가슴 적시는 미담일수록 한 번쯤 의심하도록 만들어버린 그가 야속하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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