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영·프·독]
[노르만인으로 영국 지배계급 교체]
[바이외 태피스트리]
['950년 역사' 세계기록유산 대여]
얽히고설킨 영·프·독

왼쪽부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EPA 연합뉴스
멀리 떨어진 한국인에게는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이 축구에 열광하고 맥주와 소시지를 즐기는 비슷한 유럽인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세 나라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맞다.
미국 백악관의 위협에 직면한 영·프·독 정상들이 오랫동안 잊혔던 유럽 3국 협력체인 ‘E3’의 부활을 위해 만난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회담 이후 E3 단합이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 증명된 듯하다. 경제적 붕괴와 외부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영·프·독에 야만인들로 가득하던 시절 이미 문명을 갖춘 로마인들은 이들을 차례대로 정복했다. 그러나 로마제국 붕괴 후 3국은 번갈아 서로를 침략했고 이로써 그들은 돌이키기 힘든 갈등과 함께 서로의 운명에 얽히고설킨 관계가 됐다. 먼저 독일의 작센(Saxony) 지역이 영국을 점령했고 이는 잉글랜드의 전신이 되는 색슨(Saxon) 왕국이 된다.
다음은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프랑스가 제국을 꿈꾼다. 독일을 점령하고 승리에 취한 프랑스인들은 1066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색슨 왕국을 정복한다. 그렇게 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조합된 프랑켄슈타인처럼 해괴한 언어가 남았다. 영어는 이렇게 독일어 문법 체계에 프랑스어 어휘를 끼워 맞춘 언어라서 누구에게나 어렵다.
시간이 흘러 정체성을 확립한 잉글랜드가 영토 확장에 뛰어들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수백 년 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일이 세계 정복의 야심을 갖게 되며 영·프와 갈등을 빚었다. 아무리 중대한 지정학적 목표를 위해서라도 이런 갈등의 역사는 잊히지 않는다.
또한 영국인의 소심함, 프랑스인의 거만함, 독일인의 따분함, 우리의 미묘한 차이는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E3 리더들이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려면 진짜 이를 악무는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How the Tangled Web of History Divides – and Unites – the UK, Germany and France”
-팀 알퍼 칼럼니스트, 조선일보(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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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인으로 영국 지배계급 교체
영국사의 새로운 전환

1066년 노르만 정복은 영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국왕 해럴드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이 나라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영국민들이 겪은 일들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가혹한 정복과 약탈의 연속이었다.
노르만인으로 영국 지배계급 교체
강력한 무력으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하더라도 정복왕 윌리엄의 입지는 아직 불안정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이웃 나라에서 쳐들어온 무도한 인간들에게 지배받게 되었다는 데 대해 분개하는 감정이 컸고, 수년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윌리엄을 따라 영국으로 들어온 프랑스계 기사들 수는 만명이 채 안 되었는데, 이 소수 인원으로 200만명 가까운 영국인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윌리엄은 약 20년 동안 무자비한 방식으로 지배 체제를 구축해 갔다. 우선 구 귀족들을 몰락시켰다. 이미 정복 전쟁 와중에 많은 귀족이 사망하여 살아남은 귀족들이 얼마 안 되었지만, 그나마 남은 귀족들도 토지와 직위를 빼앗겨 무력화되었다. 윌리엄은 우선 해럴드 왕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땅을 몰수했다. 반란을 일으킨 지역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주변 지역을 불태워버린 다음 이런 식으로 소유주가 없어진 땅을 자신이 차지하던지 혹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이처럼 원래의 지주층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과정이 지속된 결과 약 150년 후에는 토지 소유주 가운데 윌프리드, 애설스탠 같은 기존 주민 이름은 거의 사라지고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 같은 프랑스식 이름이 80%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노르만인들이 영국의 지배 계급이 된 것이다.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의 관리들이 1086년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최후의 심판일 장부)'에 기록하기 위해 농장 소작인을 조사하고 있는 장면(피터 잭슨 作). 둠즈데이 북은 모든 국민에게 빠짐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재산 현황을 조사한 자료인데, 너무나 철저히 조사를 해서 마치 최후의 심판 때 판결처럼 어떤 속임수나 변경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Look and Learn
새 지배 왕조에 충성을 약속한 영국인들은 이론상으로는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실제로 모든 요직은 노르만인들이 독점했다. 정복 후 수년 동안 반란이 극심했을 때에는 궁정이나 교회 요직에 영국인들을 임명하거나 직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가 지났다고 판단하자 윌리엄은 곧바로 이들을 해임하고 노르만인들로 교체했다. 예컨대 정복 이전부터 캔터베리 주교였던 스티건드(Stigand)의 경우 1070년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고, 그 자리에는 캉(Caen)에서 랑프랑(Lanfranc)을 불러와 임명했다.
세금·벌금으로 소득 올린 새 왕조
지배 체제를 확고히 지키기 위해서 대민 감시용 성을 쌓았다. 일반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릉이나 평지에 인공 축토를 쌓고 그 위에 성을 축조했다. 유럽의 성은 모두 돌로 짓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세 성은 대개 목제였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돌로 개축하는 곳이 많았다. 윌리엄은 이렇게 축조한 성들에 왕실 수비대를 주둔시킨 반면, 다른 영주들에게는 성의 소유를 금지했다.
새 왕조는 각종 봉건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소득을 올렸다. 신하들의 소유지 변경과 상속 때 납부하는 부과금, 영주 딸의 결혼이나 아들의 십자군 참가 시 내야 하는 헌납금 같은 것이 그런 예들이다. 도시 자유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나 각종 벌금도 다양했다. 예컨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시에 결혼할 수 있는 허가를 얻기 위해 15파운드" "아내가 국왕의 포로 상태인 남편과 동침하기 위해 200파운드"를 납부해야 하는 식이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기록 문서인 둠즈데이 북. 11세기 영국의 사회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런던국립문서보관소 소장.
윌리엄의 치세에 모든 국민에게 빠짐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전국의 토지 및 재산 현황을 대단히 꼼꼼하게 조사한 자료가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이다. 윌리엄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귀족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전국을 순찰하며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보고서 이름('최후의 심판일의 장부')은 너무나 철저히 조사를 수행해서 마치 최후의 심판 때의 판결처럼 어떤 속임수나 변경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내용을 보면 과연 전국 각지의 상황을 지극히 엄밀하게 조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리주 림프스필드의 영주 직영 농지는 쟁기 5개, 소 5마리, 농노 15명, 날품팔이 농부 6명, 공유 쟁기 14개, 연 2실링 수입의 물방앗간 1개소, 양어장 하나, 교회당 하나, 목장 4에이커, 돼지 150마리의 숲(당시 숲 크기는 돼지 몇 자리를 칠 수 있느냐로 쟀다), 연 2실링 수입의 채석장 2개소, 매의 집 2개, 노예 10명이 있다. 영지 수입은 에드워드 국왕 당시에는 연 20파운드, 그 후에는 15파운드, 현재는 24파운드이다."
의회제도 기틀이 된 강력한 왕권
심지어 숲 한가운데 사는 사람도 조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 8마리, 자기 소유 쟁기 한 개 그리고 노예 2명의 도움으로 그가 개간한 농지 약 100에이커를 경작하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조세를 바치지 않았다."

런던 타워는 1070년대에 정복자 윌리엄 1세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다음 왕들이 성벽을 둘러쌓고 건물들을 추가한 이곳은 요새, 궁전, 감옥 등 900년 이상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됐다. /위키피디아
이 숲속의 고독한 농부도 다음 해부터는 성실한 납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추산한 결과 1086년 당시 영국 인구는 150만~200만명이며, 그중 노예가 10%일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정도로 자세한 조사 사업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다시 가능해진다.
이처럼 강력한 왕권이 자리 잡게 된 결과 영국 국민은 자유를 빼앗기고 완전한 억압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강력한 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자 이것이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사실 아무리 윌리엄과 신흥 지배층의 무력이 강하다 해도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만으로 전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명의 기사로 어떻게 그 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려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방의 전통적 자유를 인정해 주고 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협조를 이끌어내는 게 낫다. 결국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지난 후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민중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층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국왕이 자의적 통치를 하려 할 때 견제하기도 했다.
[영어가 완성되다]
프랑스어의 한 갈래인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인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자 언어상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고대 영어, 즉 앵글로색슨어는 이 시기에 상류 계급 언어인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세 영어로 변화해 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어 단어들이 영어로 들어왔다.
특히 지배층과 관련된 단어 중에 프랑스어 계통 단어들이 많다. 궁정(cour→court), 왕관(couronne→crown), 회의(conseil→council) 등이 그런 사례다. 육군(armé[e→army), 탑(tour→tower), 성(château→castle), 군기(軍旗, étandard→standard) 같은 군사 용어들, 수도원장(prieur→prior), 예배당(chapelle→chapel), 미사(messe→mass) 같은 종교 용어들도 마찬가지다. 사법(justice), 감옥(prison) 같은 재판 관련 용어들은 아예 철자까지 같은 형태로 영어에 들어왔다.
계급 간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는 동물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예컨대 소는 농민들이 기르는 동물일 때에는 cow이지만 고기를 요리해서 식탁 위로 가져갈 때에는 beef가 된다. 목축이나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은 여전히 앵글로색슨어 cow를 사용하지만 요리로 접하는 지배 계층은 프랑스어 boeuf를 사용하다가 이것이 beef로 바뀐 것이다. 돼지(pig, porc→pork), 양(sheep, mouton→mutton), 송아지(calf, veau→veal)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의 preux라는 단어는 원래 용맹한 기사를 뜻하지만 영어에서는 오만하다는 뜻의 단어 proud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도 그런 미묘한 차이가 반영된 흥미로운 사례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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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외 태피스트리
프랑스가 英에 빌려줄 유물… 노르망디公 '왕위 계승 전쟁' 승리 담아
영국 왕위 노린 노르망디公 윌리엄, 1066년 英 해럴드 왕과 전투서 승리… 직물 벽걸이에 이 전쟁 묘사
노르만 왕조 열리며 유럽 문화 이식

윌리엄 1세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회담에서 프랑스가 보관 중인 11세기 유물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영국에 빌려주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어요. 영국 측은 "프랑스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빌려준 유물 가운데 최고"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고 해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1세기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바이외 지역에서 만든 직물(織物·실로 짠 물건) 벽걸이로, '정복왕 윌리엄'의 업적이 50여 개 장면으로 묘사돼 있는 중요한 문화재예요. 중세 영국의 역사적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오늘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담긴 정복왕 윌리엄의 이야기를 알아볼게요.
◇노르망디의 윌리엄, 영국 왕위를 노리다
7~11세기 중세 영국은 귀족 회의인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에서 왕을 선출하고 있었어요. 왕은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나왔지만 귀족 회의에서 뽑았기 때문에 권한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지요. 당시 영국 왕실을 '앵글로 색슨' 왕조라고 불러요.
1042년 위테나게모트에서 웨섹스 가문의 에드워드(1042~1066)를 새 영국 왕으로 선출했어요.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여동생이었지요. 어릴 적 에드워드는 외가인 노르망디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노르망디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어요.
당시 왕 못지않게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에드워드의 장인인 고드윈 백작이었어요. 고드윈은 자기 자식들 중 하나가 에드워드 다음으로 영국 왕이 되길 바랐지요.
1066년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 없이 죽자, 다음 영국 왕이 누가 되느냐를 두고 여러 사람이 경쟁을 벌였어요. 고드윈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럴드와 토스티그가 먼저 나섰고, 에드워드의 외가 친척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도 영국 왕 자리를 노렸지요. 하지만 위테나게모트는 고드윈의 아들인 해럴드를 새 영국 왕으로 뽑았답니다. 그가 앵글로 색슨 시대 마지막 왕인 '해럴드 2세'(1022~1066)예요.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영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영국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지까지 얻어낸 윌리엄은 해럴드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직접 영국 출정에 나섭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해럴드 왕(왼쪽에서 둘째)의 모습을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 /위키피디아
시작은 순탄치 않았어요. 노르망디의 여러 제후가 굳이 바다 건너 영국까지 가서 전투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에 윌리엄은 전리품과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험가를 공모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플랑드르와 브르타뉴·앙주·메인 등 프랑스 주요 지역에서 전투 자원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약 8000명에 달하는 당시로선 대규모 군대를 결성한 윌리엄은 때를 기다립니다.
당시 영국은 정치·군사적인 위기에 휩싸여 있었는데요. 해럴드는 말만 영국 왕이지 사실상 본래 근거지였던 웨섹스 지역에서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해럴드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해럴드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며칠 후 영국 남쪽 해안가에 윌리엄의 군대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답니다.
◇영국을 유럽으로 만든 전투
동생과의 전투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해럴드 군대는 1066년 10월 14일,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 근처에서 윌리엄의 군대와 맞붙습니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윌리엄 군대는 해럴드 군대를 '거짓 퇴각'과 '기습 공격' 전략으로 크게 무찔렀지요.
전투 초반 윌리엄 기병대(말을 탄 병사들 군대)는 해럴드 보병대(걸어서 싸우는 군대)를 공격하지 않고 마치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처럼 꾸몄어요. 승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해럴드 보병대가 윌리엄 군대를 뒤쫓자 기병대는 갑자기 뒤돌아서 반격을 했고, 이런 기습 공격을 몇 차례 반복하며 해럴드 군대를 와해시켰지요.
전투 마지막, 윌리엄이 궁병대에 하늘 높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자, 해럴드의 군사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맞으며 쓰러졌답니다. 해럴드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요. 이를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라고 해요.
이 전투가 바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자수로 새겨져 있어요. 태피스트리에는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여러 사료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윌리엄 등에게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요. 윌리엄의 이복동생이 제작을 주도한 태피스트리이기에 해럴드가 '신(神)이 쏜 화살', 즉 신이 정해준 운명 때문에 죽은 것으로 꾸며낸 것이지요.
전투 직후 윌리엄은 그해 성탄절에 영국 왕위(윌리엄 1세·1027~1087)에 올랐어요. 이렇게 해서 영국에는 약 600년 앵글로 색슨 왕조가 문을 닫고 유럽 대륙 세력인 '노르만 왕조'(1066~1154)가 들어섰답니다.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했어요. 기존 앵글로 색슨 시대의 법과 제도, 풍습 등을 이어갔고 색슨족이든 노르만족이든 구분하지 않고 기사의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기도 했어요. 물론 대륙식 풍습을 심어놓기도 해서, 주(州) 장관으로 노르만인만 임명했고 프랑스처럼 주 재판권과 교회 재판권을 분리했지요. 또 왕을 뽑는 귀족 회의 대신, 왕을 섬기는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프랑스식 왕실 회의를 도입했어요.
윌리엄의 정책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솔즈베리 서약'과 '둠즈데이 북' 편찬인데요. 윌리엄은 전국의 귀족들을 소집해 국왕에게 충성하는 솔즈베리 서약을 하도록 하고, 왕의 명령을 받은 위원들을 보내 사상 최초의 토지 대장(둠즈데이 북)을 만들도록 했어요. 영국의 모든 토지와 농민들이 어떤 주, 어떤 영주에게 얼마만큼 소속돼 있는지 분명히 해 세금을 정확하게 징수하도록 한 행정 자료였지요. 앵글로 색슨 시대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던 자유민들은 이렇게 점차 중앙집권식 봉건 제도로 포섭돼 갔답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1066년 윌리엄의 승리를 '영국이 진정한 유럽 국가가 된 결정적 계기'라고 평가했어요. 그만큼 1066년은 영국이 유럽 대륙의 문화를 흡수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는 것이지요. 현재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절차를 밟고 있는 영국에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왕들의 별명]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의 별명은 '정복왕'이었어요. 이처럼 중세 유럽의 왕들은 대개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칭송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붙였지요. 에드워드 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을 만큼 신앙심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참회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12세기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전쟁터에서 용맹함을 자주 발휘해 '사자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답니다.
-이정하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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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년 역사' 세계기록유산 대여
마크롱 "'바이외 태피스트리' 빌려주겠다" 한마디에... 영국 들썩
英이 유럽대륙에 정복당한 사건, 70m 길이 천에 '자수'로 담아
여왕 대관식 때 대여 요청에도 절대 내주지 않았던 보물
영국 '마크롱의 선물'에 보답, 북아프리카 테러 집단 소탕 지원
佛칼레 난민촌 분담금 늘릴 듯
18일 영국을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샌드허스트 영국 육사에서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와 가진 회담에서 프랑스가 보관하는 11세기 유물인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영국에 대여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역사학자들과 언론은 크게 반겼다. 브리티시박물관 측은 "프랑스가 지금까지 대여한 것 중 최고이며 극도로 관대한 조치"라고 밝혔다.
영국이 흥분하는 이유는 자수(刺繡) 제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 때문.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바이외성당에 보존된 이 태피스트리는 영국의 중요 역사를 담고 있다. 1066년 앵글로 색슨계 영국 왕이었던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처남 해럴드가 일방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해럴드로부터 '신하의 예(禮)'를 받았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공작('정복왕 윌리엄')은 이에 분노해 잉글랜드로 쳐들어갔다. 결국 그해 10월 14일 잉글랜드 남단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를 죽이고 영국을 정복했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을 보여주는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당시 잉글랜드 왕 해럴드가 프랑스에서 쳐들어온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군사가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죽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 위에 라틴어로 ‘여기서 해럴드 왕이 살해됐다’고 쓰여 있다. 자수(刺繡)로 꾸민 그림 이야기 형태인 이 태피스트리는 전체 길이 70m, 폭 50㎝에 당시 중세의 전투 방식과 무기, 복장 등을 상세히 담았다. /위키미디어커먼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기까지의 사건을 50개 장면으로 나눠 무려 70m의 길이에 '그림 이야기'로 엮은 것이다. 학자들은 윌리엄의 이복동생이 1070년쯤 제작을 주도해 '뛰어난 자수 솜씨를 지닌 전문가들이 한 장소에서 함께 제작을 한 것'으로 봤다.
이 태피스트리에는 잉글랜드 왕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러 사료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정복왕 윌리엄'을 포함한 4명의 노르만족에게 목과 다리가 잘려 죽었다. 이를 '신(神)이 쏜 화살'로 꾸민 것이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바이외성당에 걸린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 이 유물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
1066년을 계기로 앵글로 색슨계의 600년 영국 지배가 끝나고 대륙에서 온 '노르만 왕조(1066~1154)'가 들어섰다. 가디언은 "이때 영국은 유럽 대륙의 여러 민족과 섞이면서 '진정한 유럽 국가'가 됐다"고 밝혔다. 따라서 지금의 영국은 결코 앵글로 색슨계만의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프랑스 노르망디의 2차 대전 영국군 묘지에는 '우리는 한때 윌리엄에게 정복당했지만 이제 정복자의 고향을 해방했다'고 쓰여 있다. 그만큼 1066년은 영국 역사에서 중요하다.
또 노르만 왕조 때 약 1만개의 단어가 영어에 추가됐다. 의회(parliament)·군주(sovereign)·하인(servant)·판사(judge)·적(enemy) 등이다. 더 타임스는 "영국 인구의 20%를 차지했던 '노예'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항복한 상대는 죽이지 않는 중세 '기사도 정신(chivalry)'이 피어난 것도 노르만 왕조"라고 전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있었던 1953년과 '헤이스팅스 전투' 900주년이었던 1966년에도 바이외 태피스트리 대여를 요청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거절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프랑스 내에서도 1804년 영국 침공을 꿈꾸던 나폴레옹이 파리로 옮기고, 1945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잠시 전시한 것 외에는 성당을 떠난 적이 없다.
메이 영국 총리는 "최대한의 사람이 볼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벌써 70m의 전시실이 있는 브리티시박물관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성당·캔터베리성당, 1066년 전투 현장인 '배틀사원'도 이 태피스트리 전시에 눈독을 들인다. 그러나 이 유물이 안전하게 옮겨질 수 있기까지 여러 테스트가 필요해 바이외성당이 수리를 위해 문을 닫는 2022년쯤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더 타임스는 내다봤다.
'950년 만의 첫 나라 밖 행차'에는 당연히 '가격표'가 붙는다. 마크롱 대통령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테러 집단 소탕을 위해 영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주문했다. 또 영국 입국만 기다리며 프랑스 칼레에 머무는 아프리카·중동계 난민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신속한 난민 절차를 요청했다.
영국 언론은 메이 총리가 프랑스군의 북아프리카 작전에 군(軍) 헬기 지원을 약속하고, 칼레 지역의 보안장벽 설치 등을 위해 4450만파운드(약 660억원)를 추가로 제공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보답 차원에서 1801년 이집트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하면서 획득한 '로제타 스톤'을 프랑스에 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철민 선임기자, 조선일보(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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