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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권 전환, 안보의 시계와 정치의 시계는 다르다] ....

뚝섬 2026. 7. 15. 10:14

[전작권 전환, 안보의 시계와 정치의 시계는 다르다]

[100년마다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작권 전환, 안보의 시계와 정치의 시계는 다르다

 

[朝鮮칼럼]

한국군 전작권 논의는 주권 회복 문제가 아니라 전쟁 시 효율·역량이 핵심
美가 연합사 해체한다면 북한과 중국이 반길 것.. 서두를수록 국민 불안하다
 

 

안규백(왼쪽) 국방부 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11월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제57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양국 장관은 회의에서 전작권 전환 등을 논의했다. /뉴스1

 

한국군의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논의가 한미 안보협력의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작권 전환이 주권 회복의 상징이라는 주장과 안보 현실을 외면한 이상론이라는 반론이 팽팽히 맞선다. 한국군의 평시 작전통제권은 김영삼 정부 때 이미 한국으로 넘어왔고, 다만 전쟁 상황에서 한·미가 자국 참전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각각 행사할지 아니면 미국이 통합지휘권을 행사할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는 주권의 문제라기보다 전쟁 상황 도래 시 한·미 통합지휘체계의 운용 여부에 관한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전시 대비 연합방어체제가 미리 구축되어 있지 않다면 논의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다.

 

다국적군에 대한 통합지휘체계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역사적 선례는 수없이 많고, 이는 전쟁 승리의 핵심 요건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북미 연합군은 프랑스 포슈 원수에게 연합군 전체의 통합지휘권을 일임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유럽 전선의 연합군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이,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은 맥아더 총사령관이 통합 지휘권을 행사했다. 40국 이상이 참전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도 나토군 사령관과 미군 사령관이 각각 통합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 같은 통합 지휘권 부여는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 지휘 체계의 효율성에 관한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그 같은 필요성이 한반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오늘날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의 위협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 동맹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해공군도 한반도 바다를 위협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한국군뿐 아니라 미군의 정보·감시·정찰 자산, 전략 폭격기, 항모 전단, 미사일 방어망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해야 한다. 그 경우 양국 군이 별도의 지휘 체계 아래 각기 작전을 수행한다면, 군사적 비효율을 넘어 치명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전쟁의 역사는 말해준다.

 

한국 정부는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 개입을 보장받기 위해, 현행 한미연합사 체제 유지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 향후 한반도 전쟁에서 참전 미군이 한국군 장성의 지휘를 받을 개연성이 크므로, 미국이 그런 지휘 체계를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국 의회는 1993년 소말리아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 발생을 계기로, 해외 주둔 미군이 타국 군대의 지휘를 받는 일이 없도록 규정한 바 있다. 만일 이런 문제점을 무시하고 전작권 전환이 강행된다면, 미국은 한미연합사 해체를 심각하게 검토할지도 모른다. 이는 한반도 장악을 꿈꾸는 북한과 중국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전작권 문제에 관한 중요하고도 불편한 진실은 안보의 시계와 정치의 시계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일부 한국 정부가 전작권 전환을 임기 내에 정치적 성과로 남기려 시도했으나, 안보의 시계는 정치의 시계와 달리 움직였다. 한국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정권 임기에 맞추어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작권 전환의 성급한 추진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기존의 한미 연합방어체제를 와해시킬 가능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작권 전환을 강행하려면, 유사시 미국의 대규모 군사 개입 없이 독자 방어를 완수할 각오와 준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전작권 전환은 국민적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사안이다.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 발생 시 정부가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다. 충분한 군사적 검증 없이 이념적 명분을 앞세운 전작권 전환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안보 정책이 냉철한 전략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구호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퍼지는 순간, 그 불신은 국가의 안정과 대외 신용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작권 전환은 정부와 군이 상당한 수준의 자주국방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국민이 안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선택지다. 특히 유사시 방어 전쟁을 자력으로 기획하고 지휘하는 능력은 피상적인 ‘세계 5위 군사력’보다 훨씬 중요한 요건이다. 능력보다 명분이 앞서고 군사적 고려보다 정치가 앞선다면 전작권 전환은 안보에 큰 균열을 낼 수 있다. 국가 안보는 명분과 자긍심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안보의 시계와 정치의 시계가 어긋날 때 초래될 부작용은 모두 국민의 불안과 불신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용준 한미우호협회 회장·前 외교부 북핵대사, 조선일보(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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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마다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1차대전 시작할 때만 해도 1000만명 죽게 될 줄 몰라
전쟁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상대에 굴복해 얻은 평화는 오래 못 가고 開戰 못 피해…

도발 막으려면 힘 키워야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프랑스·영국·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 등 동맹국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돌격과 퇴각을 반복하는 참호전이 이어졌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10㎞ 떨어져 있는 슈맹데담(Chemin des Dames)이라 불리는 산등성이는 양측이 가장 치열하게 맞선 곳 중 하나다. 그해 새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 니벨 장군은 48시간 내에 승리를 거두겠다며 슈맹데담을 향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기관총 사격을 하는 산봉우리를 향해 기어올라가는 공격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무모한 작전이었다.

전장의 실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작전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치른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돌격 지시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17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113건의 반란이 일어났고, 연루된 군인은 최소 4만명에서 최대 8만명이었다. 그해 탈영한 병사만 2만7000명에 달했다. 결국 공격이 유예되었고 대규모 체포와 군사재판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누구를 체포해 처형할 것인가? 할 수 없이 중대장이 자기 중대에서 세 명씩 골라내서 '본보기 처형' 하는 식의 일이 자행됐다. 돌격 명령을 거부하다 총살당한 병사들은 겁쟁이 배신자인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희생자·영웅인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8년에 슈맹데담 지역에 세운 기념비는 아마도 이런 결정에 비판적인 누군가가 탈취한 듯하다. 전투 100주년을 맞은 올해 프랑스 정부는 기념비를 다시 건립하기로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린 명작 만화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작가 타르디는 참전 용사였던 자기 할아버지의 기억을 이렇게 전한다. 야간 공격에 나선 병사들이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에 포격까지 당했다. 이때는 철모를 양손으로 꽉 잡고 땅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는 수밖에 없다. 총알과 시뻘건 쇳조각이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몸 옆을 스쳐간다. 그런 상태로 밤을 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적의 공격이 멈추었다. 그때야 병사는 자신이 시체 위에 엎드린 채 밤을 보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양손을 시체 배 속에 넣은 채였다. 진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썩은 시체의 살이었던 것이다. 그 후 독가스에 약간 중독되어 집에 돌아온 그의 할아버지는 낮에는 식탁에 앉아 졸고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암흑의 공포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죽을 때 종부성사를 하러 온 신부를 거부했다. '정말로 하느님이 있다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겠는가'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1000만명의 사망자, 2000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지옥이 펼쳐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서구 사회, 서구 문명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요와 평화를 누리던 벨에포크(Belle Epoch·좋았던 시대)의 분위기가 산산이 깨지고, 서구 문명의 우위를 가져온 원천이었던 과학기술은 오히려 파괴와 죽음의 도구로 변모했다. 종교 교리마저 바뀌었다. 예컨대 경미한 죄를 지은 영혼이 일정 기간 극심한 고난의 속죄 과정을 거친 후에 천국으로 간다는 가톨릭의 연옥(煉獄) 교리가 점차 잊혀 갔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은 젊은 영혼이 저승에서 다시 불로 지지는 고통을 당한다고는 차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100년에 한 번씩 초대형 전쟁이 일어난다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만일 그 이론이 맞는다면 지금쯤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이고, 전쟁 지역 1순위 후보는 한반도가 될 터이며, 그 전쟁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핵전쟁이 될 것이란 우려가 있다. 과연 '100년 주기설'이 맞아떨어질 것인가. 근거가 빈약한 그런 주장을 믿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테지만, 문제는 어떻게 막느냐는 것이다. 핵·미사일 도발을 하며 전쟁 위협을 일삼는 북한의 진절머리나는 작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뮌헨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대영제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수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한 서류를 흔들면서 '명예로운 평화'를 쟁취했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처칠은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전쟁과 불명예 사이에서 한 가지를 골라야 했다. 우리는 불명예를 선택했고, 곧 전쟁도 치르게 되었다." 평화를 구걸한다고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1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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