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중국은 왜 한국을 능멸하는가] .... [만절필동(萬折必東)] ....

뚝섬 2023. 4. 26. 10:09

[중국은 왜 한국을 능멸하는가]

[중국, ‘할 일 하고 할 말 하는 베트남’ 함부로 못 대한다]

[萬折必東(만절필동)]

[명(明)나라]

 

 

 

중국은 왜 한국을 능멸하는가

 

소국이 감히 대국에…” 안하무인 中에 항의
현대판 사대주의 척결 없인 하대와 수모 계속될
 

 

중국 외교부엔 대변인이 셋이다. 선임자는 국장인 화춘잉(華春瑩·53)이고 밑에 부국장이 둘 있다. 그중 하나가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을 겨냥해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겠다”(不容置喙·불용치훼)고 한 왕원빈(汪文斌·52)이다. 부국장이면 한국에서 3급 또는 2급 공무원이다. 외교 관례상 외국 정상을 꾸짖을 군번은 아니다.

 

불용치훼는 청나라 작가 포송령(蒲松齡·1640~1715)이 쓴 기담집 ‘요재지이’(聊齋志異) 중 ‘삼생’(三生)이란 단편에서 유래한 성어(成語)다.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고 즉시 참수했다”(不容置喙, 立斬之)는 문장에서 따왔다. 훼(喙)는 짐승의 주둥이다. ‘말참견 말라’는 단순 경고가 아니라, ‘목이 잘리기 싫으면 주둥이 닥치라’는 협박에 가깝다. 우회적이고 유화적인 수사로 점잔을 빼는 외교에서 없는 거친 표현이다.

 

두 달 전 박진 외교부 장관이 CNN 인터뷰에서 대만 관련 발언을 했을 때도 중국 외교부 마오닝(毛寧·51) 대변인은 불용치훼를 언급했다. 인민해방군 강경파가 쓸 법한 비(非)외교적 언사가 외교부 브리핑에서 올해에만 두 번 나왔다. 모두 한국을 향해서였다. 서방 국가 대부분이 대만 문제를 거론한다. 한국보다 자주 한다. 그때마다 중국은 발끈하지만, 불용치훼라고 하진 않는다. 한국이 만만한 것이다.

 

편파 판정 논란으로 시끄럽던 베이징동계올림픽 당시 주한 중국 대사관은 “일부 한국 언론과 정치인이 반중 정서를 선동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주요국 언론 대부분이 편파 판정 논란을 다뤘는데 한국에만 눈을 부라렸다. 싱하이밍 대사는 대선 주자 시절 윤 대통령의 사드 관련 발언을 트집 잡아 국내 언론에 반박문을 냈다. 외국 대사가 외교 채널을 제쳐놓고 주재국 선거에 개입한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중국의 안하무인은소국은 대국을 따라야 한다 시대착오적 중화주의에 기인한다. 한국을 동등한 주권국으로 보지 않으니 외교가 아니라 훈계를 하고 내정에 간섭한다. 중국이 사드 보복 조치를 퍼붓고 관제 혐한 시위가 봇물을 이룰 때 이걸 두둔·조장하던 중국 관영 매체들의 논리가 ‘소국이 대국의 이익을 침해한다’였다.

 

한국 지도층은 중국의 하대와 갑질에 순응해 왔다. 소국을 자처하며 중국에 아첨했다. 전 서울시장은 한국을 파리, 중국을 말에 빗대 “파리가 말 궁둥이에 딱 붙으면 만리를 간다”고 했다. 지난 정부 주중 대사는 시진핑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며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 적었다. 조선 사대주의자들이 명 황제를 향한 충절을 맹세하며 쓰던 말이다.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하는 대통령까지 나왔다.

 

중국을 겁내는 공중증(恐中症)은 한국 외교의 고질병이다. 이것이 지난 정부를 거치며 악성이 됐다. ‘사드 3불’에 반대한 관료는 좌천되고 중국 심기를 중시하는 무리가 출세했다. 친중 엘리트 집단은 지금도 건재하다. 몇 달 전 유엔에서 자유민주 진영 50국이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을 규탄할 때 한국 혼자 발을 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건 우연이 아니다.

 

왕원빈의 막말이 나온 날 한국 외교부는 “국격을 의심케 하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라며 모처럼 항의했다. 당시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국가안보실에서 완전히 갈아엎은 입장”이라고 했다. 원래 외교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한다’ 유의 완곡한 내용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날 외교부는 싱하이밍 대사 초치 사실도 한참 뒤 공개했다. 일본 외교관 초치 때마다 언론에 미리 알려 플래시 세례를 받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대접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안다. 현대판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불용치훼보다 더한 수모를 당한대도 이상할 없다.

 

-이용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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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할 일 하고 할 말 하는 베트남’ 함부로 못 대한다

 

[강천석 칼럼] 

자신이 못 가진 카드 꿈꾸다 나라 그르치는 ‘夢想 외교’
북한·중국 앞에 서면 입 닫고 작아지는 한국 評判 걱정해야
 

 

코로나는 세계를 세 계급으로 나눴다. 최상위 계급은 백신을 여유 있게 확보해 집단면역의 길로 나가고 있다. 다음은 백신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동맹과 우방의 도움으로 희망이 비치기 시작한 나라들이다. 최하위 국가들은 백신 제조 회사 앞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 한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들과 이 마지막 줄에 서 있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지도부의 판단력 문제다. ‘강대국이 국제 공조를 외면하고 국경 봉쇄·백신 수출 통제·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만 꾀하고 있다’고 미국을 향해 핏대를 세워봐야 나라 꼴만 처량해진다. 이 판에 중국 치켜올리기를 끼워 넣은 것은 더 악수(惡手)다.

 

국가 지도자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의 우선순위를 뒤집으면 나라의 기본 틀이 흔들린다. 삼권분립을 훼손하고 국회를 다수당 독재의 입법 기계로 타락시키고 선거의 감시자인 중앙선관위를 불공정한 심판으로 만들어버렸다. ‘하고 싶은 것’ 앞에선 자제력(自制力)을 상실하는 정권이다. 검찰·공수처·국가수사본부는 권력의 사병(私兵)이 되고 ‘하나회 출신’이 장악한 법원은 정권의 방탄(防彈)조끼가 돼 버렸다. 비정상화된 국가 기간 조직을 정상화하려면 훗날 비정상적 조치가 불가피해진다. ‘비정상의 악순환’이다.

 

국가 지도자의 핵심 요건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선견력(先見力)을 꼽는다. 그러나 그건 1920년대 독일의 정치 혼란과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를 보고 히틀러의 등장을 예측했던 처칠처럼 출중(出衆)한 리더에게나 바랄 수 있는 자질이다. 보통 지도자는 지나간 과거와 눈앞의 현재만 정확히 읽어도 합격이다. 그러려면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덜 중요한 일을 뒤로 돌리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얻어 쓴 빚과 오늘 잔칫상을 받으려고 끌어다 쓴 빚의 결과가 같을 순 없다. 코로나가 녹을 무렵엔 빚을 얻어 미래를 대비했던 경제와 빚으로 잔치를 벌였던 경제가 확연히 갈릴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해선 안 될 것’을 가려야 나라 진로가 안전해진다. 현실을 현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국제 관계에서 현실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능숙하게 운용함으로써 국가 목표를 달성하는 지혜다. 그런 뜻에서 현실주의 외교의 반대말은 이상주의 외교가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카드를 꿈꾸다가 나라를 그르치는 ‘몽상(夢想) 외교’ ‘집착(執着) 외교’. 바이든 대통령에게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라고 주문(注文)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오른쪽)이 4월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웨이펑 허 중국 국방장관과 만나고 있다/연합뉴스

 

상대의 가면(假面)에 홀리면 나라가 위험해진다. 김일성은 공식적 또는 비밀리에 40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 두 번의 방문이 특별했다. 한 번은 6·25 남침을 코앞에 둔 1950년 5월 방문이다. 남침을 협의했다. 사이공 함락 후 1975년 4월 방문도 수상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저우언라이(周恩來)·덩샤오핑(鄧小平)과 차례로 만나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면 “잃어버릴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는 것은 통일”이라며 사실상 무력 통일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6·25로 동포 수백만 명을 살상(殺傷)하고도 김일성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이 미·중 관계 개선에 골몰했던 때라 대답을 받아내지 못했다. 손자는 얼마나 다르겠는가.

 

국제 관계에선 평판(評判)이 때론 국가의 실제 모습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세계의 화약고(火藥庫) 가운데 하나가 남중국해(South China Sea) 섬 영유권과 항해 자유 보장 문제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한 아세안 6국이 부딪치고 있다. 베트남은 지도에 남중국해가 아니라 자기 나라 기준으로 동해(East Sea)로 표기(表記)한다. 베트남은 아세안 국가 중 유일하게 중국의 윽박지르기 영토 주장을 또박또박 거르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해왔다. 중국이 거대(巨大) 군함을 출동시키면 베트남은 작은 군함으로라도 맞섰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을 거명(擧名·naming) 하거나 공개적 망신(shaming)은 주진 않는다는 스스로 정한 선(線)을 지켰다. 이런 베트남을 중국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한 국가가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리한 요구에 맞서기를 두려워하면 그게 굴레가 돼 종당엔 발가벗김을 당하고 만다. 유화주의(宥和主義) 외교의 말로(末路)다. 베트남은 지혜와 담력으로 중국을 상대했고 한국은 그 반대로 북한과 중국을 대해왔다. 국제사회에서 어느 쪽 평판이 높겠는가.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다.

 

-강천석 논설고문, 조선일보(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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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折必東

 

조선 중엽 정치계를 휘어잡은 송시열은 친명(親明) 중화주의자였다. 일상생활에서도 명나라 복식을 하고 명나라 예법을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자 중원(中原)의 문화 정통성을 이은 어버이 같은 나라라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속리산 계곡은 모화(慕華)사상의 요람이자 발신지 같은 곳이었다.

▶1689년 송시열이 죽자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화양서원'이라고 이름했다. '화양(華陽)'은 중국 문화가 햇빛처럼 빛난다는 뜻도 된다. 제자들은 또 명나라 황제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을 짓고 '만동묘(萬東廟)'라고 했다.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순자(荀子)가 쓴 말이다. 중원의 젖줄인 황하(黃河)는 수만 번 물길을 꺾어 흐르지만 결국은 동쪽을 향한다중국에선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는 이 말이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겐 중국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게 됐다. 경기도 가평에는 조선 선조 임금의 글씨로 '만절필동'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노영민 주중 대사가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萬折必東 共創未來(만절필동 공창미래)"라고 쓴 것으로 밝혀졌다. 노 대사는 한·중이 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좋은 관계를 회복할 것이란 뜻으로 썼을 것으로 믿는다. 실제로 이 말은 사필귀정(事必歸正)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쓰인 배경과 맥락을 알면 쉽게 나와선 안 될 말이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일각에선 "의미를 알고 썼다면 국가 독립을 훼손한 것이고 모르고 썼다면 나라 망신"이라는 말도 나온다.

▶노 대사는 부임 전에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피해가 중국의 사드 보복 때문만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국이 우리와 이웃한 세계 2위 경제 대국이고 북핵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치면 미국·일본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이 땅의 진보·좌파는 무슨 까닭에 중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중 기간 중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에 비유해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을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외교에는 겸사(謙辭)도 필요하다지만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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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홍무제-주원장(洪武帝-朱元璋)

 

대명(大明), 또는 명나라(明朝)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로, 중국 역사상 최후의 한족 통일왕조이다.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홍무제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거대한 운하와 수로가 건설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군사력도 증대되어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만력제와 천계제와 같은 암군들이 나오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으로 결국 1662년 경에 청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홍무제는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농촌 지역들을 발달시켜 엄격한 사회 제도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명나라는 백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소유하고 난징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항을 짓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홍무제는 원나라를 교훈삼아 환관들, 그리고 재력가들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고, 장자 계승 원칙을 확립함과 동시에 후대의 황제들을 위하여 황명조훈을 집필하여 절대적인 황권을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허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가 정난의 변으로 인하여 쫒겨나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며 점차 이같은 장자 계승 원칙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고, 자금성을 지었으며 대운하를 정비하였고 과거제를 재시행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주로 등용하여 신권을 잡고 있던 유교 사대부들을 견제하려 들었고, 결과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환관들 중에서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명한 환관 정화도 있었다. 정화는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며 명나라의 권위를 해외에 과시한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족에게 잡히면서 명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해군력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대신 노동력을 징발하여 유조변과 만리장성 등을 개축하였고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명나라는 세제를 개혁하고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취했으나 세금을 회피하려는 사람들과 고착화된 관료제 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명나라 후기에는 인구가 거의 1억 6천만 명에서 2억 명에 달하였으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면세 혜택이 있는 환관들이나 사찰들로 대거 자발적으로 들어가면서 정작 중앙 정부의 세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이 때에 명나라 조정은 왜구들과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 지방에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해외 무역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16세기에는 점차 유럽의 팽창적인 해외 무역 정책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마카오와 같은 항구들에서만 이들과의 교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하였는데, 이 항구들을 통하여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수많은 작물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 때 고추가 들어와 쓰촨 요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생산성이 매우 높은 고구마와 감자 등이 새롭게 경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근과 가뭄의 영향이 크게 줄어들었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중국제 상품들을 사가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 일본 등에서 들여온 은을 명나라에게 대금으로 지불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은은 명나라의 경제를 대대적으로 촉진하였으며 나중에는 세금을 은으로 걷을 정도로 사회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다만 초기에 유교 정통론자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회에서 농업을 밀어내고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왕양명 등의 개혁가들이 더 관용적인 양명학 등을 개창하며 점차 반발이 줄어들었다. 이후 소빙하기로 인하여 농업 생산이 줄어들고 유럽 세력들이 중국에 지나친 양의 은이 유입되는 것을 막는 정책을 펴며 명나라의 경제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으나, 재상 장거정이 일부 성공적인 개혁 조치를 펼치며 진정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는 전염병,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에 시달리며 사회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농민 출신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순 왕조를 세웠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야 만다. 이후 이자성의 반란군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무너졌고, 청나라가 새로운 중화 대륙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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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원나라 말기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점차 그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나라는 법에 한족 차별을 공공연하게 명시하고 있었고, 몽골족이 아닌 민족들은 혹독하게 차별하였기에, 원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동안 쌓여왔던 한족들의 불만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나라 조정의 경제적인 실정이 겹치며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황허가 범람하며 수많은 토지들이 버려지며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자 1351년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은 불교 비밀결사단체인 백련교가 주도하였다. 이때 무일푼인 농부이자 승려였던 주원장이 1352년에 홍건족 군대에 합류하였고, 그는 반란군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며 명성을 쌓아나가기 시작하였다. 1356년에는 주원장이 이끄는 반군이 난징을 점령했다. 후에 주원장은 이 곳에 명 황조를 건국하게 된다.

 

원나라가 흔들리자, 나라 곳곳에서는 수많은 반란군들이 일어났으며 자기들끼리도 새 왕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1363년,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에서 그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을 꺾은 후 한족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얻어냈다. 파양호 대전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으로 여겨진다. 주원장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65만 명에 달하는 진우량의 군세를 꺾는 데 성공했고, 이 역사적인 승리는 결국 주원장을 압도적인 지도자로 만들었다.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반군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이후에도 영향력을 끊임없이 굳혀나갔다. 1367년에는 홍건적의 지도자들이 주원장이 초대한 연회에서 알수 없는 이유로 죽었고, 이들마저 없어지자 더이상 중국에는 주원장의 새 왕조 건국에 반대할 세력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세를 다잡은 주원장은 1368년에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에 군사를 보냈고, 이미 망해가던 원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수도를 버리고 상도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주원장은 대도에 있는 원나라 궁전을 불태워버린 후, 새 왕조인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 직후 대도는 '베이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원장은 '홍무'를 자신의 연호로 삼았다.

 

홍무제의 통치

 

홍무제-건문제-영락제

 

홍무제는 원나라의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 즉위하자 마자 국가 기반시설을 다지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48km에 달하는 벽을 난징에 쌓았고, 그와 함께 새 관청들과 황궁도 지었다. 명사에는 1364년부터 이미 주원장이 유교에 기반한 새로운 법전인 대명률을 만들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대명률은 1397년에 편찬이 끝났으며, 653년에 만들어진 당나라 시절의 법전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홍무제는 위소제라는 이름의 군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위소제는 당나라의 부병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또한 이갑제를 실시하여 지방과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80년,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의 공신이자 당시 재상이었던 호유용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처형해버렸다. 이후 그는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대폭 축소, 폐지하였고 6부의 직속 상관을 황제로 지정하여 이 권한들을 대거 황제의 것으로 가져왔다. 홍무제는 점점 더 공신들과 대신들에게 의심을 키워갔고, 결국에는 비밀경찰 조직인 금의위를 창설하여 신하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의심가는 자는 누구든지 숙청했다. 대략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홍무제는 재위 내내 원나라의 풍습을 금지하는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이민 왕조의 통치로 '더렵혀진' 한족들의 문화를 정화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다만 원나라의 정책들 중 쓸모 있다고 여겨진 것은 그대로 시행했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고려에게 끊임없이 환관과 궁녀를 그대로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다. 또한 몽골식의 군사 훈련법, 몽골의 영향을 받은 의복과 모자들, 몽골식 궁술과 승마술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명나라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몽골 출신 신료들도 그대로 임용하여서, 16세기 말에는 몽골인들이 금의위에도 진출했을 정도였다. 홍무제는 몽골, 일본, 고려, 여진, 티베트의 왕들에게 일종의 '조언' 내지 명령을 여러차례 써 보내어 그들이 명나라의 수도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10만 명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쫒아내지 않고 중국 내부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발전과 번영

 

영락제의 통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의문태자 주표의 아들인 황태손 건문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허나 건문제와 홍무제의 가장 강력한 아들이었던 연왕 주체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결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주체가 반란(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주체는 노회한 대신들에게서 어린 건문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변을 일으켰으나, 실제로는 난징에 있는 황궁과 함께 건문제, 그의 아내와 어머니, 신하들까지도 모두 죽여 태워버렸다.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이다. 영락제는 매우 유능한 황제였고, 학자들은 보통 그가 '두 번째 건국'을 이루었다고 평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만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책 대다수를 뒤집으며 명나라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천도와 정벌 사업

 

영락제는 즉위한 직후, 원래 수도였던 난징을 버리고 1403년에 자신의 힘이 강했던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1407년에서 1420년까지 지속되었다. 수 백만 명의 일꾼들이 동원되었다. 이 때 베이징 내성이 건설되었고, 특히 이 때 자금성이 건설되는 등 많은 토목사업들이 진행되었다. 1553년에는 외성이 베이징 남쪽에 추가적으로 건설되었고, 베이징 성내의 넓이를 거의 2배 넘게 넓혔다.

 

1405년부터 영락제는 그가 총애하던 환관 정화에게 거대한 해상 함대를 맡겨 해외 원정을 떠나게 했고, 이를 정화의 원정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한나라 이래로 끊임없이 해외로 사절들을 보내고 국제 무역을 하기는 하였으나, 정화의 원정은 규모와 동원된 선박 수 면에서 이같은 선례들을 훨씬 초월했다. 총 7번의 원정이 있었으며, 난징 조선소는 1403년부터 1419년까지 2천 척에 달하는 배들을 건조했다. 어떤 배들은 길이가 112m에서 134m까지 이르렀으며, 너비는 45m에서 54m였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앞선 인쇄술 기술을 이용하여 중화 문명을 퍼뜨리기 위해 전세계에 책을 전파했다. 이뿐만 아니라 몽골, 베트남 등의 지역들에 군사 원정도 수없이 실시하여 명나라의 국경도 크게 넓혔다. 이때 베트남이 한시나마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1406년에 시작된 이 식민 통치기는 1427년에 베트남의 국민 영웅 레 러이가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를 쫒아내고 레 왕조를 세우며 끝나게 된다.

 

토목의 변

 

한편 몽골 고원에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가 힘을 얻어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에 침공을 가했다. 그러자 1449년, 영종은 측근인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 황제는 그의 이복형제인 주기옥을 수도에서 내정을 섭정으로 관리하도록 맡겼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 국경으로 향했다. 허나 9월 8일, 에센 오이라트 군대는 정통제의 군대를 박살냈고 정통제는 산채로 포로로 잡히는 대치욕을 당했다. 이를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허나 정통제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수도의 섭정 주기옥이 새로운 황제인 경태제로 즉위하였고, 경태제의 유능한 대신인 우겸이 오이라트 족에게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여 이들을 쫒아내는 데에 성공하자 오이라트 군대는 더이상 정통제를 인질로 잡고 있어보았자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통제를 죽이는 대신 명나라로 살려 보냈고, 정통제는 수도에 도착하자 마자 선황이라는 허울좋은 칭호를 가지고 가택연금되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정통제가 1457년에 경태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게 된다. 이때부터 정통제는 새로운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부터는 천순제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즉 정통제와 천순제는 동일 인물인 것이다. 천순제는 돌아온 이후에도 몽골과의 전투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며 명나라의 국력을 조금씩 깎아먹었다. 1461년 8월 7일, 장군 조흠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황제의 숙청 작업에 말려들까봐 염려하여 미리 천순제를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 조흠 장군의 군대는 황성의 서쪽과 동쪽 문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가 내리며 불이 꺼졌고, 수도 외곽에서 황제의 친위군이 몰려오면서 결국 자결하며 난에 실패했다. 이를 조흠의 변이라고 한다.

 

한편 영락제가 이전에 5번이나 대대적인 군사적 원정을 실시하여 몽골족들을 만리장성 너머로 쫒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라트 족과 몽골인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끊임없이 명나라의 부를 노려 국경 내부로 침입하였다.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이후 암군들이 연이어 등장한 명나라는 딱히 이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으며, 할 의도도, 힘도 없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은 늘어만 갔다. 게다가 만리장성은 이때 딱히 방어적인 용도로는 쓰이지 못했고, 기껏해야 야만족들의 침입을 수도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용도로 가장 많이 쓰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왜구가 중국인 밀교역상인과 연대하여 활동을 시작해 해안 지역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왜구는 한 번에 200여 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오는 등 이미 단순한 해적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으며, 그 무장도 상당하여 중국 해안 지방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몽골에서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이라고 칭한 다얀 칸이 즉위하여 오이라트에 대항해 몽골의 재통일을 이룩하며 명나라 북부의 안정을 위협했다.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몽골을 가리켜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불렀다.

 

명의 쇠락기 

만력제-태창제-천계제-숭정제 

 

만력제의 통치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이때문에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게다가 이때 명나라의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는데, 만력제의 무능과 정치 방기가 계속되며 명나라는 갈수록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만력제는 초기에는 유능한 조언자들과 실무진들을 거느리며 열정적으로 국사에 임하려 하였다. 그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국정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자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관료들은 서로 뭉쳐 소모적인 논쟁이나 일삼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거정이 죽은 이후 만력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관료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에 지쳐 아예 국정을 방치하는 수준으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금성의 벽 뒤에 갇혀 살았으며, 거의 신하들을 만나지 않으며 태업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리들은 정국 주도권을 잃어갔고, 그나마 황제의 얼굴이나마 볼 수 있었던 환관들이 점차 정국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국사를 논하고 싶어하는 모든 고관들은 환관을 통하여 황제의 뜻을 전해들어야 했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명나라는 점차 파탄으로 치달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유교 학자 집단인 동림당의 당쟁, 국본쟁과 만력태정 등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만력삼대정과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등의 대대적인 문제가 터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력제 시기에 명나라가 완전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간주된다.

 

태창제, 천계제의 통치

 

1620년 만력제 사후 그의 장자 주상락(朱常洛)이 등극하여 광종 태창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천계제는 즉위 초기 유교 학자 출신의 동림당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 역시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 기회를 틈타 총애받는 환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동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충현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이들은 정적으로부터 엄당(閹黨)이라고 불렸다. 1624년 엄당이 내각을 차지하였고, 위충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1625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수많은 동림당 인사가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민변이 발생하였으며, 후금과 몽골이 변경을 위협하였다. 위충현은 황제의 무덤을 지을 돈을 빼돌려 그를 기리기 위한 사원을 짓는 등의 패악을 부렸으며, 그의 가족들은 온갖 관직들을 독점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결국 1627 천계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동생 주유검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마지막 황제 숭정제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숭정제의 통치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 숭정제는 곧바로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숭정제가 의도한 개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1629,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의 지도자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되자,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나마 명나라에 남아있던 마지막 명장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는 결국 명나라의 몇 남지 않는 군력마저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홍타이지는 그 이후에도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였으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다. 때문에 당시 직예 지역은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청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하였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에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산해관을 지키던 장수가 바로 오삼계였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1644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이를 공식적으로 명나라의 멸망으로 본다. 한편 산해관의 오삼계는 수도가 반란군에게 포위되었고 황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진군하였는데, 진군 도중 이미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결국 청나라와 힘을 합쳐 명나라 멸망에 앞장서게 된다. 남아있는 명나라의 황족과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하였다.

 

디아스포라

 

명말청초의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은 앞서 언급한 바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부류는 조선으로, 또 다른 부류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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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의 관계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親命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금은(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端川)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안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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