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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 [국민 감동 줬던 장미란에도 모욕 악플 공격.. ] ....

뚝섬 2024. 8. 4. 05:50

[게임의 법칙]

[국민 감동 줬던 장미란에도 모욕 악플 공격, 병적 현상]

[차관 장미란] 

[어머니와 국회의원] 

[윤성빈과 '하면 된다'] 

 

 

 

게임의 법칙 

 

1988년 서울 올림픽 관련 다큐를 봤다. 서울이 아니라 ‘쎄울’이었다. “아 라 빌 드 쎄울!(à la ville de Séoul)!” IOC 위원장 사마란치의 88올림픽 개최지 발표가 아직 귀에 선하다. 최신 드론으로 오륜기를 만드는 요즘, 하늘에서 다이빙하는 인간을 띄워 오륜기를 만든 장면을 보니 그 시절의 결기가 느껴졌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군가풍의 출정가 ‘이기자 대한건아’는 ‘이기자, 이겨야 한다!’는 가사를 무한 반복하며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하던 개발도상국 시절의 비장함을 풍겼다.

 

2024 파리 올림픽의 선전을 보며 떠오른 건 장미란 선수다. 경쟁자인 중국의 ‘무솽솽’ 선수와의 일화를 소개한 그녀는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2007년 세계 선수권이 자신의 역도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메달을 바라면 상대의 실수를 바라기 마련인데, 시합 전 준비 운동을 하는 무솽솽을 보며 문득 그녀는 모든 선수가 죽도록 노력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경쟁자의 실패가 아니라 “너는 네 할 것을 해라. 나는 내가 준비한 것을 하겠다”는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그러자 상대의 실수를 바라며 생겼던 긴장이 사라지고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도 가슴이 두근거린 건 단지 메달 때문이 아니었다.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도 있고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도 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성공을 뛰어넘는 성장이었다. 어떤 경지에 오른 선수들은 ‘더 잘하겠다’가 아니라 ‘연습하던 대로 하겠다’라는 특유의 태도가 있다. 이번 양궁 대표팀 선수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게임은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과거에는 은메달을 따고도 죄 지은 표정을 짓던 선수를 여럿 봤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최선을 다한 멋진 패배에는 아낌없이 박수 치는 일이 많아졌다. 이기는 올림픽에서, 즐기는 올림픽으로 게임의 법칙이 바뀐 것이다. 서구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 투혼과 헝그리 정신을 유독 강조하던 시대를 지나온 황금 세대의 발랄한 자신감, 이 또한 우리 모두의 성장이다.

 

-백영옥 소설가, 조선일보(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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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감동 줬던 장미란에도 모욕 악플 공격, 병적 현상

 

역도 영웅 장미란 용인대 교수가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임명되자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극렬 지지자들이 악플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 대표 팬카페와 민주당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역도 선수가 뭘 안다고” “운동 선수가 뇌까지 챙기며 살긴 어렵다” 등 스포츠를 비하하는 인신 공격성 글이 쏟아졌다. “2찍이었나” “윤석열 부역자” “친일파 전향” 등의 댓글도 이어졌다. ‘2이란 대선에서 기호 2 대통령을 찍은 국민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한다. 민주당도 이번 인사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어떻게 하나같이 자격 없는 사람만 고르나”라고 했다. 장미란 차관이 도덕성이나 자질에 흠이 있다면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윤 정부에서 차관으로 발탁됐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한다.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이라고 수밖에 없다. 

 

29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발탁된 역도 국가대표 출신인 장미란 용인대 교수가 과거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유키즈

 

장 차관은 올림픽에서 금·은·동 메달을 획득하고 세계선수권에서 4회 정상에 오른 선수였다. 다른 경쟁자들은 약물 복용으로 줄줄이 메달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페어 플레이의 상징 ‘내추럴(natural)’로 불렸다. 상대방에게 박수를 보내고 실패해도 남 탓 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성실한 모습으로 2012년 올림픽 국민 호감도 1위였다. 선수촌에선 후배들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큰 언니였다.

 

그는 은퇴 스포츠 행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 장미란 재단을 설립해 비인기 종목 선수와 스포츠 꿈나무를 후원했다. 탈북 청소년과 학교 폭력 피해 학생, 소외 지역 아이들과 함께 6년간 ‘장미 운동회’를 열었다. “제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는 편향적 정치 활동을 한 적도 없다. 자질·능력, 도덕성 면에서 하자가 없다. 문재인 정부도 수영 스타인 최윤희씨를 문체부 차관에 발탁했었다. 당시 민주당은 “현장과 행정 경험을 두루 겸비했다”고 했다. 편 가르기 대신 30대 청년 인재가 스포츠 행정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도록 격려해 줬으면 한다.

 

-조선일보(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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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 장미란 

 

장미란은 역도 선수 출신 아버지의 강권으로 중3 때 역도 훈련장에 억지로 발을 들여놨다. 재능이 워낙 뛰어난 데다 반복을 좋아하는 성격 덕에 많게는 하루 5만kg에 달하는 연습량을 소화해냈다. 은퇴 후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공부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바벨을 잡으면 스트레스가 싹 가셨다고 한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역도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역도 영웅 장미란은 2012년 올림픽 스타 호감도 조사에서 박태환과 김연아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가 크게 호감을 준다”는 분석이 따랐다. ‘국민 호감’ 수식어에 대해 장미란은 “어르신들은 무거운 역기 드는 게 안쓰러운지 고생한다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어린이들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오는데, 수퍼맨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좋아하나 이런 생각도 한다”고 했다.

 

▶장미란은 압도적 실력으로 세계선수권 4연패,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이뤘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 더 깊은 감동을 안겼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선 중국 선수 자세가 크게 흔들렸는데도 성공 판정이 나면서 장미란이 은메달에 그쳤다. 그래도 장미란은 물집이 터져 피로 물든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마지막 올림픽 무대였던 2012년 런던에선 어깨 뒤로 바벨을 떨어뜨리고 나서 손에 입을 맞춘 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바벨을 어루만졌다.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선수 생활 막바지엔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여러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부상이나 판정, 불운, 나이 탓을 하지 않았고 주어진 기회와 결과에 감사했다. ‘국민 호감’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그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겪는 설움을 잘 안다. 선수촌 시절엔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왕언니로 통했다. 재단을 세워 스포츠 꿈나무 등을 지원하는 사업도 펼쳐왔다. 대학교수가 된 그는 인생과 역도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무게를 견디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한번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장미란이 29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임명됐다. 그는 10년 전 은퇴 때 “아무 꿈도 없던 중3 여학생이 역도 덕분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제가 받은 것을 돌려드리려고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그때가 된 것 같다. 장미란이 선수 시절처럼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행정으로 한국 스포츠 수준을 올려주기를 바란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조선일보(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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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국회의원

 

윤성빈(24)이 금메달을 딴 지난 16일 오후 윤성빈의 어머니 조영희(45)씨는 피니시 하우스 건너편 관중석에 서 있었다. 3차 주행은 떨린 마음에 지켜보지도 못했고, 금메달을 확정한 뒤엔 아들과 눈빛이라도 맞춰보려고 애타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윤성빈은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그가 관중을 향해 세배 세리머니를 하자 갑자기 그의 앞에 태극기가 등장했다. 이어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곳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있었다.

윤성빈은 "경황이 없었다. (함께 사진 찍는 분들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어서 현장 시상식, 취재진과의 현장 인터뷰를 가졌다. 어머니는 윤성빈을 만나러 피니시 하우스로 왔다. "성빈아, 엄마야." 목소리를 높였지만 윤성빈은 주변 환호성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빨리 가야 한다'는 얘기만 듣고 움직였다"고 했다.

 

16일 강원도 평창군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스켈레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대한민국 윤성빈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이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이다. /연합뉴스


평창올림픽 슬라이딩센터는 산(山) 능선을 따라 꼭대기부터 중턱까지 지어졌다. 지형 때문에 칼바람이 잦다. 조영희씨가 칼바람을 헤치고 아들을 만나러 가는 사이, 박 의원은 기자회견을 앞두고 잠시 쉬던 윤성빈과 함께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단둘이 나온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면서 "설날이라 다른 날보다 응원 오는 사람 적을 것 같아서 왔는데 와! 금메달. 윤성빈 장하다"고 썼다. 여론은 폭발했다. 한 네티즌은 "정치인들의 숟가락 얹기 신공(神功)이 또 나왔다"고 기막혀했다. 다른 네티즌은 "차라리 스폰서십 맡은 기업인들이 오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어머니도 만날 수 없던 윤성빈을 박 의원이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박 의원은 이날 그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인 피니시 하우스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 장소는 현장 운영을 맡은 평창올림픽조직위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다. 도종환 문화체육부 장관,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유승민 IOC 위원은 출입이 가능하지만 박 의원은 아니다. 박 의원은 "IOC의 게스트 패스를 발급받아 경기장에 갔다. 그 후 안내받아 이동했다"고 말했다. 게스트 패스는 관람석과 IOC 라운지만 통행을 허용하고 피니시 하우스 바로 아래는 입장할 수 없게 했는데, 박 의원이 '특혜'를 누린 것이다.

어머니는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렸고, 아들이 나오자 그제야 와락 껴안았다.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견하다"고 했다. 박 의원은 뒤늦게 "죄송스럽고 속상하다"고 했다. 정식 출입 자격 없어도 윤성빈 곁에서 환호하는 국회의원과 먼발치에서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린 어머니. 누가 더 속상했을까.

 

-윤형준 스포츠부 기자, 조선일보(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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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빈과 '하면 된다'

 

"참 희한한 녀석 다 봤다. 썰매 탄 지 석 달밖에 안 된 고등학생이 대표 선수들보다 낫다." 6년 전 서울 올림픽공원 근처 중국집에서 만난 스켈레톤 국가 대표 출신 강광배 한체대 교수는 혀를 내둘렀다. 서울 신림고 체육교사가 추천한 아이를 테스트해보니 그렇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강 교수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갈 썰매 종목 유망주들을 발굴하던 중이었다. 더구나 그 아이는 일년 내내 썰매는커녕 얼음 구경도 하기 힘든 경남 남해 출신이었다. 그제 설날 아시아 선수 최초로 올림픽 썰매 분야 금메달 소식을 선물한 윤성빈 얘기다.

▶로이터통신은 "스켈레톤의 황제가 탄생했다"고 했다. AP통신은 "윤성빈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압도했다. 누군가, 언젠가는 그 기록을 능가할 수 있겠지만 그가 우승한 방식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역대 한국이 배출한 올림픽 챔피언 가운데 이만큼 극찬을 들은 선수도 드물다. 

 

▶스켈레톤은 최고 시속 140km대까지 내며 달린다. 하지만 체감 속도는 시속 400km가 넘는다고 한다. 머리가 앞을 향하는 데다 두 눈으로 보면서 질주하기 때문에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이런 공포를 윤성빈은 무한 반복되는 훈련으로 이겨냈다. 그는 썰매 속도를 붙이기 위해 하루 8끼 식사를 해 체중을 불렸다. 역도로 다져진 그의 허벅지 둘레는 65cm로 축구 스타 호날두보다 3cm 굵다.

 

비인기 종목인 한국 썰매는 다른 종목에서 선수를 꾸어 와야 할 정도로 영세함을 면치 못했다. '태극 마크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유인책으로 육상, 역도, 스키 등에서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을 불렀다. 윤성빈이 가능성을 보여주자 기업들이 후원에 나섰다. 한국 봅슬레이와 스켈레톤은 코칭 스태프만 17명이다. 이 중엔 외국 코치도 7명 있다. 주행·장비·스타트 등 분야별 전문 코치가 달라붙는다. 대표팀은 "스켈레톤처럼 지원한다면 스키든 어떤 종목이든 한국이 정상에 설 수 있다"고 했다.

▶윤성빈의 금메달은 황량한 개펄 위에 세계 최고 제철소와 조선소를 빚어낸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강 교수 주도로 2000년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이 생길 때 국내 스켈레톤 선수는 그 한 명뿐이었다. 변변한 장비나 코스가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의 '하면 된다' 정신이 연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반가운 쾌거였다.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조선일보(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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