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자리, 한국 자리
중국 사람들도 자리를 중시한다. 식당에서 상석(上席)은 출입문에서 가장 먼, 문을 마주 보는 자리다. 상석의 오른쪽, 왼쪽 순으로 넘버
2·3가 앉는다. 문에서 가까울수록 하석(下席)이다. 최고 지도부를
뽑는 공산당 대회가 끝나면 당 서열 1위부터 차례로 무대에 등장한다.
2012년 당 대회에서 시진핑·리커창 순으로 걸어 나오는 걸 보고 주석과 총리가 누군지 확인했다. 중국
뉴스는 당 서열 순으로 보도된다. 서열 7위가 나오는 뉴스가
더 비중 있어도 '땡' 하면 무조건 "시진핑"으로 시작한다.
▶엊그제 시진핑 주석이 상하이에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만났다. 테이블 상석에 앉아
오른쪽 하석에 앉은 람 장관의 보고를 받았다. 양복 상의 단추를 푼 채 오른손을 휘저으며 뭔가를 지시했다. 람 장관은 다소곳한 자세로 경청했다. "법에 따라 폭력(홍콩 시위)을 진압하고 처벌하라"는
지시였다고 한다. 중국 지방관이 시 주석을 예방할 때는 항상 이런 자리 배치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가 시 주석을 만났을 때 자리가 바로 홍콩 행정장관이 앉은 그 자리였다. 2017년 특사는 대통령 친서를 들고 갔지만 전례 없이 하석에 앉아 '사드 해결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특사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김무성 대통령 특사만 해도 시 주석과 동등한 자리였다. 중국은 "새로운 관행"이라고 했지만 이후 베트남 특사도, 라오스 특사도 시 주석과 나란히 앉았다. 상대국 정상의 말을 전하는 특사는 정상급 의전을 받는 게 국제 관례다. 중국에선 한국만 예외다.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이 한국에만 이런 자리 배치를 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국격 비하를 당한 한국 대통령 특사들은 단 한마디도 항의하지 않았다. 한국에선
상대를 후벼 파는 '독설'로 유명한 대통령 특사는 상석의
시진핑 앞에서 공손히 있었다. 세월호 사고를 "살인
행위"라고 하고 야당에 대해 "도둑놈들" "독재자 후예"라던 사람이다. 만약 한국에서 '지방 장관'으로
취급당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 정권 사람들은 야당에는 고함치고 삿대질하면서 중국 앞에만 서면
얌전해진다.
▶최근 베이징에서 외교 소식통이 "사드는 한국이 실수한 것" "한국 정부와 국민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귀를 의심했다. '사드 3불'로 주권까지 내줬는데도 '사드
봉합'은커녕 중국이 우리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분위기만 짙어지고 있다. 이러다 중국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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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특사는 中에선 下席
작년 12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일본 총리를 예방했을 때 아베는 감색 바탕 꽃무늬 소파에 앉았다. 홍 대표에겐 높이도 낮고 무늬도 없는 소파를 내줬다. 누가 봐도 아베가 상석(上席)이었다. 13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문재인 대통령 특사(特使)로 아베를 만났을 때는 둘 다 같은 소파에 앉았다. 한국서 일어난 논란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 특사에게 당연한 의전이었다.
▶주권국가 간 의전에서 상대국 정상의 말을 전하는 외교 특사는 정상급 예우를 받는 게 국제 관례다. 문 대통령 특사로 방미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도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앉았고 펜스 부통령과 매티스 국방장관은 트럼트 쪽 옆줄로 앉았다.
▶중국 5000년 역사에서 국가 외교 전담 부서가 만들어진 건 1861년에
이르러서다. 두 차례 아편전쟁에서 참패한 뒤에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란 임시 교섭 기구를 설치했다. 그 전까지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평등한 관계에서 마주 앉아 본 적이 없었다.
의식(儀式)을 담당하던 예부가 조공(朝貢)을 바치던 주변국 관계를 관장했을 뿐이다.
▶작년 5월 문 대통령 특사로 방중한 이해찬 의원이 시진핑 주석을 면담할 때 중국은 전례 없는 자리 배치를 했다. 시 주석은 테이블 상석에 앉고 이 특사는 하석(下席)에서 시 주석 주재 회의에 참석한 모양새였다. 12일 정의용 특사가 시 주석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2013년 김무성 대통령 특사는 시 주석과 동등한 자리였다. 작년 이후 중국이 한국 특사를 앉히는 자리는 홍콩 행정장관이나 지방관이 시 주석에게 보고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그런데 작년 5월 일본 특사는 시 주석과 대등하게 마주 보고 앉았고, 작년 10월 베트남과 라오스 특사도 시 주석과 나란히 앉았다. 한국 특사만 하석이다.
▶중국 전문가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니 계속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한국 특사 자리가 이렇게 어영부영 하석으로 굳어지는 건 간단하게 볼 일이 아니다. 황제급 권력을 거머쥔 시 주석은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 일부였다'는 한반도관을 가진 사람이다. 중국 선전 기관들은 주변국이 조공 바치러 중국에 온다는 뜻인 '만방내조(萬邦來朝)'라는 말을 쓰고 있다. 제 자리와 위신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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