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 정상회담이 한 번도 없는 이유]
[북·중·러 정상 첫 회담하나]
[한반도 2國 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북·중·러 정상회담이 한 번도 없는 이유
50년대만 세 번 모였지만
전체주의 이웃끼리 모순
두만강 북·러 다리 놓으면
中 동해 진출 어려운 관계
북·중·러 정상은 1950년대에만 세 차례 한자리에 모였다. 1954년 베이징 열병식은 ‘항미 원조(6·25) 전쟁' 기념 성격이 강했는데 천안문에 마오쩌둥과 흐루쇼프, 김일성이 나란히 올랐다. 1957년 모스크바의 러시아혁명 40년 기념식에도 세 사람이 같이 참석했다. 1959년 신중국 건국 10주년 열병식 때도 만났다. 그런데 북·중·러 3국이 정상회담을 했다는 기록은 안 보인다. 왜 그럴까.

2025년 9월 3일 천안문 망루 - 김정은, 시진핑 바로 옆자리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부터)이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 망루에 나란히 서서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집권하던 1959년 이후 66년 만이다. /신화 연합뉴스
1956년 흐루쇼프가 죽은 스탈린을 격하했다. 독재를 굳혀가던 마오와 김일성에게 충격을 줬다. 그해 김일성은 ‘종파 사건’으로 소련파와 연안파(친중)를 숙청했다. 중·소 지도부가 반발했다. 1958년엔 북한에 남아 있던 중공군이 완전히 철수해 북·중 군사 연결도 사라졌다. 그 무렵 중·소는 이념 분쟁으로 치고받았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을 중국이 맹공했다. 중국에선 대약진운동 실패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런데 소련은 식량을 지원하기는커녕 중국에 보냈던 기술자·과학자를 전부 귀국시켰다. 중국은 이를 갈았다. 1959년 북·중·러 정상은 천안문에서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주판알을 튕기기 바빴을 것이다.
1960년대 중·소는 우수리강 국경에서 전쟁을 벌였다. 문화대혁명 중이던 중국군이 소련 흐루쇼프를 비난해 불이 붙었다. 양국 수십만 대군이 대치했고 소련은 핵 공격 위협까지 했다. 당시 북한은 양다리를 걸쳤다. 1980년대 중국은 개혁·개방에 성공했지만 소련은 몰락의 길을 걷다가 1991년 해체됐다. 북·중·러는 이해관계가 달랐고 세 정상이 만날 일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북·중·러는 사이가 좋았을 때보다 나빴던 기간이 길다.
지난 3일 북·중·러 정상이 66년 만에 다시 천안문에서 만났다. 이번에도 북·중·러 3자 회담은 없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남북 등거리 외교를 한다. 한국을 한·미·일 협력의 가장 약한 고리로 보는데 북·중·러가 모이는 장면을 연출해 한국을 미·일 쪽으로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현재 패권국인 미국과는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추구한다. 북·러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는데 트럼프는 종전을 원한다. 이런 미국 입장을 살폈을 것이다.
김정은의 이번 방중 목적은 경제 지원이었다. 북 청년 목숨 값으로 러시아 지원을 받고 있지만 최근 북한 장마당 쌀값과 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미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달러 대신 루블화로 지불해 북 내수 경제에는 큰 도움이 안 됐다는 분석이 있다. 김정은은 10월 당 창건 80년과 내년 1월 9차 당대회를 치러야 한다. 돈이 필요한데 북·중 무역은 코로나 이전의 80% 수준이다. 시진핑이 ‘통 크게’ 도와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시진핑은 집권 이후 북을 시원하게 지원해 준 적이 없다. 10여 년 전 완공된 신압록강 대교는 아직도 개통되지 않았다.
북·중은 군사 동맹이지만 연합 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 중국군이 김씨 왕조 내정을 간섭할까 봐 두려워한다. 북·러도 이번 파병 전까진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다. 북·중, 북·러, 중·러는 각각 이해관계가 있지만 셋이 모이면 이해가 충돌하곤 했다. 이번에 푸틴이 “두만강 하구에 북·러 다리를 개통하겠다”고 했는데 완공되면 중국 배가 동해로 나가는 데 지장이 생긴다. 한·미·일 협력과는 성격이 다르다. 북·중·러 신냉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3국 정상회담이 한 번도 없는 것은 국경을 맞댄 전체주의 독재국 간 모순도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 세 명의 미묘한 자존심 경쟁도 있다. 판을 크고 길게 볼 필요가 있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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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정상 첫 회담하나

중국 국민당·공산당 내전이 한창일 때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 회담을 요청했다. 공산권 맹주인 소련 지지와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은 ‘마오는 믿기 어려운 인물’이란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고 1949년 12월 스탈린 70세 생일을 맞아서야 마오의 모스크바 방문을 허락했다. 마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중·소 동맹을 맺기 위해 꾹 참고 스탈린을 만났다. 당시 북한에선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 갔다.
▶1950년 4월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6·25 남침 승인’을 받았다. 스탈린은 “마오 동의를 받으라”는 조건을 달았다. 김일성은 5월 베이징에서 마오를 설득했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김일성은 10월 마오에게 달려가 ‘파병’을 간청했다. 스탈린과 마오는 전보로 파병을 논의했다. 당시 스탈린은 6·25 개입을 숨기려 했다. 김일성과 마오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전임인 스탈린을 격하·비판하자 김일성과 마오 모두 경악했다. 굳혀가던 독재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었다. 1958년 흐루쇼프가 방중했을 때 마오는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맥주병’인 흐루쇼프를 수영장으로 데려가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1950년대 흐루쇼프, 마오, 김일성이 한 자리에서 찍은 사진은 있지만 셋이 회담했다는 기록은 안 보인다. 1960년대 대약진 운동 실패로 중국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는데 흐루쇼프는 식량 지원은커녕 중국에 보낸 기술자와 과학자를 전부 불러들였다. 중·소 분쟁이 폭발했다. 김일성은 그 틈에서 ‘등거리 외교’로 실리를 챙겼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성공하고 소련이 붕괴하자 서열이 중·러·북으로 뒤바뀌었다. 시진핑 집권 전까지 중국은 힘을 숨기려 했다. 러시아도 동북아엔 별 관심이 없었다. 북한은 신(神)이나 다름없는 지도자가 다른 정상들과 섞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50년대 이후 북·중·러 정상은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전승절에서 한·중·러 정상이 먼저 만나는 일이 벌어졌다.
▶시진핑은 전승절을 패권의 자랑 수단으로 쓰려 한다. 푸틴은 북한군 파병을 받았다. 스탈린은 북·중 정상을 부르지 않았지만 시진핑은 다르다. 김정은이 내달 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면서 북·중·러 정상이 사상 첫 정상회담을 할 기회가 생겼다. 과거 북·중, 북·러, 중·러 정상이 3각으로 소통할 때도 한반도엔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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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國 체제가 현실적 대안이다
남북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상호 교류·경제 협력 본격화
미·북, 일·북 수교도 해야
김정은 核 포기가 선결 조건
남북 적대 끝내고 통일로 가는 단 한 가지 합리적 방안
미·북 정상회담 소식이 세계를 강타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외교로 한국 정부의 운신 폭도 넓어졌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미·북 대화는 예정된 절차였다.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제2의 한국전쟁은 관련 당사국 모두에 아마겟돈의 파국을 뜻한다. 남·북·미·중 모두 외교적 해법을 바라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럼에도 한반도를 괴롭혀온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단칼에 잘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안갯속 한반도 상황을 돌파하려면 오히려 남북 2국 체제 모색이 급선무이다. '한반도 2국 체제'는 남북한이 별개 주권국가로서 엄존한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남북이 이런 현실을 수용하고 정상 국가로서 수교해 상호 교류와 경제 협력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 18일 유엔 동시 가입으로 별개 독립 주권국가임을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전체 회원국 159곳의 만장일치 승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2국 체제론은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남과 북의 두 국가가 '결손(缺損) 국가'에 불과하다는 분단 체제론의 비판도 단호히 거부한다.
분명 남북통일은 고귀한 소망이다. 같은 민족끼리 잘 살아보자는 꿈은 엄청난 감성적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낭만적 민족 통일론이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역사의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6·25전쟁은 북한판(版) 민족 통일론을 북이 무력으로 강행한 결과 빚어진 대(大)참극이었다. 6·25 후에도 남북은 국력 경쟁에서 앞선 쪽이 공세적 통일 담론을 주도해 왔다. 1970년대 초까지는 북이 통일론을 이끌었고 남북의 국력이 역전된 뒤엔 한국이 통일론을 견인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목격했듯 핵이라는 절대무기를 쥔 북한이 남북통일을 앞장서 외치는 게 지금 상황이다.
평화 협상을 거쳐 상호 대등하게 통일한 분단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사의 통절한 교훈이다. 베트남은 무력 통일 되었으며 예멘은 평화 통일의 첫 단계가 무너진 후 무력 통일로 귀결되었다. 독일은 일방적 흡수 통일이었다. 남북통일의 이치도 하등 다르지 않다. 통일이란 이름 아래 한국 시민들이 자유와 풍요를 포기할 리 없다. 통일의 대의(大義)를 위해 김정은이 유일 권력을 내려놓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 공화정과 북한의 유일 체제를 동등하게 통합한 제3의 통일 국가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섣불리 통일하려는 시도가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무력 충돌과 전쟁을 부르게 될 필연적 이유이다.
한반도 2국 체제에서 남북은 다른 나라들과도 교차적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 한국이 북방 정책을 통해 중·러와 수교한 것처럼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도 필지할 사실이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교차 승인으로 남북 적대 관계를 끝내는 그림이다. 이 구도야말로 한반도 평화 체제의 본격 출범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통일에서가 아니라 굳건한 2국 체제의 정립에서 나온다. 한반도 2국 체제는 영구 분단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궁극적 통일로 가는 단 한 가지 합리적 방안이다. 이는 우리가 정치적 상상력을 1세기 단위로 확장할 때 나오는 불가피한 결론이다.
한반도 문제를 푸는 데 정치적 현실주의가 시금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북한 핵과 중국의 존재는 한국의 북진 통일이나 흡수 통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민주 공화정과 주한 미군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는 결정적 힘이다. 미국에 한반도는 중국과 벌이는 세계 주도권 경쟁의 최전선에 자리한 핵심 요충지이다. 그 군사적 교두보이자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동맹국 한국을 '세계 제1 패권국 미국'이 포기할 전략적 이유는 전무하다. 따라서 언젠가 이루어질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의 전망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생각하는 게 대한민국 국익에 이롭다.
전쟁 불가피론자들은 대북 선제공격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숙고해야 한다. 제2의 6·25가 한반도 전체를 파괴해도 남북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음에도 전전(戰前)의 분단 상태로 복귀한 6·25전쟁이 반면교사다. 한반도 2국 체제는 '전쟁 없는 한반도'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그리고 김정은의 핵 포기 없이 남북 2국 체제는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은 차분히 한반도 2국 체제를 준비해야 할 때다. 모든 난제를 단칼에 풀 절대 보검(寶劍)은 없다. 정상회담에 대한 장밋빛 기대는 절제해야 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조선일보(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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