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 자신을 낯설게 직시하고 밖으로 끌어내라]
[오늘은 뭘 하지?]
중년의 위기, 자신을 낯설게 직시하고 밖으로 끌어내라
윤두서의 작은 자화상 속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법
전남 해남에 있는 고산윤선도박물관. 윤두서 자화상은 지하 전시장 끝부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관승 제공
목포로 향하는 남행 열차 안에서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는다. “당신의 삶은 지루하지 않나요?” 배우 제러미 아이언스의 중후한 연기가 매력적이었던 동명 영화가 던진 화두에 혹해서 원작 소설과 처음 만난 이후 어느덧 다섯 번째 독서다. 소설의 화자이며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가 새 인생을 결심한 호텔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모차르트의 음악 디베르티멘토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우아한 문장을 곱씹어본다. “그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중년의 위기와 내면의 분노,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영어로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라 부르는 중년의 위기는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여성은 호르몬 변화와 함께 몸과 마음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하소연하며, 남성도 삶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현상이다. 의욕 상실이라는 불청객도 찾아와, 소설 주인공처럼 성실하게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거나 이혼을 고민하고, 정처 없이 먼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 속 문장처럼 육체의 위기이면서 극심한 심리적 위기다. 그 시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싶다면 그 터널 구간을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지난해 자살 통계에 따르면 50대가 전체의 21%로 가장 많았고 40대, 60대 순서로 상위를 차지하였다. 이 통계에서도 중년의 위기가 얼마나 가혹한지 실감한다. 생산성의 정점인 동시에 위기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중년이란 터널이다.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 가로 20.5cm, 세로 38.5cm 크기다. /위키피디아
열차, 시간 여행, 중년 위기, 돌파구, 인문학이란 키워드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이제부터 내가 남도에서 만나려는 자화상의 주인공과 맞닿아 있는 연결점이다. 목포에서 출장 업무를 마무리한 뒤 서둘러 해남의 고산 윤선도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몇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유물 전시관이던 명칭은 그사이 박물관으로 달라져 있었고 전시 내용도 조금 바뀌었다.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지하 전시장 가장 끝부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 20.5cm, 세로 38.5cm 크기로, 르네상스 시기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유명한 자화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작은 그림이다. 그렇지만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특한 기운과 아우라는 뒤러의 그것에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부릅뜬 두 눈, 길게 아래로 늘어져 있는 수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그림이다.
도대체 화가는 이 자화상을 왜 그렸을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이처럼 세밀화를 잘 그릴 수 있는 능력자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시대에 화가 난 걸까? 혹은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나는 몇 년 전 이 그림 앞에 처음 섰을 때 화가의 의도를 알지 못해 화가 났다.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이란 글에서 “그림에 코를 너무 바짝 들이밀었다간 물감 냄새에 중독되고 말 것”이라는 렘브란트의 말을 소개하면서, 화가의 생각과 작품 의도 등을 알기 위해 애쓰지만 영영 알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고 했다.
공재 윤두서는 효종의 스승이기도 했던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이 그의 외증손자이니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 출신이다. 당시 선비가 뜻을 이루려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해야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줄곧 성장한 그는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극심한 당쟁의 혼란에 좌절한 그는 중국에서 가져온 도록을 관찰하고 모사하며 혼자서 그림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글과 그림뿐 아니라 병법, 천문, 음악, 수학, 지리, 의학 등 다양한 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만능인으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가 남긴 시 한 구절에 뜻을 펴지 못한 중년 사나이의 마음이 실려 있다.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밟히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눈을 중심으로 방사선 필법이 유명한 고흐의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 /위키피디아
자화상을 완성한 뒤 가문의 뿌리가 있는 해남으로 낙향한 44세란 그의 나이를 주목한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으로 향하는 사절단에 동행해 만리장성에 올라 마침내 오랜 우울증에서 벗어난 변곡점의 나이였다. 연암이 ‘열하일기’라는 명작을 통해 중년의 위기를 이겨내고 시대와 화해하려고 한 것처럼 윤두서도 자화상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수염이 가득한 가운데 유독 눈빛만은 형안(炯眼)으로 빛나는 그의 그림은 자화상으로는 드물게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좌절과 분노, 결핍과 굴욕은 분명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반전 에너지가 됨을 알 수 있다. 중년의 힘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성장한다. 부모, 친구, 선생님, 동료가 보는 시선이 곧 자신의 이미지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기 눈으로 봐야 한다. 중년이 바로 그 시기다. 자화상이란 가장 익숙한 자기 얼굴을 낯설게 만들고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이다. ‘빨강과 초록으로, 인간의 무서운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던 반 고흐의 자화상, 늙어서 쭈글쭈글해진 얼굴까지 기록으로 남긴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윤두서의 그림도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윤두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손관승 글로생활자, 조선일보(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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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하지?
①규칙적인 식사 ②적당한 운동 ③다양한 정신 건강 프로그램.
남편이 오랜 기간 동안 치매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이미 여러 곳의 요양원과 노치원(낮에 노인들을 돌봐주는 복지 기관)을 살펴본 경험이 있어 프로그램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
실버타운은 스스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노인들이 모인 곳이라 지도 강사 없는 취미 활동들도 눈에 띕니다. 탁구, 영화, 바둑, 고스톱.... 대부분의 실버타운들에는 입주 요건이 있습니다. 대개는 80세 이하의 나이 제한과 인지 능력, 신체 활동 기능 등의 기준에 맞아야만 합니다.
이곳은 나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입소 전 지정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합격되지 못할까 봐 마치 수험생처럼 마음을 졸이다가 합격된 기쁨으로 모든 공동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예방 노래 교실, 뇌의 활성화를 위한 퀴즈, 낱말 잇기, 독서….
의무는 아니지만 일기 쓰기는 난감한 숙제입니다. 쓸 게 없으면 하루 일과를 간략하게 기록해보라고 합니다. 신문이나 책에서 몇 구절 필사하는 것도 권장됩니다. 지인 중 한 사람은 성경 필사 동호회에 참여하며 매주 한 번씩 모여 서로를 독려한다고 합니다. 내겐 그럴 만한 끈기도 신앙심도 없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였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감의 기쁨도 나눌 수 있고, 모르고 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는 즐거움,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하는 것 같은 경험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건강상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로선 항상 세상 이야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기나 필사 대신 나처럼 이야기가 고픈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볼까 합니다. 그게 나의 일기입니다.
-진현, 조선일보(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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