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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의 정치철학] [가난의 냄새, 사람의 냄새]

뚝섬 2025. 3. 9. 05:50

[냄새의 정치철학] 

[가난의 냄새, 사람의 냄새] 

 

 

 

냄새의 정치철학

 

[윤평중의 지천하]

 

사람에겐 모두 체취가 있다. 노인은 노인만의 체취가 있고 환자들도 질병에 따라 냄새가 다르다. 난 어렸을 때 젊은 여성들에게서 향기가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향수와 화장품 덕분인 걸 나중에야 알았으니 참 늦된 아이였다.

 

선천적으로 향기가 나는 여성이 있다는 한 중문학자의 말을 난 믿지 않는다. 왕조시대 귀족 여성들은 향낭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물과 접촉하는 일을 만병의 원인으로 여긴 중세 유럽에선 강한 향수로 체취를 가렸다. 향수 산업의 기원이다.

 

씻지 않는 사람에게선 당연히 냄새가 난다. 1980년대 초 미국 유학 시절 대학원 조교실을 공유한 한 중국 명문대 출신 학생이 기억에 선명하다. 떡진 머리에 체취가 심했다. 덩샤오핑이 개시한 경제개발의 온기가 서민 생활엔 아직 미치지 못했을 당대 중국 현실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1960년대 한국 서민들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야 동네 목욕탕에 갔다. 다닥다닥 붙어 살던 서로 간에 체취를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생활 악취에서 가장 큰 것은 재래식 변소였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면서 변소는 화장실이 되어 실내로 들어왔다. 한국적 산업혁명이 주거 혁명을 낳고, 서민들도 날마다 따뜻한 물로 목욕할 수 있게 됐다. 생활 수준이 나아지는 데 비례해 사람들은 차츰 냄새에 민감해졌다.

 

우리가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과 버스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건 사적 공간 침해와 함께 타인의 체취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봉준호 감독의 걸작 영화 ‘기생충’은 이를 ‘지하철 냄새’라고 부른다. 식당에 다녀오면 음식 냄새가 몸에 배듯이 우리네 일상의 냄새를 남에게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의 주요 모티프인 반지하 집이 상징하는 지하 생활자의 냄새는 옷과 몸, 영혼까지 전방위적으로 스며든다. 그런 냄새를 맡을 일이 없는 상류층에겐 불쾌한 냄새의 침입 자체가 영화 대사처럼 사회생활의 ‘선(line)을 넘는 일’이다. 사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냄새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적인 의제로 폭발성을 갖게 된다.

 

내게서 풍기는 나만의 냄새는 스스로에겐 그리 불쾌하지 않다. 대다수 인간은 자신의 구취와 땀 냄새를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 체취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고유의 내 냄새가 프라이버시의 핵심이란 진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나의 냄새는 곧 ‘나’다.

 

냄새의 프라이버시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근원이다. 말년에 구강암으로 수십 차례 수술한 프로이트가 악취 나는 자신과 포옹하기를 애견마저 회피하자 크게 상심한 이유다. ‘지금 나한테 이상한 냄새 안 나니?’라고 물을 수 있는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인간 프라이버시의 핵심을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공적인 사회생활에서 타인한테 ‘당신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건 금기 중 금기다. 상대의 프라이버시와 존엄을 짓밟는 폭력적 행위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영화 ‘기생충’ 마지막 장면의 파국이 촉발된 이유다. 냄새는 바로 여기서 뜨거운 사회적 의제로 비화한다. 냄새라는 이슈가 서로 간 인정 욕망의 충돌과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 문제로 폭발하는 순간이다.

 

‘기생충’은 삶과 정치에 숨겨진 비밀을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영화다. 현대 최대 화두인 사회 양극화가 빚은 인간 소외를 절묘하게 형상화했다. 시각 중심 종합예술인 영화로 체취의 공적 지평을 발굴해 강렬한 ‘냄새의 정치철학’으로 승화시켰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냄새를 타인과 세상에 뿌리면서 살아간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채로.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조선일보(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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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냄새, 사람의 냄새

 

냄새는 사람의 정체성… 우린 그것에서 도망칠 수 없어
모두가 가난했던 예전엔 '이런 게 사람 사는' 냄새라 했었지
가난의 냄새를 추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
 

 

(※이 칼럼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며칠 전에 관람했다. 전작들에서 사회 계급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을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짐작보다 더 흥미로웠고 여운이 오래 남았다. 반지하에 살고 있는 하층민 기택네 가족이 언덕 위 저택의 상류층 박 사장네 집에 입성하며, 그 저택의 깊은 지하 벙커에 빚쟁이를 피해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사는 최하층민인 전 가정부의 남편과 조우한다. 계급 사다리를 상징하듯 끊임없는 계단으로 단절된 영역에서 섞이지 말아야 할 그들 계급이 이상하게 얽혀 들어가며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은 '냄새'다. 운전기사 기택은 자신에게 냄새가 난다고 하는 박 사장 부부의 '뒷담화'를 엿듣게 된다.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 나는 냄새 있잖아." "지하철을 안 탄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지하철을 자주 애용하는 나는 그 지하철 냄새가 뭐였더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기택네가 반지하에 살고 있는 걸 모르는 최상류층 박 사장은 지하방의 냄새를 모르니 그렇게 표현했을 터였다. 그건 한마디로 하층민의 냄새며 가난의 냄새다. 똥 싼 종이에 똥 냄새 나고 향 싼 종이에 향 냄새 난다는 말이 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자의식은 자신이 똥이나 된 듯한 자괴감과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구린내가 난다면 그건 이미 장미가 아니다. 냄새는 정체성이다.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인간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냄새는 그곳에서 관심과 무시, 혐오와 애착, 사랑과 증오의 범주에 따라 분류된다. 냄새를 지배하는 자, 그가 인간의 마음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냄새를 다룬 그의 성공적인 소설 '향수'에서 이렇게 썼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가난의 냄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정체성에 내상을 입은 부끄러운 냄새의 추억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학창 시절 생선 장수 어머니가 등록금으로 건네주던 지폐의 지독한 냄새를 부끄러워하던 친구.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없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씻기 위해 시립 수영장을 등록한 가난했던 유학생 후배. 꿉꿉한 장마철 빨래 같은 체취를 풍기던 만년 지하 생활자였던 선배. 아파트 현관을 지나며 냄새 나는 집이라 놀림을 받은 아이 때문에 타국에서 된장과 귀한 김치를 몽땅 버리며 울음을 삼켰다는 친척 언니.

어쩌면 모두 가난했던 예전에는 이런 게 사람 사는 냄새라 생각하진 않았나.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서 가난의 냄새를 지금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은 행복하다. 19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로 계급의 양극화가 첨예하게 벌어지는 시대에 출간되어 지금은 고전이 된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산업화의 빛과 그늘 속에서 부자는 착취하는 거인, 빈민은 억압받는 난쟁이로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2019년의 영화 '기생충'에서 부자인 박 사장 부부는 특별히 비도덕적인 착취도 갑질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표면적인 갈등과 대립은 기생하는 지하파와 반지하파와 계급 사이에서 야기되어 그 비극의 여파가 최상류층에까지 파급되었다.

'기생충'의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 기택의 인생관은 '무계획'인데, 자신의 계획은 늘 실패라서 가장 완벽한 계획이야말로 무계획이라고 아들에게 설파한다. 반면에 난쟁이인 아버지는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싶어' 했다. 몸을 다쳐 일도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공장에 내몰려 생계를 이어가지만, 동네가 재개발 사업구역으로 지정되며 돈이 없어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에 팔고 철거민 신세로 떠나야 한다. 이에 절망한 난쟁이는 공장 굴뚝에서 스스로 추락사를 선택하고 만다.

기택 역시 추락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의 아들 기우가 성공하여 아버지를 지상으로 끌어올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걸어오시면 돼요." 그냥 계단만 걸어오라고? 그 말에 오래 착잡했다. 그 계단은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 비아냥대는 이 나라에서 지옥을 벗어나는 것만큼, 아니 천국의 계단처럼 요원하진 않을까? 2019년, 대한민국 SNS에서 겉으로 부자 흉내를 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유령 같은 가난의 냄새는 어찌 잡을 것인가.

 

-권지예 소설가, 조선일보(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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