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정치 칼럼이 아니다]
[고층 아파트]
[센강 변은 다른 줄 아나]
[중산층 만든 아파트 정책 주역 K수석]
[본격 아파트 시대의 서막]
이것은 정치 칼럼이 아니다
[김도훈의 엑스레이]
원래는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 다른 걸 쓰려고만 하면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지금 전국 수많은 칼럼니스트가 아파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소재가 겹쳐도 이해 부탁드린다.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와 부른 신곡 ‘APT.’가 지구를 휩쓰는 중이다. 현재 전 세계 최고 히트곡이다. 한번 들으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노래는 ‘강남 스타일’을 능가하는 케이팝 대표곡이 될 것이 틀림없다. 다행히도 아파트는 어디에나 있다. 삼성역 근처에 있는 말춤 손 모양 기념상 같은 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심이다.
아파트라는 노래의 히트가 내심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법하다. 사실 우리는 아파트를 미워하도록 교육받았다. 아파트는 한국적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양극화의 상징이었다. 이웃의 정을 차단하는 냉담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세대 이야기다. 나의 살던 고향은 마산 삼익아파트다. 내 세대에게 아파트는 그냥 아파트다. 다만 모든 것을 분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의 글이 곧 나올 것이다. ‘강남 스타일’이 유행할 때 등장한 사회학적 분석 글들을 찾아보시라.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한 욕망을 대변하는 저질 문화 상품이라는 글을 분명히 읽은 것도 같다.
쓸만한 분석은 오히려 소셜미디어에 있다. ‘APT.’의 ‘Hold On’이라는 가사의 의미가 ‘(오르니까 팔지 말고) 버티라’라는 농담이야말로 뼈가 있다. 생각해 보니 뉴진스 노래 ‘Ditto’에 등장하는 ‘Stay In The Middle’이라는 가사가 ‘(선거에서 이기려면) 중도층을 사수하라’는 소리라는 농담도 있었다.
요즘 대통령에 대한 중도층 이탈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여론조사가 계속 나온다. 지지율은 오를 생각이 없다. 이럴 땐 계속 버티기만 하면 좀 곤란할 것이다. 이건 정치 칼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밝힌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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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아파트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지어진 12층짜리 아파트가 시초
최근 수도권 아파트 가격 상승과 부동산 정책이 큰 화제입니다.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르자 '패닉 바잉(Panic buying·공황 구매)'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데요. 아파트는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 2명 중 1명이 살고 있는 주택 유형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아파트는 도대체 언제 생긴 것일까요?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지어진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총 337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서민용 공동주택이에요. /위키피디아
아파트는 한 건축물에 여러 가구가 독립적으로 사는 주거 형태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가구가 넘는 5층 이상의 공동주택이 해당돼요. '아파트의 조상'이라 볼 수 있는 공동주택은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갑니다. 안뜰을 둘러싼 'ㅁ'자 모양의 다층 건물인 '인술라'인데 주로 중하층 주민들이 거주했어요. 1층을 상가로 쓰고 2층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형태가 마치 오늘날 상가 주택과 비슷하죠.
역사적으로 다층형 공동주택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가 예멘의 시밤입니다.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수백 년간 번영을 누린 이 도시는 16세기에 흙벽돌로 지은 5~11층 높이 건물들 500여채가 이색적이랍니다. 16세기 중반 큰 홍수가 나면서 집 짓고 살 땅이 부족해지자 이 같은 집을 지었다고 해요. 그래서 '사막의 맨해튼'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 19세기 중반 새롭게 도심을 정비한 프랑스 파리에도 층마다 여러 독립 가구가 사는 5~8층짜리 공동주택이 빼곡히 들어찼는데요. 이런 공동주택의 꼭대기 옥탑방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살며 예술혼을 불태우곤 했죠.
오늘날 아파트의 개념은 1927년 처음으로 등장했어요. 독일 슈투트가르트시 요청으로 독일 미술·공업·수공예 전문가들이 설계한 '바이센호프 주택 단지'입니다. 독일의 건축 거장 미스 반데어로에를 중심으로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한스 샤룬 등 당대 내로라하는 건축가 17명이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공동주택을 지었습니다. 특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공동주택은 오늘날 우리나라 저층 아파트와 외관상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아주 유사한데, 그는 이 주택을 공개할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해요. "여기에 설계한 것은 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다!"
이 기세를 몰아 르 코르뷔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족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현대 고층 아파트의 기원이 된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합니다.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지어진 이 12층짜리 건물은 총 337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서민용 공동주택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여러 커뮤니티 시설을 통해 구성원들이 편리하게 생활하는 데 초점을 두었는데요. 총 23가지 타입으로 나눈 주거 공간과 옥상 정원, 수영장 등 커뮤니티 시설 등이 지금 보아도 무척 현대적이에요.
하지만 사실 서구 유럽에서 아파트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어요. 서민을 위한 임대 주택용으로 짓다 보니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슬럼화도 진행됐거든요.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아파트의 위상은 정반대입니다. 최초의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인 서울 마포아파트(1962년)는 개별 보일러와 수세식 변기를 갖추고 단지 내 녹지에도 신경을 쓴 고급 주택을 표방했어요. 이후 1960년대 세운상가, 유진상가 등 주상복합 아파트에 고위 관료와 재력가, 연예인 등이 거주하면서 '아파트=고급'이란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이후 한강 개발과 맞물려 1970년대 한강변에 중산층을 위한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고 이후 서울 강남, 잠실, 과천, 목동 등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졌답니다. 바야흐로 "아파트 공화국"(프랑스 사회학자 발레리 줄레조)이 된 거예요.
-전종현 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 조선일보(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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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강 변은 다른 줄 아나
파리와 서울을 한국의 집권당 대표가 강변 풍경으로 비교했다. 그는 "서울은 한강변에 아파트만 들어서서 단가 얼마 얼마라고 하는데, 이런 천박한 도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센강 같은 곳을 가면 노트르담성당 등 역사 유적이 쭉 있고 프랑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안다"고 했다. 물론 그는 서울의 과열된 아파트 열기를 비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부동산에 집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센강 변에는 역사 유적만 있는 게 아니다. 부동산 열기도 함께 흐른다. 센강의 양대 하중도(河中島) 중 행정기관이 많은 시테섬과 달리 생루이섬에는 낡긴 해도 아파트가 적당히 있다. 생루이섬에 살면 노트르담성당을 비롯한 여러 세계적 명소를 지척에 두고 생활할 수 있다. 센강의 중심에 거주한다는 각별함도 누린다.
가격은 얼마나 할까. 침실 하나와 주방 겸 거실 하나가 있는 전용 52㎡(약 15.7평)짜리가 99만9000유로에 나와있다. 센강 전망도 없고 주차장도 없다. 그래도 14억원에 달한다는 얘기다. 이만 한 집에 세들어 살려면 적어도 월세 350만원쯤을 내야 한다. 한강 변과 마찬가지로 센강 변 아파트도 '단가 얼마 얼마'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스인들은 '천박한'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다. 일간 르파리지앵은 지난 7일 자에서 파리 근교 부촌(富村)인 뇌이쉬르센의 집값을 해부했다. 큼직한 지도를 그려 골목 단위로 집값을 표시해놨다.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서다. 이뿐 아니다. 부동산 정보업체들은 아파트 값으로 파리 시내 20구의 순위를 매기고, 이런 서열이 언론 보도에 등장한다. 노골적이고 솔직한 부동산 정보가 넘쳐난다. 대표적인 좌파 신문인 르몽드조차 자체 부동산 사이트를 운영할 정도다. 파리·서울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은 넘쳐난다. 그런 대도시의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에 몸을 누이려는 경쟁이 멈추지 않는다.
여당 대표의 '천박하다'는 표현에는 '더 좋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망을 저급한 것으로 여기는 집권 세력 특유의 시각이 담겨 있다. 그들은 주택 보급률이 높다며 "집은 충분한데 투기꾼들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더 좋은 집에 대한 갈망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식 배급 논리다. 100명에게 꿀꿀이죽 100인분을 던져주고 '배를 채우는 데 문제없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정부는 집을 둘러싼 인간 본성과 시장 원리를 다 무시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집을 늘리려는 시도는 뒷전이고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편 가르는 정치 게임에 몰두한다.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국가의 정책 목표는 국민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야 한다.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파리에서든 서울에서든 더 좋은 집에 대한 열망은 죄가 아니다.
-손진석 파리특파원, 조선일보(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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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만든 아파트 정책 주역 K수석
아웅산서 순직할 때 집은 반포 한신공영
분양가 상한제 기준은 월급쟁이가 5~7년 모을 돈
아파트 발판 중산층 도약
1977년 중동 특수로 인해 시중에 부동자금이 넘쳤고, 그 돈 일부는 자연스럽게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꾼들이 강남 일대의 아파트 분양 시장을 들쑤셨고, 민간 건설사들은 시장 분위기에 편승해 분양가를 인상했다. 아파트 투기 붐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경제기획원의 K국장은 남덕우 부총리(장관)의 지시로 건설부와 협조해 분양가 안정 대책을 내놓았다. 공공부문 아파트에만 적용되던 분양가 상한제를 민간부문 아파트에도 확대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분양가를 통제하면 건설업체의 토지 수요를 억제해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상한제의 기준이었다. '월급쟁이가 5~7년 정도 벌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으로 결정했는데, '월급쟁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이 제도의 일차적인 수혜 대상은 1940년대 초·중반생 대졸 화이트칼라 집단이었다. '4·19 세대'로 불리기도 했던 그들 상당수는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진전과 함께 근로소득의 증가를 맛보았지만, 아직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채 30대 중반의 나이로 가족을 이끌고 서울 변두리의 전·월셋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진보 진영은 이 시기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고도성장이 야기한 개발 열기와 물가 폭등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부동산 정책을 세우지 않고 지가 폭등을 방치해 결국에는 상위 계층에게 자산 증가의 기회를 몰아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이런 비판에 응답이나 하듯이, 이 시기 경제 정책을 총괄했던 남덕우 부총리는 자서전에서 "토지 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 정책을 추진"한 과오를 인정한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 정책을 제도화했어야 했다"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양자의 논의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주택 공급 정책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근로자 재산형성 저축제도 도입, 1977년 분양가 상한제 확대 적용, 1978년 부동산 투기 억제책 시행, 1981년 택지개발촉진법 제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책의 입안자들은 식민지 세대의 기성 관료들이 추진한 국가 주도형 개발 정책의 지속 가능성에 의구심을 표하던 젊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들이었다. 1938년생 K국장 역시 그 일원이었다. 이들의 정책은 부동산 투기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산업화의 실무자로 성장한 아랫세대 '월급쟁이'들이 아파트를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유형의 계층으로 도약하는 데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 계층의 이름은 '중산층'이었다.
1980년 K씨는 신군부의 국보위에 경제과학분과 위원장으로 참여해 택지개발촉진법 제정에 관여했다. 공공부문의 대규모 택지 개발을 제도화한 이 법의 후광 덕분에 아파트는 주거 문제의 해결안이자 중산층 양산의 방법론으로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K씨는 이후 버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순직하기 전까지 청와대 수석으로 일하면서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이 시기, 그의 거주지는 반포 한신공영 아파트였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조선일보(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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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아파트 시대의 서막
1970년, 동부이촌동에서 일어난 일들
"아파트 사업 무조건 돼요" 조언 들은 정주영 회장은
공장을 옮기고 그 자리에 현대아파트를 짓는데…
1970년, 명문대 출신의 1941년생 Y씨는 현대건설 중기 공장에 관리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정주영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이뤄진 빠른 승진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Y씨는 예상치 못한 난제에 봉착했다. 서울 한강변 동부이촌동에 위치한 공장의 입지가 문제였다. 인근의 한강맨션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질 않았는데, 분진과 소음이 심하니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달라는 것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풀렸다. 공장 인근에 지어진 민간 건설사의 모델하우스에 방문한 덕분이었다.
사실 Y씨에게 동부이촌동은 낯선 동네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꼬마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광경이나,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자가용 승용차 행렬은 외부인에게는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Y씨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 그 이상이었다. 확실히 한강맨션은 서울 중상류층 일부의 거주지를 사대문 안에서 한강변으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중대형 아파트의 주거 형태를 골격으로 삼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고 있었다. 경제성장이 가져올 '서울의 미래 주거 패턴'이 바로 이 동네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Y씨는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곧바로 새로운 사업안을 정주영 회장에게 건의했다. 공장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자는 것. 그러니까 민원 해결과 아파트 사업 진출,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것이었다. 정 회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에이, 아파트는 무슨 놈의 아파트. 우리가 아파트 사업을 하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나?"
경부고속도로나 소양강댐 같은 대규모 국책 토목 사업을 이끌던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에게 아파트 건설은 매력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중소 건설사나 뛰어들 법한 '집 장사'였다.
흥미롭게도 정 회장이 생각을 바꾼 것은 육사 8기 출신의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총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 직후였던 듯하다. 당시 장 총재는 60년대식 서민용 아파트와의 단절을 꾀하기 위해 내놓은 한강맨션의 성공으로 크게 고무된 상태였다. '월간조선' 2006년 7월호에 실린 장동운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 회장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됩니까?" 답변 역시 간단명료했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시죠." 다음은 장동운씨의 회고다. "그러더니 정 회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터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정 회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한강맨션의 바통을 이어받아 '본격 아파트 시대'를 주도할 현대아파트 신화의 서막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시 Y씨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는 사업안을 제안하고 얼마 후 이사로 승진했고 이후에도 중동 건설 붐과 함께 승승장구해 1977년에는 35세 나이로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대선에 보수 야당 후보로 나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뉴타운 열풍과 강남 재건축 열기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잦아들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조선일보(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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