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1904년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축하파티]
창덕궁
조선왕조 500년 중 260년 동안 정궁

창덕궁 인정전. 이곳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으로, 임금 즉위식, 세자 책봉식 등 국가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곳이에요. /위키피디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다음 달 30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서울 창덕궁(昌德宮) 인정전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해설 프로그램을 마련한다고 해요.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으로, 임금의 즉위식과 결혼식, 세자 책봉식, 문무백관 하례식 같은 국가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곳이에요. 경복궁의 근정전, 덕수궁의 중화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조선 5대 궁'의 하나로 꼽히는 창덕궁은 어떤 궁궐이었을까요?
조선 11명 임금의 기본 거처
두 가지 문제를 내 볼 테니 알아맞혀 보세요. 첫째,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은 어느 곳일까요? 둘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일한 조선 궁궐은 과연 어느 곳일까요?
두 문제 다 '창덕궁'이 정답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죠?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정식 궁전)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궁궐은 경복궁인데 말이죠. 경복궁은 1395년에 지어져 채 200년이 되지 않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불타고 말았어요. 그래서 광해군 2년인 1610년부터 조선 말인 1868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까지 약 260년 동안 정궁 역할을 했던 곳은 창덕궁입니다. 광해군부터 철종까지 11명의 임금이 창덕궁을 기본 거처로 삼았습니다. 만약 숙종이나 정조가 나오는 사극을 경복궁에서 촬영한다면 고증(考證)이 잘못된 것이죠.
5대 궁 가운데 창덕궁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유를 알아보죠. 현재 남아있는 조선 궁궐 중 창덕궁이 궁궐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경복궁과 덕수궁은 19세기 후반 이후에 지어졌고 상당 부분 훼손된 것에 비해 창덕궁은 돈화문·인정전·선정전 등 많은 건물이 수백 년 전 원래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궁궐은 창덕궁
1392년 세워진 조선 왕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어요. 그로부터 조선왕조는 계속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훗날 태종이 되는 왕자 이방원이 이복(異腹)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이방원의 형인 이방과가 2대 임금 정종이 됐는데, 그는 형제들의 피비린내가 풍기는 한양이 싫다는 듯 1399년 옛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1400년 제3대 임금이 된 태종은 다시 한양 천도(遷都·도읍을 옮김)를 계획하고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경복궁 동쪽에 짓게 했습니다. 1405년 한양 천도와 동시에 태종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죠. 한마디로 경복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지은 궁궐이라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자신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바람을 일으킨 현장인 경복궁을 꺼렸을 수도 있습니다. 창덕궁 내부 전각(殿閣)을 지은 뒤인 1412년엔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자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다시 지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전까지 임금이 주로 머물던 곳이 창덕궁이었고,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시됐기 때문이었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한 차례 불탄 창덕궁은 1647년 복구됐습니다. 효종 때는 대비(大妃)를 위한 수정당·만수전 등을 지었고 숙종은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미면서 천문기기를 설치한 제정각을 건축했습니다.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꿈꿨던 정조는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창덕궁 안에 지었습니다. 경관이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게 했는데, 건물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입니다. 지금도 창덕궁 방문객이 반드시 사진을 촬영하고 가는 곳이죠.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창덕궁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기거했는데, 이 무렵 자동차 차고, 전등, 커튼, 서양식 의자 같은 근대식 설비가 도입돼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희정당이죠. 왕실 가족들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은 창덕궁 남동쪽의 낙선재였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적인 궁궐'
그런데 왜 조선 왕들은 정궁도 아닌 창덕궁을 오히려 경복궁보다 더 선호했던 것일까요? 실제로 살기엔 창덕궁이 훨씬 좋은 궁궐이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격식을 갖춰 지은 경복궁은 구조가 직사각형으로 빽빽하고 녹지도 적었던 데 비해,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죠.
그런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 후원(後苑)입니다. '비원(祕苑)'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엔 창경원(현 창경궁)과 함께 학생들의 단골 소풍 지역이었어요. 지금은 예약을 통한 특별 관람만 가능합니다. 후원 서쪽 담 안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금천교 밑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는 옥류천 물이 흐르는 가운데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며 부용지와 애련지 같은 연못 곳곳에 아름다운 정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유흥을 위한 곳이 아니라 임금과 세자의 학문과 수양이 이뤄진 장소였습니다. 만약 외국인 친구가 '한국의 고급스러운 전통 미학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이곳으로 데려가면 될 거예요. 정문인 돈화문에서부터 인정전과 희정당, 규장각 같은 숱한 얘깃거리를 지닌 건물들을 거치면서 말이죠.
[창경궁·덕수궁·경희궁]
'조선 5대 궁'은 경복궁·창덕궁과 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말합니다. 창경궁은 조선 성종 때 생존해 있던 세 왕후(세조, 추존왕 덕종, 예종의 비)의 거처를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었던 궁궐로, 임진왜란 뒤 창덕궁이 정궁 노릇을 할 때 창덕궁과 경계 없이 궁궐로 사용됐습니다.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됐다가 1980년대 복원 사업을 통해 궁궐의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덕수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터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 거처였고, 광해군 때 '경운궁'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뒤 중화전과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등이 세워져 대한제국의 궁궐 역할을 했습니다.
경복궁의 별칭인 '북궐(北闕)', 창덕궁·창경궁을 일컫는 '동궐(東闕)'과 대비돼 '서궐(西闕)'로 불렸던 경희궁은 광해군 때 이궁으로 지어졌던 궁궐로 이후 여러 임금이 머물러 정사를 보기도 했고,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희정당. 본래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부터 왕의 집무실로 사용된 곳이죠.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장련성 기자

창덕궁 규장각과 주합루. /이진한 기자

180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박종인 기자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안영 기자, 조선일보(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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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본군은 창덕궁에서 파티를 벌였다
국력 배양을 외면하고 권력을 탐했던 조선 집권층
1904년 5월 러일전쟁 때 창덕궁 후원을 일본군 파티장으로 내줘
이지용, 이근택, 민영철 등 나라를 고물로 만든 권력자들… 일본에 돈 요구하며 헐값으로 나라 팔 준비
1904년 9월 일본군은 철도 파괴한 조선인 총살… 한달 뒤 황제 고종, 만주로 일본군 위문사 파견
1905년 5월 경부선 개통식… 창덕궁 일본인 축하 잔치에 대한제국 군악대 동원
1904년 5월 6일 창덕궁에서 대단한 파티가 열렸다. 한때 규장각으로 쓰였던 후원 주합루에는 대형 국기가 걸렸고 칼 찬 군인들이 사방에 우글거린다. 서양 외교관도 눈에 띈다. 흰옷 입고 흰 갓 쓴 민간인도 눈에 띈다.
이날 자 '황성신문'은 행사를 이렇게 예고했다. '경성의 일본 거류민 등이 오늘 창덕궁에 우리 대신 약 50~60명을 초청해 전첩 축하회를 연다고 한다.'(1904년 5월 6일 '황성신문')
1904년 5월 6일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바글바글한 군인들은 그해 발발한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이다. 닷새 전 들려온 청나라 구련성 전투 승전보를 기념하는 '전첩축하회'가 바로 대한제국 궁전에서 열린 것이다. 주한 외국사절은 물론 대한제국 고위 관료도 파티에 참석했다. 매국노들이 고물로 만들어버린 나라가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장면이다. /코넬대학교 윌러드 스트레이트 문서
그러니까, 사진 속에서 주합루에 우글거리는 저 군인들은 일본군이다. 국기는 태극기와 일장기다. 닷새 전 청나라 구련성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치고서, 일본군이 벌인 전승 축하 파티다. 바다 건너 일본군이, 청나라 땅에서 러시아군을 누르고, 대한제국 구중궁궐에서 떼로 모여 일장기 걸어놓고 즐겼던 파티 이야기.
고물이 된 나라
1884년 갑신정변을 청나라 군사를 불러 진압한 이후 1894년 동학혁명까지 조선은 태평천국이었다. 청은 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 나름대로 손익을 따지며 조선에 무관심했던 10년이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조선의 권력자들, 고종과 왕비 민씨 세력은 나라를 개조할 생각보다는 권력을 강화하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군사력은 미약했고 경제력은 더 미약했다. 부패한 집권층은 청, 러시아, 미국에 의지해 권력 유지를 기도했고 백성은 그 강화된 부패 정권에 더욱 시달렸다. 학정에 시달린 백성이 들고일어난 사건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농민을 진압할 군사조차 없던 조선정부는 결국 다시 한 번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였고, 이에 함께 출병한 일본군이 일으킨 전쟁이 청일전쟁이었다. 1895년 러시아에 기대려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됐다. 그 강압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사건이 1896년 아관파천이었고, 1897년 대한제국 건국이었다. 그때 일본은 조선을 놓고 러시아를 상대로 힘을 재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생명체로는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물건으로 치면 고물이 돼 있었다.
난파선을 버린 쥐떼들
1904년 정초부터 러·일 간에 전운이 감돌았다. 나라를 완전히 고물로 만들어버린 매국적들이, 헐값이 된 나라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11일 오후 외부대신 이지용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사전에 요구했던 '황제를 회유하는 데 필요한 활동비 1만원' 전액을 받아갔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한일밀약 체결 예상 및 한정 회유상황 등 보고' 1904년 1월 11일) 1만원만 주면 한반도를 전쟁에 필요한 일본군 군용지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8일 뒤 이지용은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과 함께 하야시에게 황제 위임장을 들고 왔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생명을 걸고 본건 성립에 온 힘을 다할 작정이니 (일본) 제국 정부에서도 충분한 신뢰해 주기 바란다"며 "만일 위험이 신상에 발생하게 될 경우에는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한일밀약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월 19일)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다. 황제 고종은 전시 중립국을 선언했다. 외교력과 군사력 없는 선언을 일본은 즉각 무시했다. 2월 12일 대한제국 정부는 각 군(郡)에 '군내를 통과하는 일본군에 숙박 및 군수 일체를 협조하라'고 명을 내렸다.(각사등록 근대편 '연도각군안5' 1904년 2월 12일), 20일에는 한성 시장에게 '일본 북진군 군수품 수송 인부 600명을 지체 없이 모집하라'고 명을 내렸다.('한성부래거안1' 1904년 2월 21일) 나라를 일본군 군용으로 내준 '한일의정서'는 이틀 뒤에야 체결됐으니, 나라를 책임지던 자들은 이미 그 나라를 땡처리로 판매 중이었다.
일본인의, 일본인을 위한 가든파티
그리고 열린 파티가 창덕궁 전승 축하잔치였다. 파티에 얼굴을 보인 군상(群像)은 다양했다. 황제는 이날 정3품 홍순욱을 '일본 진북군 접응관'에 임명해 파티에 대신 참석시켰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의정부 참정 조병식과 의전 담당 예식원 예식경 민종묵도 참석했다. 조선인은 흰옷을 입고 흰 갓을 썼다. 때는 헌종의 계비 홍씨의 국상 기간이라 백립과 백의, 백대 착용이 의무였다.
2019년 창덕궁 주합루.
사진 속 주합루 2층 가운데 기둥 오른쪽에 서 있는 양복 차림 사내는 군부대신 윤웅렬이다. 그 앞은 그의 자식들이다. 그 아래층에 파티에 초대된 주한 외국 인사들이 보인다. 공식적인 파티 주관을 일본인 거류자들이 했으니 일본 복식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윤웅렬의 아들인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윤치호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아름다운 곳이 일본인들 환성으로 가득 찼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황제에게서도, 비굴하고 부패한 신하에게서도 끔찍하게 생기를 잃은 대중에게서도 조선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윤치호일기 1904년 5월 6일) 그날을 치욕으로 기록했던 윤치호였다. 하지만 그 또한 훗날 식민시대 총독부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1년 뒤 열린 또 다른 일본인의 궁궐 파티
러일전쟁이 일본 쪽으로 승기가 기울던 1905년 5월 25일 한성 남대문역에서 경부선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개통식에는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伏見宮) 히로야스(博恭) 왕이 참석했다. 다음 날 대한제국 궁내대신 박제순은 일본 관련 인사들을 창덕궁으로 초대해 원유회를 개최했다. 주합루에는 다시 한 번 한·일 양 국기가 교차돼 걸렸다. 일본인의 이 자축잔치에, 대한제국 군악대가 동원돼 축하연주를 했다.
1905년 5월 2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경부선 개통 축하 가든파티에 동원된 대한제국 군악대. /일로전쟁실기 한국사진첩(1905년)
대한제국 군악대는 1901년 창설됐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훗날 만든 군악대다. 군악대는 황제 생일과 각종 연회에 동원돼 연주했다. 군악대 교관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일 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였다. 에케르트는 1880년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국가도 만들어 제국 훈장 또한 받았다.(1902년 12월 20일 '고종실록') 작곡이 아니라 민요를 편곡했다는 최근 주장도 있다.
에케르트 지휘하에 대한제국 군악대는 군악대 연주홀로 건립된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연습하며 실력을 쌓고, 각종 국가행사와 외교 행사에서도 연주했다.(김규도, '대한제국 군악대의 흥망과 잡지 '동명' 게재의 전모', 2017) 에케르트는 1916년 죽어서 양화진에 묻혔다. 대한제국 군악대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후 '경성악대'라는 이름으로 민간 연주단으로 활동했다.
그 군악대가 친일 대신 박제순이 주선한 창덕궁 일본인들 잔치에 동원돼 연주한 것이다(위 러일전쟁 전첩축하회 사진 오른쪽 끝에도 군모에 오얏꽃 문양을 박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군악대인지는 기록에 없다).
박제순은 6개월 뒤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고, 다시 5년 뒤 내부대신 자격으로 한일합병조약에 참석했다. 나라를 고물로 만들어버린 자들이, 참으로 헐값에 그 나라를 팔아치웠다.
일본군이 총살한 대한제국인… 일본군을 위문한 대한제국
창덕궁 파티가 끝나고 넉 달이 지났다. 일본군은 군사를 실어 나를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며 대륙 침략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해 9월 20일 오전 10시 철도 건설을 방해하다가 검거된 아현동 사람 김성삼, 안양 사람 이춘근, 신수철리 궁방동 사람 안순서가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한성판윤 김규희가 간부들을 급파했으나 처형은 끝났다.(각사등록 근대편 '한성부래거안1' 1904년 9월 21일) 한 달 뒤인 10월 26일 황제는 '먼 땅에서 여러 달째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일본군을 위로하려고 육군 부장 권중현을 위문사로 보냈다.(1904년 10월 26일 '고종실록')

1904년 9월 경부선 철도 훼손 사건으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된 조선인들. /코넬대학교 윌러드 스트레이트 문서
두 달 뒤 1904년 12월 31일 의정부 참정 신기선이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이 (민란이 극성했던) 1862년과 (동학의) 1894년보다 더 심해졌다"고 사표를 던졌다. 황제 고종은 "뜻이 간절하니 받아들인다"며 사표를 받았다. 같은 날 두 달 전 대륙으로 떠났던 위문사 권중현이 귀국했다. 권중현은 그날 법부대신으로 승진했다.(1904년 12월 31일 '고종실록') 나라가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물이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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