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100년 前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事實'만을 붙들고 독자 여러분 곁을 지키겠습니다]

뚝섬 2020. 3. 5. 07:30



100년 前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1920 3 5일 창간한 조선일보가 한국 신문 최초로 100년을 맞았다. 그 긴 세월 모진 풍상(風霜)을 견디고 오늘에 이른 것은 언제나 응원하고 질책해주신 독자 여러분의 덕이다. 조선일보는 우리 민족이 1919 3·1 독립 만세를 외치며 흘린 피의 값으로 얻어낸 한글 신문이다. 나라가 세계지도에서 없어진 민족에게 남은 것은 오직 말과 글뿐이었다. 만약 그때 조선·동아일보와 같은 한글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글로 만들어진 신문은 그 자체로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에게 등불과 같았다. 희망과 용기를 지키는 작은 불씨이기도 했다. 말과 글을 잃지 않은 민족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 살아 있는 예가 바로 우리다.

잃어버린 나라의 이름 '朝鮮(조선)'을 제호로 달고 빼앗긴 글로 민족의 설움을 대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가시밭길이었다. 창간 5개월 만에 항일 시위를 폭력 진압한 일본 경찰을 비판한 논설로 첫 정간을 당했다. 복간하자마자 정간 조치에 항의하는 논설을 써 또 3일 만에 정간당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광적(狂的) 신문'이고 불렀다.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조선일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 민족 진영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일보 사장을 맡아 '조선 민중은 조선의 산물(産物)을 사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아는 것이 힘이다. 민족의 얼을 지키자'는 한글 교육과 문자보급운동, 분열된 좌·우파 독립운동을 한길로 모았던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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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창씨개명, 한글 말살의 폭압 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동아일보까지 없애려 했다. 그 암흑기에 민족의 표현 기관으로서 일제 강압과 신문 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은 조선일보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다. 결국 일제는 1940 8 10일 조선·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켰다. 강요와 압박으로 잠재울 수 없는 민족 언론의 존재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88000여 건의 기사 압수, 500건 이상 기사 삭제, 네 차례에 걸친 발행 정지를 당했다. 3·1 독립선언 33인 중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한용운이 조선일보 폐간 소식을 듣고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라는 시()로 애달파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이 모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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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물러난 후에도 민족의 질곡은 끝나지 않았다. 6·25 남침으로 국토와 국민이 결딴나는 참화까지 겪었다. 이 어려운 시기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함께했다. 북한 공산군에 서울을 빼앗겼을 때 부산·대구를 전전하며 조그마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라도 발행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이 이 초라한 타블로이드 전시판(戰時版)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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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우리글과 말을 지켰다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엔 가난 퇴치와 산업 발전, 세계 무대 진출이라는 국민 모두의 염원과 함께했다. '선생님을 해외로' '한민족사 탐방' '쓰레기를 줄입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세계가 뛰고 있다, 우리도 다시 뛰자'는 운동은 우리 사회와 경제를 바꾸는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산업화로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된 뒤에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지켜왔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의 이 기적적 성취에 작은 벽돌 한 장이라도 놓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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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5100만 국민이 이뤄낸 번영을 2000만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선진 한국'도 반쪽에 그칠 수밖에 없다. 1964 '납북 인사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끝에 101만명의 진정서를 유엔에 제출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단초가 됐다. 광복 70주년인 2015 '통일과 나눔' 재단 기금 마련에는 170만명이 동참했다. 작년에만 단체 122곳에 1004600만원을 지원했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지만 어떤 권력도 언론의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제왕적 힘을 휘두르는 우리 대통령 권력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는 1960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설로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 의혹을 정면 비판했다. 4 19일 자 고려대생 피습 사진 특종은 4·19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언론 통제를 위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켰다. 조선일보는 '민주 정치에 큰 오점을 찍었다' 1면 사설로 반대했다. 정부는 공무원 가족 구독 중단, 기업 광고 중단에 신문 용지 공급까지 막았다. 그래도 조선일보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정부는 결국 언론윤리법 시행을 보류했다. 1973년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됐다. 수사는 한 달 넘게 겉돌았다. 당시 주필은 한밤중 윤전기를 세우고 '이 사건은 국민에게는 어이없고 견딜 수 없는 횡액(橫厄)'이라며 진상을 밝히라는 사설을 실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보도였다.

'
민주화' 깃발을 들고 탄생한 정권들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보도에 세무조사로 보복하고 시민단체로 위장한 외곽 단체를 동원해 불매운동, 광고 탄압에 나섰다. 근래에는 권력 편에 선 매체들까지 조선일보를 공격하고 있다. 정치 상대방을 악()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나아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언론까지 적대하는 현실이다. 영향력을 가진 조선일보는 언제나 이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괴담과 가짜 뉴스도 언론을 위협하고 있다. 광우병 괴담처럼 수만, 수십만 군중을 모으는 전례 없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때도 조선일보는 할 말을 해야 했다. 외로운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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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는 정보는 '진짜' '가짜'가 뒤섞여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양극화된 진영 논리의 무한 충돌만 반복되고 타협의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 상황에서 사실(事實)을 찾아 할 말을 하는 언론의 사명은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조선일보 역시 사실보다 속보에 치중하다 크고 작은 오보를 했다. 다시 한 번 사실 추구의 언론 본령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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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100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조선일보는 100년 전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1920년 3 9일자 창간 3호의 1/조선DB


-조선일보(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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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實'만을 붙들고 독자 여러분 곁을 지키겠습니다

 

조선일보 100년은 事實을 찾고 밝히는 데 성공하고 실패한 기록
그러다 박수받고 비난당한 기록의 모음

힘들고 외롭고 보상 없어도 事實 추구의 길 걷겠습니다

 

36년 전 조선일보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창간 100주년 날에 주필(主筆)이 돼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00년을 하루 앞둔 4일 아침 책상 앞에 앉으니 '내가 과연 이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만 보던 '역사의 무게'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한다. 두려운 느낌이 든다.

일제강점기 안재홍 주필은 모두 9차례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 1942 12월 그 추운 함경남도 감옥에 마지막으로 석 달여간 수감되고선 죽음 직전의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감방 온도는 보통 영하 20도 정도였고 일제는 선생을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했다. 같이 투옥된 두 사람은 감옥에서 죽었다. 최석채 주필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을 위한 언론윤리위법을 정면 거부했고 선우휘 주필은 한밤중에 윤전기를 세우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판했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당시 이들에게 어떤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기 어렵다. 오늘 아침, 그분들의 책상 앞에 앉으며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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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 100년을 맞는 날 논설 책임자로서 신문은, 언론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를 생각한다. 신문은 멋진 글을 쓰는 곳도 아니고,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쓰는 곳도 아니다.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쓰는 곳도 아니고 독자들이 반기고 좋아할 내용만 쓰는 곳도 아니다. 권력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곳이 물론 아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인 곳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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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36년간 쫓아다닌 것, 지금도 조선일보 기자 수백 명이 매일 찾으러 다니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든 것,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닌 것, 왜 찾아다니느냐고 욕먹고 손가락질당하는 것, 그렇게 어렵게 찾았더니 생각과 전혀 다른 것, 찾아내 보니 권력을 분노케 하는 것,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증오를 사는 것, 때로는 대중(大衆)의 요구와 다른 것,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기까지 한 그것은 사실(事實·fact)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100년은 한 줄로 줄여 말하면 '사실을 찾다가 성공하고 실패한 기록'이다. 한 줄만 덧붙이자면 '그러다 박수받고 비난당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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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실'은 숨겨져 있다. 몇 겹 껍질 아래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기자 생활 전부는 이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성공도 있었다. 하지만 못 찾아낸 것, 잘못 찾은 것이 더 많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사실'도 있다. 누구나 보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권력의 위압 때문일 수도 있고 대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신문은 이때 말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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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사실로 위장한 것'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위장 사실, 가짜 사실은 인터넷을 타고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우병 괴담, 천안함 괴담, 사드 전자파 괴담, 수돗물 괴담, 미네르바 괴담, 사진 영상 조작, 가짜 뉴스 등 위장 사실은 수많은 군중을 몰고 다닌다. 대부분 뒤에는 정치 세력이 있다. 언론이 괴담을 만들기도 하고 군중 규모가 커지면 다른 언론들이 편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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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들이 "뇌에 구멍 뚫려 죽게 됐다"고 울던 광우병 사태는 지금 생각하면 희극 같지만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은 군중에게 폭행을 당하고 사옥은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사실을 찾고 말한 ''였다. 필자는 세 번 연속 광우병 소동은 과장돼 있다는 칼럼을 썼는데 살해 위협 문자를 받기도 했다. 매일 수만 수십만 군중과 이를 선동하는 정치에 맞서 사실을 말하는 것, 국민의 3분의 2가 믿는 일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자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 정도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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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권도 조선일보를 위협하고 조사했다. 정치 목적이 분명한 세무조사를 하고, 기자들을 해고하라고 하고, TV조선 재승인으로 협박하고, 다른 언론을 동원해 공격했다. 모두 사실을 찾으려 한 ''였다. 사람들은 실은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경우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화나게도 한다. 자기에게 좋으면 '사실'이고 아니면 '거짓'이라고 한다. 대중이 솔깃해하는 '사실'은 허구인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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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목말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시피 한 '사실'은 그러나 결국 사회와 국가와 역사를 움직인다. '사실'과 다른 길을 가는 나라가 맞을 결과는 명백하다. 지금 미국 쇠고기 안 먹는 사람 없고, 사드 전자파 두려워하는 사람 없고, 천안함 폭침 안 믿는 사람 거의 없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투에서 패할 수는 있어도 전쟁에서 지는 법은 없다. 모두가 반기지 않아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이 '사실'을 찾는 일은 힘들지만 보상도 없다. 그래서 언론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사명(使命)이자 숙명(宿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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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조선일보에 대한 소망은 '조선일보에 났으니 마음엔 안 들어도 사실은 사실일 것'이라고 독자들이 믿는 신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못 미칩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1㎝씩이라도 나아가려 합니다. 창간 100년 아침에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입니다.


-양상훈 주필, 조선일보(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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