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통일의 파트너'
北의 적반하장 대응, 東獨 호네커서 실마리 찾아야
'독 묻은 사과' 같은 교류 확대… 김정은 응하지 않을 것
북한은 이번에 더 화끈했다. 지난해 판문점 선언 1주년
때는 공동 기념행사를 갖자는 우리 측 제안에 "자중하라"고
나무라기만 했다. 그런데 선언 2주년을 맞은 올해엔 남쪽을
향해 총질을 했다. 그것도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간 철도 연결과 실향민 상호 방문, 이산가족 상봉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뒤였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무시·욕설·조롱으로 응수하고
미사일을 쏘아 댔다. 자꾸 반복되다 보니 이런 의문이 든다. '저런
제안들, 북한 김정은의 의중은 알아보고 하는 걸까.'
북이 뭐라 하든 이 정부의 대북 퍼주기 행보엔 흔들림이 없다. 그 근거로 서독의 동방 정책
성공을 든다. 1969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 정책은
'접근을 통한 변화'란 기치 아래 동독에 철도·도로·운하를 건설해 주고 막대한 현금을 쏟아부었다. 심지어 동독 정부 빚보증까지 섰다. 그래서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정부가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동독 최고 지도자 호네커가 퍼주는
브란트를 몹시 증오했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돈이 필요했던 호네커는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과 상호
교류라는 브란트의 상호주의 원칙을 수용했다. 서독의 동방 정책이 체제를 허무는 독 묻은
사과임을 간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결과, 동·서독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가 놓였고, 많을 땐 한 해 700만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다.
동방 정책의 맛을 본 동독인들은 호네커를 혐오하고 브란트에 열광했다. 독일 분단 시절 베를린
주재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스마이저 전 조지타운대 교수는 저서 '얄타에서 베를린까지'에서 호네커가 이런 이유로 브란트를 싫어했으며, 동독 스파이를 브란트의
비서로 심었다가 들통나게 함으로써 그를 총리직에서 몰아낸 게 확실하다고 증언했다.
우리도 북한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실향민끼리 상호 방문하고, 봄이면 남으로 꽃 구경 오는 북쪽 동포들에게 한 아름 선물을 안겨 돌려보내고 싶다. 하지만 동독 해체의 역사를 잘 아는 김정은이 여기에 응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 싱크탱크 스트랫포 CEO를 지낸 조지 프리드먼은 저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서문에서 남북 관계가 교착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이유를 이렇게 적시했다. '한국과의 화해가 북한에 아무리 솔깃한 선택지라 해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 한국과의 화해는 북한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지만 바로 그 이익이 북한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 통일의 파트너로 믿어 의심치 않는 북한은 그의 상상 속에만 있을 뿐, 현실에는
없다. 반면 북한은 냉철하다. 자기들보다 수십배
잘 살고 세계 최강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은 대한민국에 맞서 김씨 왕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국가 전략이 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태영호·지성호씨가 김정은의 생사를 못 맞혔다고 질타만 할 게 아니라 북한 체제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자신들의 맹목부터 걷어내야 한다.
미국을 남북 화해의 훼방꾼으로 보는 시각도 버려야 한다. 브란트는 동방 정책의 세부 사항까지
미국과 사전 조율해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런 공조는 미국과 서독이 같은 민주적 지향을 지닌 가치 동맹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란트에 이어 총리가 된 헬무트 슈미트가 잘 설명했다. "자유·정의·인간 존엄 등은 독일과 미국의 우의와 연대의 근간을 이루는 공동 가치요 원칙이다. 우리는 맹방이기 때문에 같은 이념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이념을 가졌기에 맹방이고, 동일한 도덕적 기준을 지녔기에 맹방이다."
-김태훈 논설위원·출판전문기자, 조선일보(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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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귀환'이 그렇게 반갑나
김정은 사망설에 대한 과도한 공격,
김정은의 등장에 대한 과도한 반색,
국가채무 확대에 대한 과도한 주장,
공통의 이유가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일 만에 나타나자 청와대와 민주당은 야당을 향한 공격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김정은 사망설을 제기한 사람들에 대해 "무책임한
발언" "거짓 선전·선동" "관종(관심종자)임을 입증"
"국가적 화를 부를 수 있는 심각한 안보상 위해" 등 준비된 듯한 비난을
쏟아냈다. 그들이 탈북민이란 이유로 "공산주의에
평생 충성했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한 과잉스러운 충성"이란 주장도 했다.
정권 핵심부의 진짜 속내는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재정 경기교육감의 반색이 직설적으로 대변했다고 생각한다. "비료 공장 준공식에 김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식량과 인민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며 평화의
길로 가겠다는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북한군이 한국을 향해 고사총을 발사하고
북한 매체가 "남조선 당국의 죄악은 무엇으로써도 가리울 수 없다"고 공격해도 침묵했다. 김정은의 잠적쇼를 무조건 평화의
메시지로 읽겠다는 정권의 확고한 자세는 야권 인사들의 김정은 사망설보다 훨씬 '무책임'하고 훨씬 '심각한 안보상 위해'를
줄 수 있다.
북한이 깜짝쇼를 비료공장에서 연출한 것은 상징적이다. 한국에 대한 북한의 비료 의존율은
한때 70%에 달했다. 북핵(北核) 문제로 지원이 끊어진 뒤 북한이 내세운 목표가 '비료 100만t, 알곡 1000만t 생산'이다. 식량 생산은 비료 생산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비료 자립은 정권 안보에
중요한 식량 조달 문제에서 한국 의존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북한이 추진하는 핵심 사업이
비료 생산 공정에서 수입 석유를 대체하는 석탄 가스화와, 북한에 다량 매장된 인회석을 활용한 인비료
공장 건설이다.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서 이뤄진 '왕의 귀환'은 한국을 향한 고사총 도발과 더불어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북한 비료공장엔 역사적 상징성도 있다. 체제 모순이 유발한 경제 실패를 상징하는 대표적
산업이란 점이다. 일제가 북한에 남긴 화학비료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74만t에 달했다. 48만t을 생산한 흥남 비료공장은 당시 세계 둘째였다. 북한은 이 적산(敵産)을 확장해 1980년 300만t이 넘는 생산능력을 구축했으나 그 후 몰락을 거듭했다. 지금 생산능력은 일제 강점기 수준에도 못 미친다. 한국은 분단 직후
북한의 공급 중단으로 비료를 전량 수입해 겨우 먹고살았다. 그런 한국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비료를 퍼주면서 북한 동포를 먹여 살렸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도 이보다 극적이지 않다.주식보다 쉬운 투자 FX시티
북한
비료산업이 몰락한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이 정치·경제적 고립을 선택하면서 에너지와 원료난 때문에 생산
시설을 돌릴 수 없었다. 공장은 점차 고철로 변했다. 충격은
농업 정책에서도 왔다. 농지 집단화와 곡물 배급제도, 다락밭이
상징하는 '주체 농법' 강요로 국토가 황폐화했다. 농업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북한 경제의 몰락은 전적으로 체제(體制) 탓이다. 체제가
그대로인 한 비료공장을 아무리 더 지어도 김정은 역시 할아버지·아버지와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체제를 바꿀 수도 없다. 왕조의 몰락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잠적 소동을 전후해 한국에선 재정 논쟁이 전개됐다. 코로나 경제 대책을 위해 정부가 떠안을 수 있는 빚의 한도를 둘러싼 논쟁이다.
여권에선 GDP 대비 60% 이상 대폭 확대를
주장한다. 반대하는 쪽에선 지금 부채를 확대하면 미래 세대가 고령화에 따른 복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숨겨진 또 하나의 중요 쟁점이 있다. 4년
전 정부가 국가채무비율의 법적 한도를 45%로 잡았을 때 복지 비용과 함께 통일 비용을 이유로 들었다. 한국은 특별한 리스크가 있으니 재정에 더 엄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60% 대 45% 논쟁은 단지 재정 논쟁이 아니라 통일 논쟁이다. 여권 주장대로 부채를 크게 늘려 통일의 물적 토대가 허물어졌을 때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김정은 정권을 연명시켜 통일을 미루거나 피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문재인
정권의 재정 확대 주장엔 그런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은 사망설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김정은 귀환을 과도하게 반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CNN 보도 이후 열흘 동안 이어진 일들은 헛소동이 아니다. 김정은의 딜레마와 김정은 이후
한반도 통일 문제를 모처럼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 정권이 '김정은 이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의미라면
의미일 수 있겠다.
-선우정 부국장, 조선일보(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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