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콤플렉스 ‘노무현 신드롬’
현 정부 역대급 ‘내로남불’ 배경엔 진보 자부심·열등감 깔려
노무현 死後 진보는 분열 방지하고 패거리 윤리 의식 공고화
국민 통합 달성한 대통령이 후세 호평…문 대통령은 명심해야
나는 보수이지만, 한때 진보였다. 진보 정당 후보로 총선에 나간 적도 있었다. 양쪽을 다 좀 아는 사람의 시각으로 극도로 대립적인 현 시국을 한번 분석해 본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보수가 전체적으로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 그것은 다 아는 대로 너무 노골적인 정권의 저 ‘내로남불’ 때문이다.
그 ‘내로남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진보 콤플렉스’이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 신드롬’이다. 먼저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한 인간의 마음속에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모순적 두 감정이 같이 존재할 때 생기는 마음 상태다.

진보에게는 태생적으로 자부심이 있다. 그것은 약자를 돕는 착한 일을 한다는 뿌듯함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주 우월감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와 함께 대부분의 진보에게는 일종의 열등감도 있다. 그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진보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강자인 보수와 오랜 투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진보는 거의 50년 투쟁하여 간신히 집권했다. 그러나 그 집권 기간은 72년 헌정사의 5분의 1, 13년에 불과하다. 이런 긴 약자의 여정이 진보에게 일종의 피해 의식, 열등감 같은 것을 생성시킨 면이 있다.
이 두 가지 의식, 즉, ‘자부심’ ‘우월감과 피해 의식’ ‘열등감’이 합쳐진 결과가 바로 진보 콤플렉스이다. 진보 콤플렉스는 전형적으로 두 가지 현상을 낳는다. 하나는 과도한 ‘자기 정당화’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내 편 의식’이다. 진보에게는 대부분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그 정도쯤이야…'라는 강한 ‘정당화 의식’이 있다. 그와 함께 그 진보 콤플렉스를 공유하는 동료 진보에 대한 강렬한 ‘내 편 의식’을 갖는다.
물론 보수에게는 보수대로 약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공동체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척 잔인해지는 것이다. 삼청교육대 같은 걸 만든 전두환의 만행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이 진보 콤플렉스만으로는 진보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저 과도한 ‘내로남불’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같은 진보인데도 DJ, 노무현 정권은 그렇게 ‘내로남불’ 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는 ‘노무현 신드롬’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다. 그는 그 어느 대통령보다 이상주의자였다. 지역 감정 해소 등 이상을 향해 누구 못지않게 자신의 몸을 던졌던 사람이다. 그의 극적인 자살은 대한민국 진보들에게 두 가지 의미 있는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는 분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치하에서 우리 진보는 극적인 분열을 경험했다. 급기야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까지 가는 등 분열의 결과로 진보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50년 투쟁으로 얻은 정권을 이렇게 날리다니' 이 거대한 통탄은 그들에게 절체절명의 하나의 자각을 주게 되었다. ‘절대 분열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이 조국 사태 등에서 나타난 진보의 그 과도한 ‘내 편 의식’의 원천이다.
둘째는, 모든 진보에게 광범위한 일종의 ‘윤리적 사면 의식’을 넣어 주었다. 다 아는 대로, 노무현에게는 그의 순수한 정의 의식만큼 어두운 그림자들이 있었다. 바로 재임 중 각종 수뢰 의혹들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 친인척이 받은 수뢰 건은 6~7개나 된다. 500만달러짜리도 있었다. 이 혐의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그는 가 버렸다. 그의 자살이 준 감성적 여파는 참으로 대형 허리케인급이었다. 500만명을 훌쩍 넘는 시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조문함으로써 역대 김구, 김수환 추기경, 박정희의 그것을 다 추월했다.
이를 두고 어떤 평론가는 대한민국에 ‘정치적 성인’이 탄생한 것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폭풍과 그 이후 전개된 상황을 보고 이 평론가는 노무현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다 안고 간 예수의 그것에 비유했다. 노무현이 진보의 모든 ‘허물’을 다 안고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진보들에게 일종의 전면적 ‘사면 의식’, 자신감 같은 걸 주었다는 것이다. 진보의 저 자신만만한 ‘내로남불’은 노무현이 제공한 그 ‘대속 심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봤을 때 진보 정권의 저 ‘내로남불’은 한마디로 ‘구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갈 것이다. 참으로 우려할 사항이다. 왜? ‘내로남불’식 정의의 유린은 반드시 심각한 국민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공영 방송 CSPAN은 전문가 100명을 동원해 약 10년 만에 한 번씩 40명 정도 미국 역대 대통령을 평가하여 등수를 매긴다. 재미있는 건 조사위원이 매번 상당히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세 번의 조사에서 최상급자와 최하위급자가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하위 등급에 속하는 대통령에게는 모두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국민을 심하게 분열시켰던 대통령이었다. 반면 국민 통합을 이룬 링컨은 모든 조사에서 압도적 1등이다. 평가자들은 1929년 대공황을 일으킨 후버 대통령의 죄보다 국민을 분열시킨 대통령의 죄를 더 중대하게 보았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독재 정권이 아니면서 보수·진보 중 한쪽으로부터 지금같이 이렇게 혹독한 미움을 받는 대통령은 기억이 없다. 내가 보기에 이 미움은 전두환 재임 시 그에 대한 진보의 미움을 능가하는 것 같다. 지역 감정을 없애기 위해, 즉 ‘국민 통합’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딴 신드롬이 이렇게 국민을 분열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이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임기가 1년여 남은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정말 역사를 생각해야 할 때다. 자신이 역사에 의해 어떤 지도자로 평가될 것인지. 국민의 대통령이었는지, 한 정파의 보스였는지를 역사는 심판할 것이다.
-전성철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 회장, 조선일보(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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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기우제’ 부동산 정책
부동산發 불평등론 집착은 ‘자기 집’ 바라는 서민 욕망 간과
지난 3년여 동안 무려 23차례에 걸친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또한 정책 효과에 대한 거듭된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이 체감하는 주택난과 주거 불안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서울의 아파트값은 52% 올랐고 평균 매매 가격 역시 처음으로 10억 원을 넘었다. 주택 소유 여부에 따른 자산 격차가 심화하는 가운데 가을 이사철을 맞은 서민들은 목하 미증유의 전세대란을 치르고 있다. 난데없는 주택 경매시장 호황 소식은 다른 말로 중산층이 무너지는 소리다.

전세 품귀와 전셋값 폭등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18일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 내 부동산에 매물 정보란이 텅 비어 있다./연합뉴스
인류 역사에서 주거 생활은 태곳적부터였지만 ‘주택 문제’의 발단은 근대 이후다. 산업화 및 도시화 과정에서 선진국 대부분이 주택 문제로 심한 홍역을 치렀고,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장하는 젖줄이 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주택 문제를 둘러싼 사회 갈등을 비교적 적게 겪었던 예외적 사례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을 제외하면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대규모 도시 폭동이 거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주택난에 직면한 유럽의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시절,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화두를 던지며 아파트의 대량생산·대량공급에 앞장섰다. 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주거 철학에 조응하여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은 민간 주도·정부 지원 방식을 통해 ‘아파트 공화국’의 길로 들어섰다. 이는 당대 도시민들의 주거 안정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막는 중산층 방어벽이 되었다. 또한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 가구 건설은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의미가 매우 각별했다(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고도 성장기 대한민국의 주택 정책에 물론 부작용도 있었고 역효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후발 개도국에 만연하고 있는 ‘도시화=슬럼화’ 공식이 과거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도 우리나라 주택 가격이 유난히 비싼 것은 아니다. 주택 가격은 국민 소득에 비례하는 법이다. 투기 세력이나 다주택자 역시 한국의 특산품은 아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셋방살이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소유로,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싼 동네에서 비싼 동네로 옮겨가는 부동산 사다리가 그런대로 작동해 왔다. 적어도 노무현 정부 전까지는 말이다.
진보·좌파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주택 정책은 이념의 늪에 빠졌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부동산 문제에서 찾는 탓에 주택시장 상위 계층에 대한 증오 프레임과 징벌 테크닉이 속출했고, 결과적으로는 주택 정책 자체가 강남 부자 죽이기로 축소되었다. 집은 ‘사는(買) 것’이 아니라 ‘사는(居) 곳’이라는 목가적 주거 담론이 민심을 현혹했으며, ‘1가구 1주택 실거주’라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경제 원리가 표심을 자극했다. 그사이 정작 이러한 반시장적 주택 정책의 주역들 상당수는 신기득권 ‘강남 좌파’로 슬며시 둔갑했다.
노무현식 부동산 정책 시즌 2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미래 세대다. 문재인 정부의 주택 정책에 가장 불만을 가진 세대도 30대이고, 최근 주택 구매가 가장 활발한 세대 역시 30대이다.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는) 방식으로 이들이 ‘패닉 바잉’에 나서는 것은 주택 소유의 가치와 효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서울 은평구 소재 빌라 한 채를 어렵사리 장만한 동기를 어느 평범한 시민은 ‘자유’와 ‘안심’에서 찾았다. 내 집이 생기니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도 했다(강병진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을 것이다.
‘자기만의 집’은 주체적 개인의 출발로서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다. 가산(家産)은 자유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일 뿐 아니라 남북 대결에서 체제 우위를 지키는 확실한 담보다.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집을 갖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주택 정책은 없다. 주거 약자를 위한 복지 설계는 적기적소(適期適所)에 ‘굵고 짧게’ 집중하고, 대신 일반 국민들의 주거 자립이 예측 가능한 부동산 사다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반기업·반시장 정책을 거두어 경제 전반의 활력을 늘리는 게 우선이요 상책이다.
지금의 주택 정책은 ‘인디언 기우제’를 닮았다. 23번이 아니라 230번, 2300번쯤 정책이 바뀌면 성과가 날지 모른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면 언젠가 비가 오긴 오는 원리다. 하지만 그때쯤 사람들은 도대체 왜 기우제를 지내는지도 모를 것이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조선일보(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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