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 반기는 곳은 북중러뿐
‘2020 국방백서’의 한 부분.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과 고노 다로 전 일본 방위상이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만나 양국 국방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군이 2일 내놓은 ‘2020 국방백서’에 대한 일본 정부와 언론의 관점은 달랐다. 일본 정부는 이날 주일 한국대사관 무관을 초치해 독도 영유권과 일본 초계기의 근접비행 관련 부분에 대해 “일본 입장과 다르다”며 반발했다. 하루 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도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 수출관리 수정, 레이더 문제 기술 등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에 대해 곧바로 항의했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을 ‘동반자’에서 ‘이웃국가’로 격하시키고, ‘북한은 적’이란 문구를 올해도 뺐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일본을 보는 한국 정부의 시선이 점차 차가워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양국 관계의 냉각을 반영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상호적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지난달 시정방침 연설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국가”라고 표현했다. 1년 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한국은 원래 기본적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라고 한 것에서 후퇴했다. 한국 정부가 국방백서에서 일본을 동반자가 아니라 이웃국가라고 표현한 것은 일본의 이 같은 격하에 대응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한일 간에 서로 격 낮추기가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이후 더 심해진 것 같다. 일본은 2017년 외교청서(한국의 외교백서)에서 ‘한국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라고 규정했으나 2018년과 2019년 이를 삭제했다. 지난해에는 ‘한국은 일본에 중요한 이웃국가’라는 표현에 그쳤다. 한국 외교백서에서도 일본의 중요성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이처럼 양국이 서로의 전략적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사이 북한, 중국, 러시아가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2019년 7월, 중국과 러시아의 군용기는 한일의 방공식별구역을 넘나드는 도발을 했다. 한일 간의 약한 고리를 파고든 것이다. 한일이 삐걱거릴수록 북핵 대응을 위한 한일, 한미일 공조에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요즘은 한국 기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인다”고 했다. 지난달 한국 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이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뉘앙스의 발언을 한 데 대해 기대를 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외교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양국이 해결에 적극 나선다면 서로 격을 올려주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동아일보(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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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엔 고짓센’ 연습하는 재일교포
정권이 부추겨 온 反日에 “생사 걸렸다” 불안감 커져
민주당은 선거 다가오자 다시 ‘한·일戰’ 선동 나서
도쿄에서 알게 된 A씨. 재일교포 2세다. 일본에서 태어나 사업을 하며 60여 년을 살았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일본어가 완벽하다. 문재인 정권 출범 후 한일 간 ‘총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자 이런 얘기를 한 게 머리에 박혔다.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서 ‘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 발음이 진짜 일본 사람 같은지 점검해 본다.”

일본에서 혐한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 /트위터
일본 돈 15엔 50 전을 의미하는 주고엔 고짓센. 여기엔 일제 시대 한국인의 생사를 갈랐던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1923년 10만명 이상 사망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살인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군·경과 자경단이 광기(狂氣)를 번뜩이며 날뛰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주고엔 고짓센을 말해 보라고 윽박질렀다. 어색한 일본어가 튀어나오면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다. 6000명 이상의 한국인에 대한 인종 학살이 역사에 기록돼 있다.
“설마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겠느냐”며 반문하자 그가 정색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면 10년 후 나 같은 자이니치(재일교포)들은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도쿄의 회사에 근무 중인 재일교포 3세 여성 B씨. 일본인과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가 있다. 한일 관련 좋은 뉴스를 듣기 어려운 요즘 아이들이 ‘한국계 엄마’ 때문에 차별받지 않을지 걱정한다. “잠시 있다 가는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늘 머리 한쪽 구석에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심정을….”
2018년 징용 배상 판결에 이어 올 초 위안부 배상 결정으로 한일 관계가 나락을 향해 다시 추락하고 있다. 올해 중의원 선거를 앞둔 자민당은 보복 조치를 공개적으로 요구 중이다. 양국을 들끓게 했던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가 언제 발동됐던가. 2019년 7월 참의원 선거 20일 전에 전격 시행돼 혐한 분위기가 확산한 것을 기억하는 교포들이 많다.
기댈 곳이 없는 재일교포들은 조금씩 동요하고 있다. 100만 교포를 대표하는 민단(民團)의 중앙 본부 단장이 신년회에서 “최근의 상황은 재일교포의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라고 한 것은 상징적이다. 민단은 지난해 지방 본부에 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졌던 사건에 대해 유사 사태를 우려해 쉬쉬하고 넘어갔다.
기자는 자신의 일본어 발음을 점검해보는 A씨의 불안이 기우(杞憂)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회가 거리낌 없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던 야만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일본을 과도하게 때리면 어김없이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괴롭히는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오물덩어리 취급하며 반일 감정을 부추겨 온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재일교포의 불안지수는 매년 커져만 왔다.
그런 문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위안부 판결로 곤혹” “건설적, 미래 지향적인 관계 복원” 발언으로 기대감을 줬다. 하지만 불과 2주 만에 여당인 민주당이 다시 반일 감정을 들쑤시고 나섰다. 서울·부산 시장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공약하자 “4·7 보궐선거도 한일전이 되려나” “친일 DNA 발동” 이라며 느닷없이 일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당 지도부까지 버젓이 방송에 나와 반일을 부추기는 것은 대통령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반일과 혐한이 동전의 양면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안다면, 일본에 사는 동포들이 다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런 식의 저질(低質) 정치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에서 대통령 신년 회견 이후 생겼던 작은 기대는 빠르게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조선일보(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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