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배워야 할 70년 전 외교 혜안
한반도 운명 가른 한·미동맹, 벼랑끝서 지도자 신념으로 쟁취
지금 대선판엔 저질 공방만… ‘정글’ 헤쳐나갈 식견 있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식화하면서 곳곳에서 포성과 폭발이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24일(현지시간) 폭격에 인한 폭발로 불타고 있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일대./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국내에서 국제정치 관심도를 높인 건 여권(與圈)의 ‘공(功)’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에 강대국이 무력 공격으로 영토 변경을 시도하는 현 사태는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온 국제 질서의 근간을 허무는 대형 사건이다. 한반도에 시사하는 바도 매우 크다.
여권 인사들은 애초에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껏 착안한 것이 ‘무식한 아마추어 대통령=전쟁 난다’ 프레임을 만들어 대선판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상대 후보 깎아내리기 위해 피해국 정상을 조롱하다 국제 망신을 자초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저질 선동이 논란을 키우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의 배경과 함의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미국 등 서방의 병력 지원 없이 외롭게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냉혹한 국제 안보 질서 속에서 ‘동맹’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안보 동맹끼리는 한쪽이 무력 공격을 당할 경우 다른 한쪽도 자국의 안전이 위협당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처하게 된다. 그 존재 자체가 전쟁을 억지하는 강력한 보험이다. 최강 전력의 미국이 뒤에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동맹이 모든 안보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키는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미국과 조약 동맹을 맺은 나라가 전면적 침략을 당한 적은 없다. 미국의 핵우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안보 보호를 받으며 경제 발전을 이뤘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도 키웠다. 한국은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성공한 케이스다. 한미 동맹과 수만 명의 주한미군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우크라이나보다 먼저 강대국 지정학 패권 싸움의 희생양이 됐을 것이다. 미국의 핵우산이 펴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자강(自强) 논의도 한미 동맹과 함께한 70년간의 평화가 없었다면 아예 시작될 수 없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한미 동맹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70여 년 전 한국은 미국의 동맹 고려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2차 대전 후 미 국방부가 병력 재배치를 위해 각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했는데 한국은 대상 국가 16곳 중 10위 밖이었다. 6·25를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을 붙잡아 상호방위조약에 도장을 찍게 만든 건 이승만 대통령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승만은 반공 포로 석방 같은 극약 처방으로 미국과 얼굴을 붉히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으며 끈질긴 투쟁으로 이를 쟁취했다. “대한민국 번영이 튼튼한 안보 위에서만 가능하며, 그 안보의 핵심은 미국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당시는 체제 경쟁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럽던 시절이다. 변변한 통신 시설도 없던 그때, 제한된 정보 속에서 지도자가 국제 정세를 정확히 꿰뚫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국운(國運)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53년 3월 9일, 타임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초상화 아래에는 “자유의 뿌리는 깊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지금 다시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정글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다음 전장(戰場)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중국 외교관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이번 사태의 교훈은 약한 사람은 절대로 강한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든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전 세계 뉴스·정보뿐 아니라 전쟁 상황까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고급 분석도 넘쳐 흐른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국가가 됐다. 이런 시대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안목과 식견은 70년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선거판에서 보여지는 낯 뜨거운 모습이 전부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임민혁 기자, 조선일보(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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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푸틴의 귀띔 못 받았을까
[오늘과 내일]
외교원칙 훼손하며 ‘공모자’ 낙인찍힌 중국
침공 경고 묵살해 자국민 위험에 방치했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신생 중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다자외교 무대였다. 이런 중국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가만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홍콩 카이탁공항의 직원을 매수해 중국 대표단이 탄 비행기에 폭탄을 심었고, 외교관과 기자 11명이 공중 폭발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에 저우언라이 총리는 없었다. 어디선가 위험 첩보를 전달받고 다른 비행기를 탄 덕분이었다.
냉전기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 회의에서는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의심, 적대적 기류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연단에 오른 저우는 준비한 메모를 치워놓고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중국 대표단은 공통점을 찾으러 온 것이지, 불일치를 만들러 온 게 아닙니다.” 대만 문제 같은 분열적 이슈도 피했다. 박수가 간간이 터져 나오더니 연설을 마칠 땐 참석자들이 기립 박수로 환호했다.
당시 저우가 제시한 것이 ‘평화공존 5원칙’(주권·영토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이다. 이 5원칙은 반둥회의가 결의한 ‘평화 10원칙’의 골간이 됐고, 오늘날까지 중국이 말끝마다 내세우는 외교의 기본 원칙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매력외교’를 펴던 가난한 신생 국가에서 세계 패권을 노리는 강대국으로 변신한 지금, 중국이 표방해온 외교 원칙은 한낱 외교적 수사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국 외교를 시험대에 세웠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달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브로맨스’를 과시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장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미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병력을 배치해 놓은 푸틴의 전쟁 명분에 대한 공개적 지지였다. 그 보답이었을까. 푸틴은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초반 조지아를 침공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올림픽이 끝나길 기다렸다.
중국도 푸틴의 도발을 놓고 꽤나 고심한 듯하다. 푸틴이 베이징을 떠난 뒤 시진핑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 외신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비공개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그래서 나온 결과는 원칙과 이익의 기괴한 조합이었다. 중국은 ‘주권과 영토의 존중’을 내세우면서도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이해한다”며 주권 유린을 묵인했다. 반미(反美) 연대를 위해 원칙의 훼손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은 러시아의 침공에 전혀 대비돼 있지 않았다.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 준비에 관한 비밀정보를 여러 차례 전달했지만 중국은 번번이 묵살했다. 오히려 미국의 경고를 ‘긴장을 부채질하는 가짜뉴스’라고 비판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주재 중국대사관은 갈팡질팡했다. 각국이 자국민 철수에 나섰지만 중국은 막판까지 머뭇거리다 그 시기를 놓쳤다. 오성홍기 부착을 권고했다가 이틀 만에 신분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이런 한심한 대응은 시진핑이 과연 푸틴의 속내를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침공의 공모자’라는 낙인까지 찍히면서 러시아를 감싸는 중국의 태도를 볼 때 푸틴이 귀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푸틴이 조지아 침공과 크림반도 병합 때처럼 속전속결의 국지적 작전이라고 얘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였든 중국은 책임 있는 대국의 자격을 잃었고, 자국민 안전조차 챙기지 못한 비정한 외교는 두고두고 지탄받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동아일보(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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