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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여성 교향악단의 전쟁터] [戰場의 음악회] ....

뚝섬 2023. 5. 16. 08:13

[우크라이나 여성 교향악단의 전쟁터]

[戰場의 음악회] 

[200만 餓死시킨 獨 봉쇄, 이 교향곡 공연 못 막았다]

 

 

 

우크라이나 여성 교향악단의 전쟁터

 

러시아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870여 일간 이 도시를 봉쇄해 시민 100여 만명이 굶어 죽었다. 시민들이 항전을 이어가자 이 도시 출신인 쇼스타코비치교향곡 7레닌그라드 작곡을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라디오교향악단이 곡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연습을 시작했지만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 때마다 연주를 할 줄 아는 군인과 시민들이 대신 악기를 들었다. 1942년 8월 9일, 목숨과 맞바꾼 곡이 마침내 울려 퍼지자 시민들은 눈물을 쏟았고, 세계는 나치의 만행을 규탄했다.

 

▶예술가에게도 싸워 지켜야 할 조국이 있다. 자원 입대한 쇼스타코비치가 소방 부대에 배속되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불타는 소련 도시를 배경으로 그가 소방 모자를 쓴 모습을 표지로 제작했다. 음악으로 전쟁의 불을 끄고 싶어 했던 작곡가의 염원을 그렇게 응원했다. 80년이 흐른 , 이번엔 러시아가 침략자가 됐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예술가가 러시아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필하모니도 그중 하나다. 남성 단원 대부분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여성만으로 교향악단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 여성들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 젤렌스카 여사와 함께 조선일보가 개최하는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15일 내한했다. 연주회는 17일 서울에서 열린다.

 

▶체르니우치 필하모니가 내한하기까지 여러 난관을 뚫어야 했다. 때론 목숨마저 위험했다.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에 있는 체르니우치에서 서울에 오려면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거쳐야 했다. 평소 같으면 차로 7시간이면 도착할 바르샤바까지 폭격 위험이 덜한 시간을 골라 조금씩 이동하느라 이틀이 걸렸다. 수도 키이우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부 단원도 “서울행에 동참하겠다”며 위험을 무릅썼다.

 

▶2차대전 당시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규탄하는 세계 여론을 일으키려 부심했다. 세계 주요 국가에 교향곡 ‘레닌그라드’ 악보를 내보낸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치 독일이 훼방 놓자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막을 우회, 감시망을 뚫었다. 런던 초연에 이어 뉴욕과 보스턴 등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60회 넘게 연주되자 소련을 돕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음악은 부드럽지만 그 속에 담은 염원은 강철처럼 단단하다. 체르니우치 필하모니의 여성 음악인들이 온갖 난관을 뚫고 서울에 이유도 음악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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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場의 음악회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1992년 5월 어느 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 한복판에 적국 세르비아 민병대가 쏜 포탄이 떨어졌다. 빵을 사려고 줄 서 있던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발 다음 날, 텅 빈 거리에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첼로를 꺼내 들었다. 사라예보 필하모닉 소속의 이 연주자는 폭격의 잔해 속에서 첼로를 켰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포격은 중단됐다. 건물 곳곳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저격수들도 그를 쏘지 않았다. 연주는 22일간 지속됐다.

 

▶옛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15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 가운데 교향곡 7번은 ‘레닌그라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이 도시를 870여일간 봉쇄하는 바람에 100만명 넘게 아사한 비극의 도시이기도 하다.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그곳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가 나치에 맞서 싸우는 고향 동포들에게 바친 곡이다.

 

▶당시 교향곡 연주는 레닌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이 맡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단원들이 리허설 도중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시민과 군인이 빈자리를 채웠다. 봉쇄가 한창이던 1942년 8월 9일, 마침내 전쟁터 한복판에서 곡이 연주됐다. 포연 속에 울려퍼지는 연주를 들으며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곡을 감상했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은 우리가 겪은 교향곡이다.”

 

나치 희생자였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이번엔 우크라이나인들이 악기를 들었다. 수도 키이우에선 키이우 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며칠 전 독립광장에서 야외 콘서트를 열었다. 독립광장은 2014년 유럽연합(EU) 가입을 갈망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친러 성향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한 역사적인 장소다.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선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전투가 없을 때면 총 대신 악기를 들고 전란에 휩쓸린 주민들을 위로한다.

 

교향곡 ‘레닌그라드’ 악보는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나치의 봉쇄를 뚫고 서방에 전해졌다. 전 세계가 그 곡을 연주하고 듣는 것으로 침략자를 규탄했다. 전쟁 동안 미국에서만 62회나 연주됐다. 지금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우크라이나 접경 도시에서도 반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음악 소리가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음악은 부드럽지만 그 안에 담긴 평화를 향한 염원은 강철처럼 단단하다. 푸틴이 그 선율을 끝까지 외면했다간 파멸당한 나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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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餓死시킨 獨 봉쇄, 이 교향곡 공연 못 막았다

 

히틀러가 봉쇄한 레닌그라드, 872일 버텼지만 인구 250만→57만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작곡… 시민들, 배급표 모아 입장권
아내 묻고 온 연주자, 공연 직전에도 3명 사망… 객석은 꽉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도 특히 화려한 도시로, 세계의 여행객들에게 매력적인 방문지로 손꼽힌다. 흔히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부르듯이 많은 운하와 그 위에 놓인 각양각색의 다리, 물 위에 떠 있는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환상적이다. 이 멋진 장소에 섰을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이 80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1941년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였다. 독일과 소련의 전투는 제2차 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소련의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서 무려 2700만 명이었다. 독일의 북부집단군과 동맹군은 146개 사단, 400만 명의 병력으로 당시의 이름인 레닌그라드로 돌진했다. 독일군은 순식간에 도시를 포위하고 외부와 차단했다. 전쟁사에서 가장 긴 872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히틀러 사령부는 영양학자를 불러 봉쇄된 레닌그라드의 식량 상황을 분석했다. 학자는 곧 아사(餓死)자가 생길 것이라고 예견하며 굳이 공격으로 장병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즉 올가미 속에서 시민들이 굶어 죽기를 기다렸다.

레닌그라드시는 제한 배급을 실시했다. 하루 배급량은 노동자는 빵 500g, 그 외는 250g이었다. 포위가 길어짐에 따라서 양은 점점 줄어갔다. 겨울이 다가오자 아사자가 속출했다. 사람들은 벽지를 뜯어서 끓여 먹었고 혁대와 가방을 먹었다. 말이 죽으면 고기가 뜯겨갔고 거리에서 개와 고양이가 사라졌다. 심지어 인육을 먹는 경우마저 생겼다. 레닌그라드는 죽은 자의 도시가 되었다. 눈에 파묻힌 버스 안에 죽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결코 문을 닫지 않았던 도서관을 찾아 사람들은 마지막의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책을 읽었지만, 열람실에는 책을 펴놓은 채로 굶어 죽은 사람이 늘어갔다.

 

①1942년 8월 9일 당시 소련 레닌그라드 필하모니홀에서는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크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의 공연이 열렸다. ②독일군 봉쇄로 200만명이 굶어 죽은 레닌그라드의 볼코보 묘지에 시신들이 끊임없이 실려오는 모습. ③1943년 초 독일군 봉쇄를 뚫은 소련군 병사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돌베개 제공

 

그런 레닌그라드에 소련 최고의 작곡가가 있었으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였다. 전쟁 전부터 스탈린의 억압과 검열로 죽음의 불안 속에서 고통받던 예술가였다. 그는 공습과 기아 속에서도 작곡을 계속하였다. 이 비극 속에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가 작곡됐다. 그 사실을 모스크바의 지휘부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그 곡이 필요했다. 소련 공군은 수송기를 이용해 그를 빼냈다. 쇼스타코비치는 후방 도시인 쿠이비셰프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악보를 완성했다. 악보는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미국과 영국으로 보내졌고, 뉴욕과 런던에서 공연되어 연합국의 전의(戰意)를 북돋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그라드 공연이었다. 인쇄된 악보가 레닌그라드 상공에서 던져졌다.

악보를 손에 넣은 레닌그라드에서 오케스트라를 꾸렸지만 단원들은 거의 다 죽어 모인 사람은 15명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군악대에서 연주자를 차출했다. 악기를 들기도 힘든 시체와 다름없는 악단이 꾸려졌다. 그럼에도 지휘자는 열정적으로 준비했다. 첫날은 관악기를 불 힘이 없어 15분 만에 연습을 마쳤다하루는 어떤 단원이 연습에 지각했다. 지휘자가 나무라자, 그는 "아내를 묻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그런 가운데 공연일이 다가왔는데, 연습을 시작했던 단원 중에서 3명이 공연 직전에 굶어 죽었다.

지금도 넵스키 대로에 있는 필하모니 홀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공연장이다. 전시인데도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배급이 125g으로 줄었는데, 굶주림을 선택하고 배급표를 모아 입장권을 구한 사람들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외출을 받아 기관총을 메고 왔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인육을 먹는 짐승보다 못한 생존에서 그들은 예술을 원했다. 한 줄기 음악은 그들의 시든 영혼에 빛을 비춰주었다. 공연은 라디오와 확성기를 통해 시내 전역에 방송돼 모든 시민이 '그들에게 바쳐진 교향곡'을 들었다. 다들 잠시 전쟁을 잊었다. 전선의 독일군도 들었다. 한 독일 장교는 "죽음을 앞두고 교향곡을 연주하는 그들을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났을 때 한 소녀가 지휘자에게 꽃다발을 바쳤다. 모두가 놀랐다. 굶어가는 와중에도 꽃을 심은 집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참할수록 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곡은 레닌그라드 시민의 유대감 결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았다. 얼었던 도시가 녹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수많은 시체가 드러났다. 하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거리를 말끔하게 청소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갈고 배추를 심기 시작했다. 이제 독일의 포위는 더 이상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었다.

히틀러의 영양학자는 배를 굶어도 절박한 영혼들의 연대성이 그들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놓쳤다. 위기에 시민들은 도망치거나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극한에서 뭉치며 비로소 같은 시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일상과 연대성의 중요함을 각인시켰다. 그들은 정체성을 지켰고 살아남았다. 250만 명이었던 레닌그라드 인구는 독일군이 물러갔을 때 57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 도시 에서 호사스러운 미술관과 성당의 명화나 보물만 찾아다니는 것만이 과연 그 시민들의 문화를 아는 것일까? 많은 방문객은 껍데기를 보고 다닌다. 다시 과거의 이름을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의 연대성이라는 최고의 정신 위에 세워진 위대한 문화의 도시다. 우리의 일천한 시야를 넓혀주고 위기에서 우리를 단합시킬 힘도 우리의 문화에서 나올 것이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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