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치유한 나라들]
[반일 죽창가가 심은 씨앗]
[정직하고 뻔뻔한 일본과 사는 법]
[어느 쪽이 친일이고, 무엇이 나라 망치는 매국인가]
[덕수궁에 喪服 입히면 克日이 되나]
[문재인 정부, 역사 전쟁에 불붙이다]
갈등을 치유한 나라들
"나치 만행 사과"… 獨 총리는 폴란드서 무릎 꿇어

①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추모지에서 2차 대전 중 나치가 행한 만행에 대해 무릎을 꿇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어요. ②영국은 아일랜드 식민 지배 당시인 1845년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외면했어요. 이후 아일랜드 독립운동때에도 많은 사람이 희생됐지요. 사진은 엘리자베스 2세(왼쪽)가 2011년 아일랜드를 찾아 아일랜드 독립운동 중 사망한 이들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모습. ③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모습이에요. ④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전 총리. /독일사회민주당유튜브·더텔레그래프유튜브·위키피디아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양국 국민뿐 아니라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어요. 러시아는 10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총 12곳에 미사일 공격도 감행했어요. 두 나라의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갈등을 넘어 화합의 길로 나아간 다른 나라의 역사를 알아볼게요.
엘리자베스 2세도 아일랜드에 사과
영국 서쪽에 있는 섬인 아일랜드는 영국령인 북부 아일랜드와 독립국인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이뤄져 있어요.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침략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했어요. 영국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구교도)를 성공회로 개종시키기 위해 아일랜드 북부에 영국 성공회 신자(신교도)를 이주시켰죠.
이로 인해 크고 작은 대립이 이어지던 중 1845년부터 약 7년간 아일랜드인의 주식(主食)이었던 감자가 대량으로 병들어 수확할 수 없게 되면서 대기근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영국인 지주들은 아일랜드인을 착취하며 곡식을 축적했죠. 아일랜드 사람 약 100만명이 죽어갈 때, 식민 통치 중이었던 영국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곡물의 수입을 막기까지 했다고 해요.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원망은 깊어졌어요. 그러다 1918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만들어 영국 신교도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그 결과 1921년 영국과 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돼 아일랜드 32주 중 남부 26주가 자치권을 얻고, 1949년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에 포함되지 못한 북아일랜드 6주에서는 신교도의 구교도 탄압이 이어졌어요. IRA의 반발은 거세졌고, 1972년 1월에는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구교도에게 영국군이 발포하며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IRA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테러를 하기도 했어요.
영국은 이런 일을 오랫동안 모른 척해왔어요. 그러다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일을 처음으로 사과했어요. 이어 1998년에는 영국과 IRA의 평화협정이 체결됐고, 2002년 IRA는 "우리의 폭력적 행위(테러 등)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의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성명을 신문에 발표했어요.
이후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1972년의 사건이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 사건'이었음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어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도 2011년 아일랜드를 방문해 아일랜드 독립운동 중 사망한 이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고 사과하며 영국과 아일랜드는 화합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다만 현재에도 북아일랜드에서는 구교도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북아일랜드 내에서 영국과 연결된 신교도의 힘이 강해 당장 독립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요.
서독·동구권 국가 관계 개선 노력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서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어요. 전쟁 중 폴란드 국토가 초토화되고, 사회 기반 시설 역시 거의 무너졌지요. 독일은 폴란드 남부 레서폴란드주에 있는 도시 오시비엥침에 1940년 강제 수용소를 건설했는데요.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독일은 중세 시대부터 이 도시를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수용소를 건설한 이유는 도심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까운 곳에 철도 시설이 있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이송하기 좋기 때문이었어요. 초기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하는 시설이었어요. 하지만 1941년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명령으로 대량 학살 시설로 확대됐죠.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이곳에서 각종 고문과 질병, 굶주림, 인체 실험 등으로 고통받았어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안에는 가스실과 교수대 등이 설치돼 있었죠. 이곳에서 4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돼요.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1913~1992)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추모지에서 2차 대전 중 나치가 행한 만행에 대해 무릎을 꿇고 공식적으로 사과합니다. 사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던 장소는 유대인 집단 거주지였던 게토였고, 폴란드인보다 유대인과 더 깊이 관련된 곳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는 이 일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요. 당시 서독은 폴란드 정부의 과거사 배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요.
하지만 총리의 사과는 이후 평화 정치의 상징이 되면서 전 세계에 화합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됐어요. 브란트 총리는 서독과 동구권 국가의 관계 개선 노력을 인정받아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3200여 명 사망한 '인디언' 기숙학교
18세기 후반부터 유럽계 캐나다인은 유럽인이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아왔던 '인디언' 원주민을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했어요. 19세기 중반 캐나다 총독은 인디언 문명화 정책 중 하나로 기숙학교 설립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인디언에 대한 문명화 추진법으로 이어져 제도화됐죠.
백인들은 캐나다 원주민의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 인디언 기숙학교에 입학시켰어요. 아이들은 이곳에서 인디언의 언어와 전통을 버리고 유럽과 캐나다 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요받았어요. 인디언 문화가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로 개종하라고도 강요받았죠.
기숙학교의 환경은 열악했어요. 식량도 부족했고, 비위생적이었죠. 아이들은 질병에 걸려도 치료받기 어려웠어요. 심지어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할 것을 강요받기까지 했어요. 이런 과정 중에 고문과 구타 등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서슴없이 자행됐고, 많은 아이가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사망합니다.
이런 행위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끝이 났어요. 이후 인디언 기숙학교의 아동 집단 매장지와 학대 등에 대한 각종 진상 조사가 이뤄지는데요. 이 기간 3200명 이상의 아동이 사망한 것으로 보여요. 살아남은 아이들의 경험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어요. 부모를 다시 만나 정체성 혼란을 겪거나 갈등을 빚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후 인디언 사회는 세대 간 갈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며 거의 무너지게 됩니다.
인디언 기숙학교의 사례는 식민주의 동화정책의 극단적 사례 중 하나로 꼽혀요.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사과가 없었던 것이 유럽계 캐나다인과 인디언 간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2008년 인정했어요. 그리고 "캐나다 정부는 이 나라 원주민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했죠. 이 사과는 캐나다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하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으로 연결되는 힘이 됐고, 지금도 캐나다에서는 화합의 과정이 이어지고 있어요.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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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죽창가가 심은 씨앗
더불어민주당이 한·미·일 합동 훈련을 놓고 연일 친일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친일 몰이의 덕을 톡톡히 봤던 이들이 다시 상대를 공격하는 '만능키'를 들고나온 것이다. 한일 두 정상이 최근 뉴욕에서 만난 이후 개선되고 있는 한일 관계와 3년 만에 일본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 국민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민주당의 친일·반일 프레임은 식상하지만 그 영향은 강력하다.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반일 불매 운동이 1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 브랜드를 구입하거나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친일파'로 매도하기도 했다. 일제 자동차를 타던 사람들은 주변 손가락질에 멀쩡한 차를 바꿔야 할 정도였다. 일본을 오가는 항공편의 약 60%가 운항을 중단했고, 2019년 하반기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172만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51.1% 줄었다.
반일 운동은 일본 글로벌 브랜드와 일본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당시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를 줄이고 기존 투자금을 회수했다. 한일 갈등 이후 2019년 4분기 한국에 대한 일본의 투자액은 전년보다 77% 줄었다. 양국 간 수입·수출액도 760억달러(약109조원)로 전년 대비 10.7% 감소했다. 결국 두 나라 모두 큰 손해를 본 것이다.
한일 양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안보 문제, 경제 협력 등 긴밀히 소통해야 할 사안이 많다. 싫더라도 협력해야 서로 이익이 되는 관계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정치권에 발목 잡혀 있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한 관료는 "보수 정권에서는 친일 논란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일 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부담 된다"며 "의미 있는 관계 개선이 이뤄지려면 결국 민주당 정부에서 결단을 해줬어야 하는데 지난 문재인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가버렸다"고 했다.
극심했던 당시 반일 운동은 일단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일하는 한 지인에게 자녀 문제로 혼자 일본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으레 입시 교육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이 일본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일본은 나쁜 나라인데 아빠는 왜 일본에서 일하느냐'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반일 죽창가를 외치던 지난 정부 5년 동안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도 일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심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일본 전역을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과 일본 여행을 기다리는 한국 국민들을 볼 때 두 나라의 분위기는 좋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이 다시 친일·반일 논쟁의 불을 붙이고 있는 점이 크게 우려된다. 당리당략을 위한 친일 몰이가 미쳤던 영향을 돌아봤으면 한다.
-최원국 도쿄 특파원, 조선일보(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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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고 뻔뻔한 일본과 사는 법
방심하면 日 좋은 일 시키는 운명… '가까워도 멀어도' 곤란한 이웃
여행객만 늘고 연구자는 줄어… 克日 위해선 知日부터 해야
10여 년 전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도착한 첫날 회사 선배와 마신 술이 과했다. 인사불성이 돼서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해보니, 지갑이 없었다. 집에 있던 아내를 불러 돈을 냈다. 다음 날 아침, 지갑에 월세로 낼 현금 30만엔(약 300만원)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찔했다. 아내한테는 못 알리고 파출소에 분실 신고를 했다. 기대는 안 했다.
1개월쯤 지나 엽서가 왔다. 지갑을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돈은 몰라도 지갑은 찾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가보니, 돈이 다 있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누가 주워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택시에 방금 놓고 내린 휴대폰도 못 찾은 경우가 있었다.
이 일만 겪었다면 지금도 일본을 좋게만 생각할지 모른다. 다른 면도 봤다. TV에서 1945년 일본 패전 직전 미군이 진행한 도쿄 공습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공습으로 우에노 공원의 동물들이 울부짖고 죽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국인은 자기들한테 징병당해서, 징용당해서 죽었는데, 그들은 동물을 애도하고 있었다. 8월이면 나오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 뉴스에서는 원자폭탄의 잔인함만 강조한다. 그들의 부모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뭘 했는지 TV나 신문에 나온 적이 없다. 자신이 당한 것만 곱씹고 있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다.
정직함과 뻔뻔함 모두 일본의 모습이다. 문제는 열도가 가라앉지 않는 한 일본은 한국 옆에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왜구(倭寇)라고 불리던 일본인의 노략질을 관리해야 했다. 국가 힘이 약했을 때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정말 기분 나쁜 것은 한국 최대의 비극이 일본에 엄청난 기회였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얼마 안 돼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시발점은 1950년 한국전쟁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용 군수물자, 구호물자 상당 부분을 일본에서 생산했다. 1951년 일본의 수출은 2년 전의 2.7배였다. 도쿄 증시 거래액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2월까지 25배로 폭증했다. 거의 모든 제조업이 불처럼 일어나다 보니 이 기간을 부르는 말도 다양하다. 조선(朝鮮) 특수, 가네헨(금속 제품) 경기, 이토헨(섬유) 경기, 삼백(시멘트·비료·종이) 경기 등이다.
우리는 방심하면 일본 좋은 일만 시키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고질병처럼 관리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병을 관리하는 첫 단계는 진단이다. 일본을 진단하려면, 결국 연구해야 한다. 그들의 역사·정치·사회를 잘 알아야, 어떻게 다룰지 처방할 수 있다. 일본어 책도 봐야 하고 일본인도 만나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최근 일본 연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1980년대 말부터 국내 연구소에서 일본을 연구한 한 인사는 "개인적인 일본 연구 모임을 하는데, 요즘은 새 얼굴이 안 보인다"며 "일본 경영서 번역 요청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작년 국내 대학의 일어 전공 졸업생은 7년 전보다 14% 줄었다. 중국어 전공자는 2%, 스페인 전공자는 37% 늘었다. 같은 기간 방일 한국인은 4.5배로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급기야 한일 외교 관계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민간 경제인끼리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도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한일 상공회의소의 회장단 회의, 한국 전경련과 일본 게이단렌의 한일 재계 회의는 작년엔 안 열렸다. 재계 회의는 올가을 일정을 잡았지만 아직 불안하다.
일본이 싫을수록 더 연구해야 하고 민간 외교도 열심히 해야 한다. 지일(知日) 없이 극일(克日)은 불가능하다.
-정성진 산업2부장, 조선일보(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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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친일이고, 무엇이 나라 망치는 매국인가
일본을 배워서 일본을 넘겠다는 克日의 민족 에너지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무엇이 나라 망치는 친일 매국이란 말인가
문재인 정권과 그 주변부가 친일 프레임을 구사하는 것은 좌파 통치를 위한 또 하나의 진영 논리에 다름 아니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우리 사회에 정말 일본을 숭모하는 친일 세력이 존재한단 말인가. 일본을 위해 우리 국익을 내팽개칠 매국노가 있다는 건가. 광복 후 70여 년이 흘렀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 팔아먹는 1900년대식 친일은 소멸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70년 전 잣대를 가져다 마녀사냥을 벌이고 정적(政敵)에게 '토착 왜구'란 해괴한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이게 소득 3만달러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싶다.
이 정권 들어 반일은 원리주의 종교처럼 폭주하고 있다. 좌파 교육감들은 난데없이 '친일 교가(校歌)' 공격에 나섰고, 어떤 지방 의회는 '전범(戰犯) 기업'을 몰아낸다는 조례를 들고 나왔다. 민노총은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을 항일(抗日) 거리로 조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제협약 위반 소지가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像)도 세우겠다고 했다. 감정적으론 시원하지만 결코 국익에 도움 되지 않는다. 국가 이익이란 수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힌 고도의 전략 이슈다. 동상 세우고, 항일 표지 붙여야 민족 자존심이 산다는 발상 자체가 싸구려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판 척화비(斥和碑)라도 세우겠다는 건가.
쇄국을 명하는 척화비가 조선 팔도 곳곳에 세워진 것은 1871년 신미양요 직후였다. 서양의 힘을 목격하고도 나라의 문을 걸어 닫았다. 그해 일본은 서구 문물 복제를 위한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 12국에 파견했다. 사절단 대표 이와쿠라 도모미는 미국 상륙 한 달 만에 상투를 잘랐다. 사절단의 일원이던 6세 소녀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을 세웠다. 교육으로 일본 근대화에 앞장선 그녀를 아베 정부가 새 5000엔 지폐의 초상 인물로 선정했다.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한국은 반일의 척화비를 세우고, 일본은 국가 건설의 영웅담을 꺼내 들고 있다.
150년 전 척화비와 지금의 친일 프레임엔 공통점이 있다. 적을 알고, 적을 극복하려는 것을 매국(賣國)으로 모는 단세포적 발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하지 못했다. 남이 가져다준 독립이었기에 그것은 미완의 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국력 경쟁에서 일본을 이기는 것이 진짜 광복이었다. 일본보다 부강하고 격조 높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길이었다. 광복 이후 우리는 일본이 넘보지 못하게 힘을 키우자는 극일(克日)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 힘을 보탠 국민 하나하나가 독립운동가였다. 그렇게 나라를 발전시킨 극일의 민족 에너지를 이 정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의 사망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지막 남았던 LCD 패널 제조사가 대만·중국 자본에 넘어간 것이다. '액정(液晶)의 제왕' 샤프는 이미 3년 전에 팔렸다. 세계를 석권하던 일본세가 완전히 궤멸됐다. 그렇게 만든 것이 한국이다. 삼성·LG가 피 말리는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 디스플레이를 시장에서 소멸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삼성·LG TV는 소니의 30년 독주를 종식시켰고, 현대·대우는 조선(造船)의 '히노마루(일장기) 군단'을 꺾었다. 현대차는 도요타, 포스코는 신일본제철에 필적하는 경쟁자로 떠올랐다. 이것이 극일이고 진짜 독립일 것이다.
세계인은 한국을 '적폐 청산'이나 '소득 주도'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삼성이며 현대차 브랜드일 것이다. 정권 논리에 따르면 이 기업들은 전형적인 친일 기업에 해당된다. 삼성전자는 산요의 기술로 시작했고, 현대차는 '전범 기업' 미쓰비시에서 엔진을 들여왔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일본을 스승처럼 모셨다. 그러나 일본은 극복할 대상이라는 관점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정주영도, 박태준, 구인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일본을 알고(지일) 활용해서(용일) 이기겠다는(극일) '전략적 친일'이었다. 기업만이 아니라 모든 부문, 모든 국민이 그랬다.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일본을 경쟁자 삼아 국력을 키우는 데 힘을 보탰다. 광복 후 70년사(史)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역사였다.
우리에게 일본은 아직 배울 게 많고 얻을 게 많은 나라다. '친해져야 이길 수 있다'는 극일의 관점을 이 정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세포적 세계관에 갇혀 국제 고립과 외교적 따돌림을 자초하고 있다. 힘이 약해지고 쪼그라드는 길로 나라를 이끌고 있다. 우리 국력이 쇠약해지면 누가 좋아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일을 원리주의 교리처럼 휘두르는 권력자들에게 묻는다. 어느 쪽이 일본 돕는 친일이고, 누가 나라 망치는 매국을 하고 있나.
-박정훈 논설실장, 조선일보(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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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 喪服 입히면 克日이 되나
'식민 통치의 피해자' 내세우다 자기 연민과 남 탓에 빠질 수도
지난 세기 克日 위해 달렸는데 지금은 복수의 감정만 들끓는가
3·1절을 맞아 덕수궁 돌담을 흰 천으로 둘러쌌던 '100년 만의 국장(國葬)'이 지난 5일 끝났다. 1919년 3월 3일 일제(日帝)하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고종을 우리 손으로 다시 기리기 위한 행사임을 명칭에서 알 수 있었다. 상복 입은 덕수궁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고종이 대한민국 국민에게서 국장의 예를 받아도 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을 동정하고 미화하는 정서가 우리 안에 있다. '대한제국=일제의 피해자'란 인식에서 비롯됐다. 이런 동정심에다 과거사에 대한 분노가 겹치면 나라를 망친 역사의 과오마저 분칠하게 된다. 몇 해 전 개봉된 영화 '덕혜옹주'는 평생 친일로 일관했던 영친왕을 망명까지 시도한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지난해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의 부패를 그렸다가 '친일 드라마 아니냐?'는 비난에 시달렸다.
맞은 이는 발 뻗고 자고, 때린 이는 오그리고 자는 게 세상 이치다. 주변에 해를 끼친 나라가 그 사실을 자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면 맞은 사실만 강조한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해놓고도 유일한 피폭국임을 내세워 반전·평화 이미지를 선전한다. 피해자로만 기억되기 위해 진실을 숨기기도 한다. 폴란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사실이 폭로되자 "폴란드인도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가해자가 이런데 '나는 피해자'란 주장은 얼마나 떳떳한가.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다.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워 가해자를 비난하느라 정작 자신이 진 이유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그 함정에 빠져 있다. 몇 해 전부터 봄·가을이면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서 대한제국 시기 서울의 밤 풍경을 재연하는 정동야행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시절 옷을 입고 과거를 즐기는 프로그램들이 준비된다. 못나고 힘없어 당한 아픔을 곱씹는 코너는 하나도 없다. 작년엔 '일제가 왜곡한 대한제국 정체성을 회복한다'며 '고종의 길'도 만들었다. 왕비를 잃고 남의 나라 공관에 피신한 치욕의 길을 이렇게 미화해도 되는 건가 싶다.
피해자임을 내세우는 이의 마음엔 자기 연민과 남 탓이 도사리고 있다. 남이 잘한 건 못 본다. 페리의 흑선(黑船) 앞에서 두려워 떨던 일본이 불과 반세기 만에 해양대국으로 거듭나 청·러시아를 거꾸러뜨리고 조선을 집어삼킨 성장 노하우를 외면한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메이지 정권이 개혁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메이지 편에 서서 막부를 무너뜨린 무사들이 "이제 우리 세상"이라고 환호하자, 메이지 지도자들은 "정권 차지보다 근대화가 진짜 목표"라며 무사들의 칼과 녹읍을 빼앗고 봉건질서를 해체했다. 유신 최고 권력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 와중에 분노한 무사들 손에 난자당해 죽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선 부패한 정부가 관직을 팔아먹고, 돈으로 벼슬을 산 이들은 백성의 고혈을 짰다. 나라를 내놓을지언정 특권을 내려놓는 지도층은 드물었다. 이러고도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한 세기, 우리는 극일(克日)의 길을 쉼없이 달렸다.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고, 필요하면 옛 적과도 기꺼이 협력했다. 3·1운동은 협소한 반일(反日)을 넘어 자유·평화·공화를 향한 근대주의 운동이라는 자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복수의 감정만 들끓는다. 역사의 피해자라는 자의식에 갇혔기 때문이다. 여기서 빠져나오지 않고선 다음 100년에도 진정한 극일을 기대할 수 없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논설위원, 조선일보(1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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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역사 전쟁에 불붙이다
문 대통령의 최종 병기는 '친일파'라는 딱지
해방 후 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親日을 사회惡 규정
'100년 집권' 노린 역사 전쟁… 과거 이용해 미래 지배하려
문재인 정부가 역사 전쟁을 시작했다. 3·1운동 100주년이야말로 민족주의적 감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기이다. '과거를 지배해 미래를 지배하려는' 문 정부의 최종 병기는 '친일파' 딱지다. 정부와 언론·학교·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총동원되고 있다. 서울시 성북구는 인촌 김성수(1891~1955)를 기리는 인촌로를 폐지했다. 전교조는 '친일파'가 만든 전국의 중·고교 교가(校歌)를 없애려 한다. 방송마다 민족정기 특집으로 가득하다.
일제(日帝)의 폭압 통치는 최악의 민족적 상처였다. 역사를 변조하고 한국어를 말살해 우리 얼까지 파괴하려 했다. 한반도 영구 복속을 위해서였다. 1945년 7월 패전(敗戰)이 코앞에 닥쳤어도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거부했다. 태평양 전역의 결사 항전과 '패전 후에도 천황제를 보존하고 한반도를 영유(領有)하겠다'는 '화평공작(和平工作)'을 고집했다. 일제의 망상은 핵무기라는 압도적 무력으로 분쇄된다. 한국인이 과거사 문제에서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친일파'의 낙인은 그만큼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다.
문 대통령은 삼일절 100주년 기념사로 역사 전쟁에 불을 붙였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던 말"인 '빨갱이'라는 용어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 잔재"로 규정했다. 대통령의 단언과는 달리 '빨갱이'의 어원은 논란이 분분하다. 해방 후 '빨갱이'라는 낙인이 정적(政敵)을 공격하고 인권을 탄압한 도구로 악용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빨갱이'라는 비어(卑語)가 대중에게 각인된 결정적 사건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단연 6·25전쟁이다. 북한의 한반도 적화 시도가 초래한 민족적 참화와 국가 소멸의 공포야말로 '빨갱이' 트라우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민족정기를 앞세운 문 대통령의 '빨갱이'론은 '100년 집권'을 노린 기억 전쟁의 방략(方略)이다. 현대 역사 전쟁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정치적 경쟁 세력이 권력 쟁취를 위해 서로를 '친일파와 빨갱이'로 낙인찍어 숙청하던 치명적 상흔(傷痕)을 헤집었다. 6·25전쟁의 인륜적 비극은 최근의 기억인 데다 그 고통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북한의 핵무기 독점으로 남북의 사활을 건 체제 경쟁이 재개된 터에 엄존하는 '빨갱이' 트라우마를 친일 잔재로 낙인찍는 건 사회 갈등을 무한 증폭한다.
남과 북은 공존 공영해야 한다. '신한반도 평화 체제'의 꿈은 숭고한 규범 명제다. 그러나 북핵이 기정사실이 되면서 우리가 '핵 인질'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더 이상 주홍글씨가 아니다. 김정은 찬양 집회가 서울 도심에서 공공연히 열리는 시대다. 오히려 '친일파' 딱지야말로 사회적 사망 증명서가 되었다. 거대한 애국 애족의 자취를 남긴 인촌이 작은 흠 때문에 친일파로 정죄(定罪)당하는 현실이 생생한 증거이다. 우리네 마음의 고향인 중·고교 교가에 친일 오명(汚名)을 덧씌우는 것은 문화대혁명 방식의 난폭한 자해 행위이다.
친일 잔재 청산은 중요하다. 하지만 해방 후 70년이 지나서도 친일 잔재를 사회적 악(惡)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왜소한 도덕 근본주의적 역사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세계 일곱 번째 30-50 클럽(국민소득 3만달러-인구 5000만명) 국가가 되었다. 정치·경제·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과 겨룰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극일(克日)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일본보다 역동적이다. 일본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과거사의 앙금에도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본 가치를 공유한다. 작년에 한국 국민이 무려 754만명이나 일본을 방문했다. 역대 최고기록이다.
정부·여당의 장기 집권을 노린 책략적 역사 전쟁은 반동적이다. 핵을 가진 북한과도 평화 공존한다면서 일본을 적대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과는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미세 먼지 지옥을 가져온 중국 앞엔 유구무언인 것도 창피하다. 한반도 역사 전쟁의 최대 원인 제공자인 김씨 유일 지배 체제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침묵하는 것도 민주공화국의 국격(國格)을 훼손한다. 국제 정치 원리와 충돌하는 문재인 정부의 자폐적 역사 전쟁은 국익과 사회 통합에 해롭다. '친일파'라는 망령(亡靈)을 소환할 때 '빨갱이'라는 유령도 같이 튀어나온다. 과거를 들쑤시는 대신 미래로 나아갈 때다. 지금은 '친일파와 빨갱이'의 낙인을 판도라의 상자에 봉인(封印)할 때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조선일보(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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