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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보' 내려진 한국] .... [추경호와 ‘당사의 50인’]

뚝섬 2024. 12. 5. 10:17

['여행 경보' 내려진 한국]

[무장군인들 막고 국회 표결 시간 벌어준 시민들]

[추경호와 ‘당사의 50인’]

 

 

 

'여행 경보' 내려진 한국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선포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하고 선포한 ‘부분 계엄’을 확대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즉각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점을 고려해 중대한 개인적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미국 시민들이 한국으로 여행하지 않기를 권고한다.” 사실상 ‘여행 금지령’이었다.

 

미국이 공식적 ‘여행 경보’를 도입한 것은 1978년이다. 당초엔 항공사·여행사를 위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1988년 12월 런던에서 뉴욕으로 가던 팬암 항공 103편이 폭탄 테러를 당해 270명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테러 발생 전 미국 정부가 “팬암 항공기가 폭파될 것”이란 구체적 익명 제보를 받았지만, 일반 여행객에게 공유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여행 경보는 대중을 위한 것으로 재편됐고, 다른 국가로도 퍼졌다. 2010년대 들어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1단계(일상적 유의)부터 4단계(여행 금지)까지 등급을 나눈 여행 경보 시스템을 채택했다. 

 

2020년 6월 1일 호주 정부가 미국에 대해 “여행하지 말라”는 경보를 발령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뒤 여러 미국 대도시에 폭동이 발생하고 통금령도 내려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탓에 많은 국가가 서로 여행 제한 조치를 하고 있는 때여서 주목을 못 받았지만 미국으로선 큰 망신이었다.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미국·캐나다·호주 등 많은 국가가 한국에 대한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한국 여행 등급 자체는 대체로 안전하다는 취지의 1단계로 유지하면서도, 시위가 지속될 예정이니 군중이 모이는 곳을 피하라고 경고한 국가가 많다. ‘광화문’ ‘삼각지’ ‘여의도’ 등 지명도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1980년 한국 여행 금지령은 그해 6월 2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현재 한국이 비교적 진정된 상태로 보인다”는 전문을 워싱턴에 보내고서야 취소됐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계엄 선포가 다시 등장하고 외국에서 한국에 대해 여행 경보를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최근 세계 여행객들 사이에 핫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런 나라에서 2024년에 수십 년 전 일이 다시 벌어질 줄 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러시아와 같은 문제 국가가 ‘한국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한다니 참으로 당혹스럽다.

 

-김진명 기자, 조선일보(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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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군인들 막고 국회 표결 시간 벌어준 시민들

 

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 2시간 30분 넘게 국회의 밤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무장 계엄군과 경찰보다 한발 앞서 국회로 달려 나온 수천 명의 시민들은 계엄군이 국회 봉쇄를 위해 본청 진입을 시도하자 돌아가라” “불법 계엄에 동참하지 말라”며 몸으로 막아섰다. 국회가 표결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비상계엄 해제 후 군인들이 철수할 때는 “도와주자”며 침착하게 길을 터주었다. 일촉즉발의 비상사태가 큰 희생 없이 마무리된 배경에는 명분 없는 계엄령을 온몸으로 거부한 시민들이 있었다.

무장 군경이 출동하는 비상계엄 상황임에도 정부는 긴급재난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긴급 담화 방송을 본 시민들이 전화와 문자로 널리 소식을 전했다.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국회 봉쇄를 막던 시민들은 계엄군의 일거수일투족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실시간으로 전파했다. 온 국민과 전 세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군이 무력 대응을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군대 간 아들에게 “시민들 공격 말라”는 문자를 보낸 어머니도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민들은 4·19혁명으로, 5·18민주화운동으로 막아 냈다.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때는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누구도 다치지 않은 평화로운 촛불집회로 탄핵을 이끌어 냈다. 옳지도 않고 성공할 수도 없는 비상계엄으로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는 동안 나라 위신을 지켜낸 건 계엄군을 돌려세운 시민들이다.

 

-동아일보(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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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호와 ‘당사의 50인’ 

‘권한은 많고 책임은 없다’는 말을 듣는 국회의원도 때로는 벌거벗고 광야에 설 때가 있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에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가 그랬다. 찬반에 대한 본인 생각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할 순간이 왔던 것이다. 국회는 4일 오전 1시쯤 계엄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을 진행했다. 투표 참석자 190명 전원이 찬성했는데, 여당 소속은 18명이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에 반대한다는 숫자가 108명 의원 가운데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슷한 시각 국회 건너편 국민의힘 중앙당사에는 여당 의원이 50명 넘게 모여 있었다. 표결에 불참한 이들로, 당 주류에 가까운 의원들이 상당수였다. 이들은 추경호 원내대표의 오락가락 지시로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원내대표 이름의 공식 집결 지시는 3일 오후 11시 이후 2시간 동안 ‘즉시 국회→중앙당사 3층→국회 예결위 회의장→당사 3층’으로 계속 달라졌다. 그러는 사이에 투표는 끝나버렸다.

▷당사에 모인 의원들은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냐”며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8월 이후 계엄설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45년 만에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데도 상당수 집권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관찰자에 가깝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결정족수를 채웠다고 선포하는 장면이 TV에 나오고 국회 표결 처리가 임박하자 몇몇 의원이 “계엄은 안 될 일” “대통령은 왜 성사도 못 시킬 계엄을 선포했느냐”는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추 원내대표는 의원들을 당사로 집결시켜 놓고는 국회 본청 원내대표실에 장시간 머물렀다. 본회의장까지 3, 4분 거리였지만 회의장에 가지 않았다. 계엄 선포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그는 상황 파악에만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결 불참에 대해선 “내 판단으로 안 했다”고 했다. 친한계인 김종혁 최고위원은 “추 원내대표는 본회의장으로 오라는 한 대표의 말을 거부했다”는 말까지 했다. 추 대표는 4일 새벽 상황에서나, 이날 오전 열린 의총에서도 공식적으로 계엄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에 이어 국민의힘 의원들도 역사와 민심의 평가 무대에 오를 처지에 놓였다. 의원들은 계엄 해제 표결에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질문받게 될 것이다. 표결 불참자 중 일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반대의 뜻을 밝혔지만, 당사에 머물던 범주류 의원 50여 명은 어떤 정치적 의사표시도 내놓지 않았다. 어떤 의원들은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한 상황에서 계엄 해제 표결을 위해 담을 넘어서까지 본회의장을 찾았고, 어떤 의원들은 제3자처럼 TV로 본회의장 표결을 지켜보며 개인적 논평을 했을 뿐이다. 극명하게 엇갈린 장면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동아일보(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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