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이로운 한국의 시위, 미래 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 미칠 것"]
[인간 존엄이 한일 관계의 초석 되길 바란다]
[‘노숙인 성지’로 묘사되는 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
"이 경이로운 한국의 시위, 미래 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 미칠 것"
'K시위'의 원조
외신 속 3·1운동
1919년 3월 1일 경성 대한문 앞 등에서 일제 통치를 거부하는 비폭력 저항 시위를 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당시 인구 2000만명 중 무려 200만명이 쏟아져나온, 한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였다. /독립기념관
1919년 3월 1일, 엄청난 시위였다. 이름조차 없어진 식민지의 백성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만 손에 든 채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한반도 2000만 인구 중 무려 10%인 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말발굽에 밟히고 총검에 맞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일제 통계로도 3개월간 이어진 시위 진압으로 7500명이 죽고 1만6000명이 다쳤으며 4만7000명이 구금됐다.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국을 전리품 삼아 소유하고 착취하는 게 국제 질서인 시대였다. 그런데도 세계 언론은 조선 땅에서 벌어진 비폭력 저항 시위의 처절함에 놀라고 일제 탄압의 잔혹함에 놀랐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강자에 맞서 글로벌 여론을 움직인 ‘K 시위’의 원조, 3·1 운동을 타전한 106년 전 외신을 모아봤다.
AP 특파원의 007 같은 보도
박보영 경북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당시 일본 영토의 내신과 서울 프레스 같은 외신 클럽은 철저한 보도 통제를 받았다. 이들은 시위대를 ‘폭도’라 부르며 그 규모와 의미를 축소했다.
1919년 3월 7일 아사히 신문 도쿄판의 '조선 각지의 폭동' 기사. 3월 3일부터 이 움직임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은 "주모자는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등 극소수 폭도"라며 이 시위가 거국적이라는 것을 '유언비어'라고 했다.
3월 3일 아사히 신문에 3·1운동 소식이 ‘야소교도(기독교도) 조선인의 폭동’이란 제목으로 처음 실렸다. 마이니치 전신 도쿄니치니치도 ‘조선 경성의 불온’ 제하에 “군중이 대한문에 모였다. 총독부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글을 관보에 게재했다”고 했다.
3·1운동이 처음 대외 보도된 건 3월 4일. 해외 독립운동 거점인 중국 상하이의 영자신문 대륙보와 북화첩보의 영문 기사였다. 일본으로선 막아야 할 둑이 터진 셈이었다.
이 소식은 곧 태평양을 건넜다. 3월 10일 오클랜드 트리뷴 등 미국 각지 신문에 AP통신발 기사가 실렸다. 13일 세계 최고 유력지 뉴욕타임스(NYT) 1면에도 ‘한국이 독립을 요구하다’란 기사가 긴급 타전으로 실렸다.
“한국 독립운동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전국 각지 모든 계층이 뛰쳐나왔다. 민족주의자들은 3월 1일을 독립의 날로 삼아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행진을 벌였다. 당국은 수천 명의 시위자를 체포, 발가벗겨 거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았다.” NYT는 3·1 독립선언서 전문까지 실었다.
운산금광에서 일했던 광산기술자 앨버트 테일러. 3.1운동을 보도한 기자이기도 했다.
이 첫 기사들은 AP 경성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썼다. 미 금광 기업 후계자로 1896년부터 조선에 와 있던 테일러는 AP 기자가 돼 3월 3일 고종 장례식 취재를 준비 중이었다.
테일러의 아내가 2월 28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 요람을 들추자 다음 날의 거사가 담긴 극비 문서인 독립선언서 뭉치가 툭 떨어졌다고 한다. 세브란스 지하엔 독립선언서 비밀 인쇄소가 있었다. 간호사들은 경찰이 미국인은 뒤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테일러 가족 병실에 인쇄물을 숨겨뒀다.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번역해 동생을 통해 AP 도쿄 지국으로 은밀히 반출, 처음 세계에 알렸다. 기사는 베이징 지국을 통해 보냈다. 그는 미·일 관계가 악화하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2년 추방됐다.
테일러는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숨졌으나 “내가 사랑하는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로 옮겨졌다.
“소녀의 손목이 잘리고, 또…”
1919년 3월 15일자 미 유력지 워싱턴포스트의 1면. '소녀의 두 손이 잘렸다'는 끔찍한 제목의 기사다. "독립선언서 든 소녀의 한 손을 일본군이 검으로 자르자, 소녀가 이를 다른 손으로 옮겨들어 시위를 이어갔다"는 내용이다. /워싱턴포스트 아카이브=송윤혜 기자
미 워싱턴포스트 3월 15일 자 1면에 ‘소녀의 두 손목이 잘렸다(Girl`s Hands Cut Off)’는 제목이 등장한다. “시위 도중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던 소녀의 손을 일본 군인들이 장검으로 훼손했다. 소녀는 다른 손으로 선언서를 옮겨 시위를 이어갔고 남은 손마저 잘렸다.”
비슷한 장면이 각국 신문에 소개됐는데, “일본인이 태극기 든 오른손을 자르자 여성들은 영웅적으로 왼손으로 옮겨 잡았고 그 손도 잃었다. 쓰러지며 입으로 국기를 물자 일본인들은 그 머리마저 잘랐다”(소련 이즈베스티야)는 표현도 나온다.
중국 민국일보는 3월 30일 ‘존경할 만하고 가엾은 조선인’ 제하에 “살기 넘치는 일본 경찰이 총칼을 들고 마구 때려죽였다. 조선인은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이어 앞으로 나간다” “구금된 사람들이 단식하고 있다고 한다” “3·1운동 이후 한인 상점들이 ‘투옥된 이들을 풀어주라’며 일제의 장사 재개 명령을 거부한다”고 전했다.
1919년 3월 경성에 체류하다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미국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의 현장 기사를, 당시 미 서부 유력지인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가 4월 6일 일요일자 1면을 털어 게재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아카이브
미 서부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4월 6일 ‘새크라멘토 비’ 발행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의 현장 르포에 1면을 털었다. ‘한국의 비무장 봉기, 최초로 검열받지 않은 기사’ 제하에 “일본군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총 끝엔 검이 달렸다” “어린 학생들 목을 가죽끈으로 묶어 끌고 다녔다”는 기사다.
또 “한국인이 보복적 폭력·약탈을 한 일이 없는데 ‘헌병을 죽였다’는 거짓 정보가 일본 언론을 채웠다”며 “내가 체류하는 동안 기사가 해외로 나가는 걸 막으려 가택 수색을 당했고, 도움 주던 YMCA 직원 2명이 체포됐으며, 평상복 입은 형사 2명이 따라붙었다”고 했다.
매클래치는 “한국 독립 시위는 민족 자결의 이상 실현을 위한 가장 경이로운 사례”라며 “예단은 이르지만 이는 미래 극동 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1919년 4월 26일 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3.1 봉기의 두 가지 버전' 기사. 비폭력 시위를 벌이던 한국인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쓰러졌다는 기사가 먼저 나오고, 일본 당국의 보도 지침에 따라 '한국인이 폭력 약탈을 했고 일 경찰은 최소한의 대응만을 했다'고 미화하는 '일본 측 버전'을 실었다. /USC 한미 디지털 아카이브=연합뉴스
4월 26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한국의 봉기, 통신원이 전한 두 이야기’란 독특한 형식의 기사를 실었다. “‘조선 독립 만세’만 외쳤는데 곤봉과 검에 맞고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다” “시신 두 구가 소달구지에 늘어진 채 지나갔다. 경찰이 흩어지라며 군중에게 돌을 던졌다”는 기사가 먼저 나온다.
그런데 이어진 ‘일본 버전’에선 “시위꾼들이 저고리에 도끼와 칼을 숨겼다” “한국인 수백 명이 몰려들자 15명뿐인 일본 경찰이 총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맞섰다”고 한다. 진실이 뭔지 독자가 판단하라는 것이다.
유관순도 이승만도 항일 여론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 과거 국내 서적·사진집·전시회 등에서‘기생들의 모습’이라고 잘못 소개됐었다. /박환 교수 제공
1919년 미 정부 공식 최초의 종군 여기자였던 페기 헐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감된 여학생들이 당한 치욕을 연합 기사로 고발해 미 각 언론에 알렸다. /캔자스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미 정부 공식 여성 종군 특파원인 페기 헐은 3·1운동에 나선 여성들이 당한 성폭력을 연합 기사로 전했다.
“여학생들은 일본 경관 앞에서 옷을 벗도록 강요당했다. 돼지우리나 다름없었다. 의무관이 치욕적인 신체 검사를 했고 그들을 농락했다.”
메릴랜드의 컴벌랜드 이브닝 타임스는 ‘자유를 향한 큰 시위를 주도한 어린 감리교도 소녀’를 따로 소개했는데, 유관순 열사로 추정된다.
영국·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유럽국은 3·1운동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개성 여학생 수백 명이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행진했다”(5월 9일 프랑스 알제의 메아리) 같은 소식은 무시할 수 없었다. 식민지였던 중남미도 들끓었다.
프랑스 언론 '알제의 메아리'가 1919년 5월 8일 "경성의 여학생 수백 명이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혁명가)를 부르며 만세 운동 행진을 했다"고 소개한 기사. /알제의 메아리
미국은 애초 1차 대전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독립 혁명으로 건국된 미 자국민이 그 잔혹함을 생생히 전하자 대일 여론에 균열이 생겼다. 국무부는 일본 대사를 초치해 여론을 환기할 조치를 요구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노린 글로벌 파급 효과다.
이영관 순천향대 교수에 따르면 NYT는 친일파 미국 학자들과 재미 독립운동가 간 지상(紙上) 전쟁터가 됐다. 친일파가 “3·1운동은 폭도의 반란”이라고 기고했고, “이집트와 한국은 무능력 탓에 각각 영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게 돼 안전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3월 20일)는 사설이 나왔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가 정한경은 “한국인은 가능성을 개발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3·1 운동은 일부 급진적 선동가가 아니라 모든 대중이 나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승만 박사는 “2000만명이 극심한 고통 속에 독립 투쟁을 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 선전가들에게 속지 말라”고 썼다.
1919년 5월 15일 뉴욕타임스에 당시 프린스턴대 연구자 신분이던 이승만 박사의 기고문. 친일파 미국 학자들이 일제 통치를 미화하고 3.1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을 맹비난하며 한국 독립을 위한 뜻을 모아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뉴욕타임스
4월 제암리 양민 학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 보도 등이 이어졌다. NYT는 4월 24일 미 언론 최초로 3·1운동을 공식 지지하는 사설 ‘코리아’를 냈고 6월 ‘한국, 독립을 선언하다’는 장문의 분석 기사로 일제를 비판했다.
보스턴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미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특별 사설로 일본을 맹비난하며 한국 독립을 촉구했다.
고정휴 포항공대 교수에 따르면 1941년 여론조사에서 30년 전 지도에서 사라진 한국을 미 국민의 28%가 인식하고 있었다. 3·1운동의 나비 효과였다.
-정시행 기자, 조선일보(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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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엄이 한일 관계의 초석 되길 바란다
[박상준 칼럼]
일본 내 일제강점기 피해자 돕는 이들 있어
‘다시는 인간 존엄 훼손 안 된다’ 믿음 때문
韓日 협력, 가해자 반성 촉구만으로는 한계
“가치 함께 추구하자” 선진 우방의 충고를
2008년 12월 22일 동아일보에 서울 대학로의 한 철거 현장에서 여러 구의 인골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실렸다. 이듬해 3월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해부용으로 사용된 시신의 유해로 추론된다는 감식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9년 7월 22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국립감염증연구소 건설 현장에서 100구가 넘는 인골이 발견됐다. 몇 년 뒤, 총상이나 수술 흔적이 남아 있는 인체 표본의 유골이며 그중에는 아시아계 외국인도 있다는 감정 결과가 발표됐다. 인골이 발견된 곳은 과거 육군군의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731부대 등 전시의 의학범죄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일었다.
2005년 도쿄로 이사했을 때, 당신의 출퇴근길에 있는 국립감염증연구소는 무서운 곳이니 밤에는 그 길로 다니지 말라며 농인 듯 겁을 준 일본인 지인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골 뉴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나 보다. 인골이 발견되고 3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일을 알고 있는 일본인이 별로 없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에는 그 유해가 전쟁범죄의 피해자는 아닌가 하는 의혹을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 보조금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의 후원도 거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은 왜 그 일을 놓지 못하는 걸까? 인간 존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시신들이 정말 인간 존엄이 극단적으로 훼손된 범죄의 희생자들이라면 전모를 밝히는 것이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이고, 일본이 다시 그런 일에 연루되는 걸 막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에 와서야 위안부나 정신대 그리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일이지만 인간 존엄에 대한 믿음으로 그 일을 한다. 일본 생활에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의외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안도할 때도 많다.
진화심리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저서 ‘인간본성’에서 인간 종족은 민족과 종교, 문화가 달라도 본성이 같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서 유사한 도덕률이 발견된다고 했다. 일본에 살면서 가끔 그 말을 실감한다. 우리의 본성은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고, 그래서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본다.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은 한국과 일본이 함께 추구하는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 간의 우호를 다지는 데 이 가치가 초석이 될 수 있다. 미중 마찰, 우크라이나 전쟁,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 등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럽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국과 일본 기업은 여러 분야에서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한일 간 협력은 두 나라 모두에 경제적으로 이익이다. 그러나 정치·외교적 갈등이 경제 협력을 방해하곤 한다.
한일 간의 갈등에 한국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그릇된 인식이 그 뿌리에 있다. 일본에 그 점을 적절히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데, 피해자로 가해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지금의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거듭된 사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그 사죄를 번번이 퇴짜 놓고 새로운 요구를 한다는 것이 일본 사회 일반의 인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식민지 시대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본 사회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미진하나마 상당 부분 진행된 지금, 일본을 향한 한국의 태도도 단순히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에서 벗어나 과거에 있었던 인간 존엄의 훼손을 돌아보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우방으로서의 충고가 돼야 하지 않을까.
기미년 독립선언문에서 우리 조상들은 오랜 원한과 잠시뿐인 감정으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바른길과 원칙으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했다. 지금 봐도 놀라운 포부와 비전으로 침략자들을 훈계했지만 당시 우리 조상에게는 그들을 바꿀 만한 힘이 없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일본과 동등한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는 선진국 우방으로 그들에게 평화의 악수를 내밀고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자 말할 수 있다. 100여 년 전 우리 조상이 꿈꾸던 세상을 한일이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인간 존엄이 한일 관계의 초석이 되길 바란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동아일보(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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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성지’로 묘사되는 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 1회의 주요 무대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이다. ‘딱지맨’(공유)은 이 공원의 노숙인들에게 다가가 ‘자그마한 선물’이라며 복권과 빵 가운데 고르라고 한다. 대부분은 복권을 선택한다. 드라마는 마치 노숙인이 허황되게 ‘한 방’을 좇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인 것처럼 왜곡했다. 더 안타까운 건 탑골공원의 묘사 그 자체였다.
‘딱지맨’이 앞에서 빵을 마구 짓밟는 탑골공원 팔각정은 106년 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3·1운동의 성지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법통이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세계인이 가장 많이 본(8700만 회 시청) 이 드라마에서 이 공원은 노숙인들이 대낮에 아무렇게나 여기저기에 누워 있는 공간으로 표현됐다. 이는 실상과도 다르다. 공원 바로 옆엔 무료급식소가 우리 사회에 감로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기자가 최근 여러 차례 공원을 찾아가 살폈으나 공원 내부에서 노숙인 행색을 한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탑골공원의 이미지는 드라마의 묘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기자가 주변에 이런 얘기를 꺼내자 태반은 ‘실제로 그런 것 아니냐’,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시작됐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날 탑골공원은 1년에 하루 3·1절 기념식이 열릴 때 말고는 사실상 죽은 공간이나 다름이 없다. 공원 안엔 지금은 없어진 옛 문화재 지정번호로 ‘국보 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히는데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점심시간에 나와서 쉬는 직장인도 찾기 어렵다. 과거 이 공원이 “우리 서민의 정든 곳”,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들의 공원” 등으로 인식됐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이렇게 된 큰 원인 중 하나가 공원을 ‘섬’으로 만들고 있는 담장이다. 특히 공원 북쪽과 동쪽 담장 너머 골목은 담장으로 시선이 가려지면서 노상 방뇨와 음주 문제가 오랫동안 심각했다. 지난달 25일 점심때도 남자 둘이 주먹다짐을 해 경찰이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897년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만들어진 탑골공원은 옛날 사진을 보면 원래도 담장이 있긴 했다. 그 시절에 담장이 없는 열린 공원을 상상하긴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종로구에 따르면 현재의 담장은 1960년대 지어졌던 ‘파고다 아케이드’ 상가를 철거하면서 1980년대 초 모두 새로 만든 것이다. 유산적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종로구는 지난해 서쪽 담장 가운데 일부를 허물고 발굴 조사를 했지만 원래 담장의 유구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종로구는 장기적으로 탑골공원의 담장을 허물고 개방형 시민공원으로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원형을 살리겠다고 굳이 새 담장을 만들어 공원을 계속 고립시킬 이유가 없다. 원래 담장 모습이 어땠는지 확인해 볼 가치야 있겠지만 키가 작은 수목 등으로 경계를 표시하는 정도로 복원하면 족할 것이다. 담장을 허물면 석탑 등 내부 국가유산의 보호가 더욱 중요해지겠지만 지금도 출입이 자유로운데 새로운 안전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다. 공원을 다시금 시민의 일상에 들여와 3·1운동의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동아일보(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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