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 ....

뚝섬 2025. 3. 13. 08:28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 

[철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 재판]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 

 

나는 1883년 3월 13일 런던 시내를 걷는다. 이 도시에서 내일 오후 2시 45분경 카를 마르크스가 서재 안락의자에 앉은 채 임종자 없이 숨을 거둘 것이다.

 

혁명가인 그의 망명을 끝끝내 받아준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파괴하려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 제국이었다. 그는 대영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집필한 빚을 그의 무덤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갚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고 하였으되, 그거야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알기란 쉽지가 않다.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게 인간이니까.

 

나는 대학 89학번인데, 그 무렵 비로소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 ‘공식적으로’ 번역 출판됐다. 이전에는 금서(禁書)였다. 법학자인 아버지가, “이제야 우리 사회가 ‘자본론’도 서점에 깔리는구나. 별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금지해 놓으면 대단한 걸로 둔갑을 하지”라고 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것 역시 모든 것들에 해당된다. 가려졌을 때 매력적이고 가질 수 없을 때 강렬하다. 마르크시즘은 오류가 많다. 한데 강한 이론은 완벽한 이론이 아니다. 분명한 오류가 수많은 변종들을 양산해 족보를 이어가는 이론이다. 강한 바이러스처럼. 마르크시즘이 딱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는 “범신론(汎神論)은 매력적으로 다듬어진 무신론(無神論)”이라고 했는데, 마르크시즘은 무신론과 경제학으로 변장한 ‘사이비(似而非)’ 기독교 이론이다. 대중은 ‘자본론’을 읽지 않는다. 다만 감염될 뿐이다. 지식으로는 지동설을 믿지만 심정과 감각은 천동설에 친화적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천동설’이다. 소련이 망했어도 마르크시즘이 영원한 이유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그는 제 묘비 하단에 새겨진 자신의 저 말을 실천했다. 그 비극적 결과와는 별개로.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선일보(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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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력적인 철학

 

이상주의자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켰고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땅 향해 손 펴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

김수영 지음 l 출판사 청어람e

 

‘철학’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나요? 어렵다는 생각부터 든다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이라니요.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모티브로 책을 썼습니다. 그림과 철학이라니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사실 ‘아테네 학당’에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철학자들이 거의 모두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화 가운데 이렇게 철학자들을 주축으로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을 한군데 모아 묘사한 그림은 ‘아테네 학당’이 거의 유일합니다. 저자는 이 가운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디오게네스, 에피쿠로스 등 철학자 16명을 그림과 함께 소개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그림은 단순히 명사들을 모아놓은 것뿐만 아니라, 놀라울 만큼 많은 상징과 세심한 표현을 통해서 철학자들의 개성을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걷는 장면인데요,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철학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적 철학자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자가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상주의자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현실주의자에 가깝습니까? 이 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이상주의자였던 플라톤에 관해 좀 더 읽어봅시다. 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수의 결정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 바로 이 점에서 철학적 성찰이 시작됩니다. 민주주의가 지닌 이러한 약점을 우리가 어떻게 보완해 나가야 할까요? 저자의 말을 빌리면 “합의를 통해 진리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진리를 통해 합의를 구축하는 일”이 플라톤이 추구한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닙니다. 이 책이 다루는 모든 고대 철학자들은 현실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철학은 어떤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되묻습니다. 그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따져 묻는 것이지요. 또한 철학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과 공동체에 관해 묻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근거가 약한 주장이나 논리적이지 못한 말과 글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지적, 도덕적, 사회적 능력과 이를 통한 성취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철학은 ‘이토록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조선일보(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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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윤평중의 지천하]

 

철학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젊은 철학도 시절 벼락처럼 다가온 글이 하나 있다. 열암 박종홍(1903~1976) 전집에 실린 짧은 에세이였다. 한국 철학계 1세대 대부였던 열암은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일세를 풍미한 함석헌·양주동 선생이 열암과 평양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다.

 

열암은 에세이에서 평양고보 시절의 한 친구에 관한 특별한 기억을 펼쳐놓는다. 학년은 같아도 열암보다 나이가 많고 어른스러웠던 친구는 소년 박종홍에겐 비범한 인물로 비쳤다. 삶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관심에 눈을 떠가던 사춘기 열암에게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독자적인 정신 수련법에 매진하던 그 친구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수련 중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건강을 잃고 폐인이 되고 만 것이다.

 

학교를 영영 떠나기 전 그 친구는 열암에게 마지막 충고를 남긴다. 혼자 너무 서둘러 달리다가 길을 잃지 말라’는 쓰라린 고백이었다. 박종홍 선생은 이런 교훈을 평생 간직해 진중하고 독실한 철학자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게 된다.

 

철학이나 예술, 신앙을 내세워 일상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도’를 닦는다거나 절대 진리를 탐구한다면서 이 세상의 일들을 낮추어 보곤 한다. 하지만 초월적 시선으로 대중을 내려다보는 자칭 ‘깨달은 자’의 말과 글은 고루하거나 허망하기 일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기 마련인 신산한 일상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가 중에도 고답적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있다. 존재의 비밀을 꿰뚫어 본 자신은 세상의 상식과 규칙 따윈 무시해도 된다며 허랑방탕한 삶을 정당화한다. 한때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였던 ‘허무주의 시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데뷔 초창기 일 년 동안 소주 1000병을 먹으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자서전에 과시했다. 나중에 자신이 벌이게 될 숱한 반사회적 일탈 행위를 ‘천재 시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사례다.

 

시중에선 ‘예술적 천재’에 관한 소문이 상업적으로 윤색돼 잘 팔려나간다. 한 유명 화가는 고가의 위작 여러 점을 자신이 창작한 진품이라고 강변했다. 위조범 일당이 범행 과정 일체를 털어놓은 데다 수사 당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모두 위작 판정을 내린 그림들에 대해서였다. 자기 작품 고유의 화법(畫法)과 에너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이 화가는 주장했는데 정작 위조범들은 가장 베끼기 쉬웠다고 자백했다.

 

1974년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 조교 선배가 한 당부가 기억에 선명하다. 학교에 흰 고무신을 신고 오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등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다른 대학 한 철학도가 한여름에 겨울 외투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는 황당한 소문을 언급한 것이다. 나중에 이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계절의 변화를 잊은 채 철학적 사유에 침잠할 수도 있고 예술적 통찰이 득도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초월적 제스처는 예술과 철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쇼맨십으로 변질된 심오함의 과시는 철학과 예술, 신앙의 진정성을 파괴한다.

 

아무리 심오한 예술, 학문, 종교도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의 무게보다 지엄할 순 없다. 참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나날의 현실을 소홀히 하면 그 믿음은 거대한 허위로 전락한다.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면서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외면하는 신앙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철학이나 예술, 종교 자체로부터 구원이 섬광처럼 오지는 않는다. 충만하고 정직한 하루하루가 쌓여 구원으로 가는 문이 조금씩 열릴 뿐이다. 예술, 신앙, 철학 등 그 무엇도 삶보다 앞설 순 없다. 정말로 비범한 것은 평범 속에 있다. 비범한 예술이나 철학보다 빛나는 게 진솔한 보통 사람의 삶이다.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조선일보(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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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재판

 

잦은 설전으로 집권자에 밉보여… 아테네 패전 후 희생양으로…
시민 찬반투표로 유무죄 판결
순순히 감형 받을 수도 있었지만 고발 내용 인정 않고 독 마셔 

 

지난 3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파면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후 전직 대통령이 구속돼 법정에서 재판받게 되자 많은 사람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하고 있지요. 첫 재판 방청객으로 68명을 받는데 525명이나 몰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죠?

사실 오늘날엔 수많은 재판이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재판 결과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재판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아테네 몰락의 희생양이 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인간의 존재와 내면에 대해 탐구했어요. 인간은 '알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앎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가 있었기에 제자인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먼 훗날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현대까지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이뤄질 수 있었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운데 흰 옷 입은 사람)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 제자와 동료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잘못됐다 인정하면 사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품위와 위엄을 잃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면서 독배를 택했어요.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던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해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됐어요. 아테네에는 패전의 암울한 기운이 떠돌았고, 그 상처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어요. 패전 이후 아테네의 집권자가 된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바로 그 대상으로 삼았어요. 소크라테스가 희생양이 된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아니토스 반대파에 소크라테스 제자가 많았다는 점, 또 하나는 소크라테스를 미워하는 지식인이 많았다는 점이에요.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정치인, 희곡 작가, 철학자 등과 같은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설전을 벌여 이겨 명성을 떨쳤는데요.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특히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식인 집단 '소피스트'들의 미움을 받았죠. 소크라테스는 설전 과정에서 상대방이 대답을 못 할 때까지 질문을 던지며 면박을 줬어요. 당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외모를 비꼬며 숲의 정령 '사티로스'나 '악마'라고 비난했죠. 이런 배경에서 그는 고발당해 아테네의 민중재판소라는 법정에 서게 돼요.

찬반 투표로 유죄·무죄를 선고한 민중재판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아테네에는 오늘날 배심원 제도에 가까운 민중재판소가 운영되고 있었어요. 재판은 극장에 모인 민중재판관들이 찬반 투표를 해서 투표수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었어요. 민중재판관은 아테네 시민들이 1년 임기로 돌아가며 맡았어요. 재판을 열려면 시민 개인이 고발해야 했죠. 고발이 접수되고 재판이 시작되면 고발인이 고소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다음 피고인이 변론했어요. 이 과정이 끝나면 고발인과 피고인이 각각 증인을 불러와 신문하고, 민중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민중재판관들은 유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있는 도자기 조각을, 무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없는 도자기 조각을 투표함에 넣었어요.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한 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믿게 했다"는 것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고발이 부당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했어요.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유무죄를 판가름할 민중재판관들에게 무례한 말을 많이 해 오히려 분노를 일으켰죠. 그래서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사형을 선고받아요.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소크라테스

유죄·무죄 사이 표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는 민중재판관들을 설득해 사형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당시 법에 따라 피고인은 유죄 평결 후 최후 변론에서 구류, 벌금, 추방, 침묵 강요 등 네 가지 중 하나를 요청할 수 있었죠. 소크라테스는 최후 변론에서 "가벼운 벌금만 내게 해 달라"고 했어요. 문제는 그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겠다면서 민중재판관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것이에요. "국비로 나에게 평생 향응을 제공하라"는 조롱 섞인 요구까지 하려는 것을 제자들이 만류했어요. 민중재판관들은 더욱 분노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360표,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을 확정했어요.

사형수가 된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렸어요. 친구가 찾아와 아테네를 탈출해 다른 도시로 망명하라고 조언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내가 도망치면 고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꼴"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결국 담담하게 독약을 들이켜 생을 마감했어요.

현대 재판 제도와 비교해봤을 때 아테네 재판 방식의 허술함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우선 피고인에게는 고발인과 증인에게 반대로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민중재판관들이 투표 이전에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도 없었고요. 대부분 하루 만에 재판이 끝나기 때문에 민중재판관들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느낀 감정으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죠.

만약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불의, 허위와 타협해 목숨을 구걸했다면 살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까지 기억할 정도의 명예와 존경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에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옳았음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소크라테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소피스트(Sophist)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한 그리스 지식인·철학자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은 비싼 수업료를 받고 주로 웅변술, 논증법 등을 가르쳤어요. 때론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소피스트란 말은 오늘날 '궤변론자(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따져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라는 의미를 갖게 됐죠. 이들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대화 속에서 지식을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런 이유로 아테네의 주류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싫어했다고 해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승혁 기자, 조선일보(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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