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훈 가족의 엇나간 ‘대한민국 사용설명서’]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이유]
이혜훈 가족의 엇나간 ‘대한민국 사용설명서’
초기 성과가 격차 키우는 ‘K마태효과’
빈익빈 부익부 K자형 성장 해법 단초
낡은 대한민국 성장 보일러 수리해야
모두 위한 ‘대한민국 사용설명서’ 생겨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가 지명 28일 만에 낙마했다. 많은 사람들은 숱한 의혹이 제기되는데도 그가 왜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기 전까지 버텼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그건 이 전 후보자가 국민 눈높이와 동떨어진 자신만의 공정성 착각에 빠졌기 때문일 수 있다. 청문회에서 제기된 의혹을 복기하면 이혜훈 가족에게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름의 ‘대한민국 사용설명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방식은 장관 후보자 지명 전까지는 꽤 잘 먹혔다.
그의 장남은 내무부 장관을 지낸 할아버지 훈장 덕분에 연세대 사회적 기여자(국위선양자 요건) 전형에 지원했다. 본인 능력과는 무관한 조부의 성과가 대입 사다리의 든든한 초기 발판이 된 것이다. 장남은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경제학부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논문도 함께 썼다. 이 실적은 국책연구기관 취업에 활용됐다. 이 전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장남이 대학 입학 후 3.85의 학점을 받았다”며 ‘아빠 찬스’ ‘할아버지 찬스’를 부인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학점이 입학 과정을 사후에 정당화할 수 없다. 그가 다른 청년과 다른 출발선에서 단단한 지지대를 딛고 올라선 사실도 바꿀 수 없다.
이 전 후보자의 세 아들은 할머니로부터 비상장 주식이나 상가를 증여받아 일찌감치 10억 원대 자산가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보유한 부실 핀테크 업체의 회사채를 직접 인수해 ‘우회 증여’ 논란이 일었다. 장남은 부모의 도움으로 용산과 세종의 전셋집에 살며 주거 고민을 해결했다. 결혼한 그는 혼인 신고도, 전입 신고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반포 아파트 청약 가점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녀의 성장 과정에 도움을 주는 일은 흔하다. 이혜훈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보다 더 높은 곳에서 출발하거나 더 탄탄한 지지대를 딛고 올라서서 갈수록 격차를 벌린다면 불공정 논란이 생긴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평형수 역할을 해야 할 정부와 제도는 무력했다.
연세대는 ‘현대판 음서제’처럼 조부의 후광으로 입학하는 상식 밖의 국위선양자 입시 전형을 만들었다. 전형 절차를 감독해야 할 교육부, 국가유공자를 규정하는 국가보훈부는 이를 막지 못했다. 청문회에선 이 전 후보자 배우자의 영종도 땅 매각 과정에서 세금 탈루 의혹이 제기됐다. 국세청이 포착하지 못했던 사안이다. 국토교통부는 반포 아파트의 ‘위장 미혼’ 부정 청약을 걸러내지 못했다. “보좌관 갑질은 알 수 없다”는 대통령실 검증이나 5번 공천을 해준 국민의힘 등 보수 정당의 인사 관리 역시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니 그들만의 ‘대한민국 사용설명서’가 잘 먹힌 것 아닌가.
성경 마태복음에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구절이 있다. 사회학계에서는 초기 성과가 기회와 자원을 더 많이 끌어들여 격차를 키우는 현상을 이 구절을 따서 ‘마태효과’로 정의한다.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는 ‘빈익빈 부익부’의 ‘K자형 양극화’를 마태효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혜훈 가족처럼 초기 성취마저 가족의 도움이나 후광이 작용한 것이라면 ‘K마태효과’의 해악은 크다.
장관 후보자가 낙마하고 전직 대통령 부인이 대가성 명품백을 받아 처벌되거나 여당 의원이 공천헌금 수사를 받는 현실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부와 권력을 쥔 엘리트에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 절반은 본인과 자식 세대에 계층 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믿고 있다. 이런데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사회적 신뢰가 생길 수 있을까. ‘흙수저’ 청년들이 가장 분노하는 지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20대 지지율이 낮은 이유와 관련해 “성장 발전이 지체되면서 기회 총량이 줄어 청년 세대의 진입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성장은 자본과 노동과 같은 투입 요소로만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경제 시스템의 투명성, 공정성, 혁신성이 성능을 좌우한다. 낡고 고장 난 보일러가 윗목까지 온기를 보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공정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청년을 위한 기회 총량은 늘어나지 않는다.
이 전 후보자가 맡으려던 기획예산처는 K자형 성장 함정을 벗어날 중장기 국가 발전 전략을 짜는 중책을 맡은 곳이다. 이 자리에는 성장 온기가 윗목까지 골고루 흐르도록 낡고 고장 난 대한민국 성장 보일러를 수리할 적임자가 와야 한다. 모두를 위한 ‘대한민국 사용설명서’를 새로 써야 한다.
-김용 논설위원, 동아일보(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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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이유
미국 대신 일본 유학이 뜬다
일본 문화·사회 관심 때문?
입시지옥, 취업지옥에 지쳐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다

지난 2023년 5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일본 유학·취업 박람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유학 상담을 받고 있다. /뉴스1
‘탈(脫)한국’이 이제 일본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자녀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거나 보낼 예정이라는 기업 부장·임원을 10명 이상 만났다. 미국·영국 등 영어권 중심이던 ‘부모 등골 브레이커’ 리스트에 일본이 추가되고 있는 것이다. 게이오·와세다처럼 유명 대학만이 아니다. 리쓰메이칸·테이쿄·도요 대학 등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대학 진학을 위해 고2·3 때부터 일본어에 도전한 사례도 있었다. 왜 일본인가. “가까운 선진국이라서” “요즘 미국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같은 이유만은 아니었다. 입시 지옥, 다음엔 취업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저마다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결과였다.
대부분 입시 스트레스부터 언급했다. ‘스카이’ ‘인 서울’ 같은 협소한 잣대를 들이대며 사람을 판정하려는 한국 분위기에 지쳤다는 것이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결정되고, 그게 싫으면 국영수과 기본 과목은 물론 수행평가, 동아리·봉사, 평판 관리까지 잘해 내야 한다. 내신을 한두 번 망쳤다면 자퇴도 불사해야 하며, ‘엄마의 정보력’을 위해 시간당 50만원짜리 컨설팅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옆 나라로 눈을 돌리니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다.
일본도 도쿄대·교토대 같은 최상위권 리그는 입시 지옥으로 불리지만, 그 외엔 대학 입학이 한국보다 수월하다. 4년제 대학만 800개로 한국의 4배인데, 이 중 ‘갈 만한’ 좋은 대학 비율도 지역별·전공별로 훨씬 많다. 입시 전형도 자신의 특장점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예컨대 미술 전공이라면 실기와 면접만으로 갈 수 있는 좋은 대학이 많다. 선택지가 넓어지면 입시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일본 생활을 통해 얻게 되는 일본어 실력과 국제 감각은 덤이다.
일본 유학의 더 현실적인 이유는 취업에 있었다. 주변 유학생 다수는 현지 취업과 정착을 고려해 떠났거나 떠난다고 했다. 한국은 구직난이지만, 일본은 구인난이라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일자리가 남아돈다고 할 만큼 젊은 인력이 귀하다. 인구 감소·고령화가 일찍부터 진행돼 온 탓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주요 기업들은 코로나 이후 사상 최대 이익을 경신하면서 신입 사원 채용을 늘리고 있다. 자동차·반도체 후방 산업 등 ‘소부장’을 중심으로 강력한 제조 기업들이 일본 경제를 받쳐주고 있다.
10년 전 단카이 세대(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마무리되면서 일본 기업들은 비용 절감과 이익 개선이 일어나고, 청년 채용 여유가 생기는 선순환도 나타난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신졸 일괄 채용’ 문화는 100%에 가까운 취업률을 만들어 낸다. 대규모 신입 공채는 종신 고용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를 효율적으로 육성하는 방식이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을 ‘사회인’으로 키우는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은 대졸자 10명 중 4명은 취업을 못 하고, 20~30대 ‘쉬었음’ 인구가 70만명에 달한다. 삼성을 제외한 주요 기업들은 신입 공채를 폐지하며 ‘수시 채용’ ‘경력 중심 채용’으로 전환했다. 경기 둔화 속에 변화와 혁신, 효율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해외 경험을 쌓은 학생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 기회가 없어서 나갈 수밖에 없는 학생이 많아지는 건 슬픈 일이다. 우리는 저출산 위기를 외치며 출산율을 높이려고 수십조 원을 쓰고 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들이 청년이 되기도 전에 떠나 버린다면, 그렇게 쏟아부은 노력이 무슨 소용인가. 일본 유학 붐을 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류정 기자, 조선일보(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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