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전문에 추가돼야 할 것은 '6·25정신'이다]
[지혜로운 통일 논의]
헌법 전문에 추가돼야 할 것은 '6·25정신'이다
헌법 전문 개정 논의에 부쳐
6·25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1년 12월 11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 6·25전쟁 격전지였던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방문해 구국용사충혼비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원래 헌법 전문에 개별 역사적 사건을 추가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미국·프랑스·일본·러시아의 헌법 전문은 특정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박물관에 전시품 늘리듯이 특정 정파가 선거에서 승리할 때마다 역사적 사건을 추가하면 우리 헌법 전문이 ‘정파들의 전시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추가하자며 헌법개정안까지 발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그래, 그렇게 특정 사건을 헌법 전문에 추가하고 싶으면 추가하자. 다만, 헌법 전문에 추가될 역사적 사건은 현재 우리 국민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아직 헌법 전문에 언급된 바 없는 사건이어야 한다.
이 기준에 근거해 본다면, 5·18정신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헌법 전문에 반영된 4·19정신과 겹친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에 분노한 시민들이 물리적으로 봉기한 것이 4·19정신의 핵심이라면, 5·18정신 역시 그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데 미친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헌법 전문에 언급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은 바로 6·25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6·25정신’이야말로 헌법 전문에 추가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6·25정신이란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말살하려는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세계 만민과 힘을 합쳐 일어섰다’는 것에 그 핵심적 본질이 있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설이 된 지 오래지만, 6·25전쟁은 김일성의 스탈린에 대한 간청, 스탈린의 승인, 그리고 마오쩌둥의 지원으로 인해 가능했다. 그들의 공동 목표는 하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성공할 뻔했다. 1950년 8월 대한민국은 대구·부산 등 한반도 동남권으로 쪼그라들어 있었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북한의 공세는 거셌다. 대한민국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대한민국의 부활은 우선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적극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 소식을 듣고 즉각 이를 격퇴하기 위한 적극적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여 북한에 맞서기 위한 유엔의 결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16개 국가가 유엔의 깃발 아래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북한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0년 9월에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당시 자유 세계의 지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3년의 전쟁 동안 미군 사망자 약 3만7000명에 부상자는 10만명을 넘었다. 미국 외 참전국들 경우에도 사망 3000명 이상, 부상 약 1만2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쟁 비용 역시 막대했다. 당시 미국이 6·25전쟁에 지출한 전비는 대략 300억달러로 평가되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770억달러(약 570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북한 침공의 격퇴가 오로지 외부 지원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 역시 혼연일체가 되어 공산 세력에 맞서 싸웠다. 북한이 침공하면 한국군은 내부로부터 무너질 것이라는 김일성의 기대와 달리 북한의 기습 공격에 따른 피해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단계적으로 방어선을 재구축하며 질서 정연하게 후퇴했고 결국 다부동, 대구 라인에 최종 방어선을 설정했다. 여기서 국군은 유엔군 주력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 공산군의 침공을 막았다. 대한민국의 피해는 컸다. 6·25 당시 국군 전사자만 약 22만명(실종자 포함)에 부상자 약 43만명, 한국 측 민간인 사망자와 실종자는 무려 100만명에 달했다.
6·25를 계기로 세계사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한국은 비로소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냉전을 배경으로 자유 세계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안보와 경제 성장은 이제 사활적 문제가 되었다. 수만명의 자기네 젊은이들의 희생 끝에 지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박정희 등 한국의 지도자들 역시 이러한 정세를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안보 공약을 조약의 형태로 확보하여 한국의 안위를 도모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하에 한일 국교정상화를 성사시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적극 도입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한국 제품을 수출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통한 국가 안보의 확보, 세계 경제와의 긴밀한 교류를 통한 경제성장 등의 공식은 모두가 바로 6·25전쟁에서 우리 국민들이 강한 신념과 의지로 공산세력의 침략을 격퇴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 점에서 6·25는 단지 과거 어느 시점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추가하자던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도자들이 6·25정신에 반대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 6·25정신의 헌법 전문 삽입에 반대한다면, 그 이유를 꼭 알려주면 좋겠다. 나로서는 6·25정신을 반대할 이유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조선일보(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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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통일 논의

서독에서 독일 통일을 주관했던 정부 기관은 1949년 우파 기민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정부에서는 전체 독일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라는 의미의 연방전독문제부(聯邦全獨問題部·Bundesministerium für gesamtdeutsche Fragen)였으며, 1969년 좌파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 정부에서는 통일 문제는 독일 내부 문제라는 의미의 연방내독관계부(聯邦內獨關係部·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로 변경됐습니다. 두 명칭 어디에도 ‘통일’이라는 낱말은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거창한(?) 이름의 우리나라 통일부와는 다른 소박한 모습입니다.
서독은 정부 수립 시 동독을 별개의 국가로 보지 않고 독일의 한 부분으로 봤습니다. 동독 정권은 서독과는 달리 국민의 자유선거에 의하지 않고 소련 공산당에 의해 수립된 정통성 없는 불법 정권이라 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맺는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런 기조하에 연방전독문제부는 통일에 대비한 연구나 동독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등을 하는 최소한의 업무에 한정했습니다. 센 지남철에 약한 지남철이 끌리듯이 서독의 국력이 커지면 동독은 소멸할 것을 전제로 한 이른바 ‘힘 우위의 정책’입니다. 그렇기에 서독은 동독과의 공식적 접촉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 정권의 탄생은 독일 문제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독의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동독을 사실상 협상 상대방으로 인정해 긴장 완화와 인도적 교류를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소련 등 동구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를 도모하는 이른바 ‘동방 정책(Ostpolitik)’입니다. 기민당으로부터 반통일의 분단 고착정책이라고 비난까지 받았지만, 브란트는 여전히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기민당과 국민 정서를 고려하고 급격한 변화를 자제했습니다. 1982년 다시 우파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로 정권이 바뀌었으나 콜 총리는 동방 정책을 승계해 동독에 대한 지원과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소련 및 동구권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조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보이는 등 국제사회의 분위기 변화 속에서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 시 우연한 실수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 분출된 동독 주민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이듬해 10월 3일 통일이 됐습니다. 이처럼 독일 통일은 특별한 계획이나 노력에 따라 이룬 것이 아니라 그냥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 버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겸손한 자세로 잔잔히 자기 할 도리를 다한 독일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언젠가 통일을 이루어야 할 상대방이므로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노력은 필요하고 바람직합니다. 다른 한편 북한은 법률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이고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핵무기까지 개발하고 있는 만큼 안보상으로 철저히 대비해 도발하면 궤멸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이 양자는 모순되는 게 아니라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갖춰야 할 자세입니다.
정부 내 각 기관은 성격에 따라 각자 다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국방부와 국정원은 북한을 우리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고 국가안보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긴장 완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안보에 영향을 주는 어떠한 양보도 해서는 안 됩니다. 외교부나 통일부는 북한을 민족 동질성 회복과 교류 협력을 통해 통일을 함께 이루어야 할 세력으로 보고 관리하면서, 북한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인도적 지원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확고하게 취하면 보수·진보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일관성은 유지되고 그에 따라 남남갈등도 줄어들 것입니다.
통일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정권 차원에서 성과를 내겠다고 서두를 문제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전쟁 없는 평화 통일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통일을 훗날 역사의 운명에 맡겨 둬도 무방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조선일보(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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