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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과 초기 상황] [광화문 '감사의 정원' 논란] ....

뚝섬 2026. 6. 25. 09:14

[6·25 발발과 초기 상황]

[광화문 '감사의 정원' 논란]

[6·25 전선에 섰던 일본인…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6·25 발발과 초기 상황

 

北, 76년 전 오늘 '한반도 공산화' 야욕으로 남침

 

오늘(25일)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지 76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북한의 남침(南侵·북쪽이 남쪽을 침공함)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3년 넘게 이어지며 수많은 인명 피해와 국토 파괴를 부른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1945년 해방 후 북한의 노동절 행사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입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 침공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김일성의 좌절

 

1945년 8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어요. 그러나 소련군이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하면서 38선은 마치 국경처럼 변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에는 북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단순히 이 날짜만 보면 마치 38선 남쪽에 먼저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통일 정부가 좌절되고 분단이 이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946년 2월 북한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김일성 우상화를 본격화하며 토지 개혁, 산업 시설 국유화를 단행했고, 정식 정부 수립 전에 독자적인 화폐 발행과 군대 창설까지 마쳤습니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 했던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그 야욕이 좌절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 행보는 ‘군사력을 통해 38선 남쪽을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를 갖추게 된 김일성은 소련에 ‘남침을 할 수 있게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탱크가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는 모습. 당시 북한은 탱크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탱크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스탈린·마오쩌둥의 ‘남침 승인’ 받아

 

그런데 1950년이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회담을 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는 등 국제 정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필요한 경우 중국이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은 3일이면 끝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개입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마침내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 침공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의 냉전 대결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1949년 미군이 38선 남쪽에서 철수했고, 1950년 1월 미국이 극동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했던 것도 오판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해 5월, 김일성은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습니다.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북한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중국이 나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물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 모두 침략 전쟁의 책임자였던 것입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한 모습.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 서울 점령

 

1950년 5월 중순 이후 북한은 남침 준비를 급속히 진행했습니다. 소련이 보낸 무기와 장비가 북한에 속속 도착했고, 6월 15일에는 남침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6월 25일 모든 전선에서 전면전을 개시하겠다는 계획이었죠. 병력 수와 장비에서 북한군이 대한민국 국군보다 월등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북한군은 이때 탱크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에겐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일요일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습니다. 국군은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이미 25일 오전 9시에 개성 방어선이 뚫렸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까지 함락됐습니다. 북한군은 26일 오후 의정부를 점령한 뒤 27일 정오에는 창동 방어선을 넘었습니다. 이어 북한군의 전차는 미아리 방어선도 뚫었습니다. 28일 새벽엔 한강 이북의 서울 시내가 함락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피란을 갔고, 대다수 서울 시민은 북한군이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서 그대로 남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으니 김일성의 장담이 들어맞은 것일까요? 그러나 전쟁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군은 한강 방어선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유엔 안보리의 25일과 27일 결의로 북한군은 침략자로 규정됐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27일 미군에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6·25전쟁 도중 피란길에 오른 가족의 모습입니다.

 

춘천에서 버틴 국군, 남침 속도 늦춰

 

그런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 동안이나 한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공격을 멈추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수장으로 월북한 뒤 북한 부수상을 맡고 있던 박헌영이 ‘서울만 점령하고 기다리면 남조선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그 말을 믿고 기다렸는데, 봉기가 일어나지 않아 망연자실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국군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부 전선인 춘천의 국군 6사단은 27일 오후 6시까지 끈질기게 북한군의 침공을 막아냈고, 이후 전선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후퇴했습니다. 북한군은 30일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홍천에 들어설 수 있었고, 다음 날인 7월 1일 서부 전선에서도 한강을 건너기 위한 총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늦춘 지연전(遲延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훗날 전쟁 실패 이유에 대해 “초기에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후퇴 뒤 재정비할 시간을 줬던 것”이라 푸념했습니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다부동 전투로 국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고,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잃고 후퇴하는 1951년 1·4 후퇴를 겪었고,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6·25전쟁 76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1묘역에서 어린이집 원생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DB·노동신문 뉴스1·국사편찬위원회·뉴스1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김민기 기자, 조선일보(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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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감사의 정원' 논란

정치에 눈이 먼 어른들아, 철학이 어렵다면 전래동화라도 읽어보라


'은혜 갚은 까치'가 인간에 준 교훈
작은 호의도 모든 것 희생해 보답
낯선 땅서 목숨 바친 유엔군에게
'받들어 총' 운운은 몰상식한 비판
철학자 흄 "감사 망각은 끔찍한 죄"

 

생각이 잘못되면 행동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개념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과 인문학의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 본다. 

‘감사의 정원’은 밤에 가야 진가를 볼 수 있다. 6.25m 높이의 돌기둥 23개는 6·25에 참전한 유엔군 22국과 한국을 상징한다. 오후 8시에 하늘로 빛을 쏘아 올린다. 시민들은 이 조형물을 의자 삼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오종찬 기자

 

나그네 선비가 까치 둥지를 습격하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선비는 암컷 구렁이의 술수에 홀려 사람 없는 빈 암자에 붙들리게 되었고, 암구렁이는 언덕 위 종루에 있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종을 울려줄 자 누구인가. 절망에 빠진 선비가 체념할 즈음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온다. 구렁이가 물러나고 아침이 밝아 종루에 가보니 그곳에는 어제 구한 새끼 까치의 어미새들이 죽어 있었다. 나그네 선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종을 울린 것이다.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분명하다. 남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짐승마저도 은혜를 갚는다’는 식으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면 이솝 우화에는 ‘사자와 생쥐’가 있고, 일본에는 ‘학의 보은’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교훈의 취지는 대동소이하다. 남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특히 그 도움이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을 것.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지 말 것. 

 

은혜 갚은 까치

 

철학자들은 감사를 두 종류로 나눈다

 

감사(Gratitude)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평균 나이 79세 미국 여성 4만9275명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2024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망률이 29%나 낮았다고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조직이나 집단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감사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였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는가, 이 우주가 영원한 곳인가, 아니면 우리의 도덕적 삶은 어떤 이성적 근거 위에서 가능한가, 같은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만 해도 벅찰 지경이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1981년 영국 헐(Hull) 대학의 A. D. M. 워커가 ‘감사함과 감사’(Gratefulness and Gratitud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감사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2012년 위스콘신 대학의 션 매컬리어가 발표한 논문 ‘명제적 감사’(Propositional Gratitude)와 후속 논의들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오늘날 철학자들은 감사를 크게 둘로 나눈다. 첫째,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네요”라든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같은 ‘명제적 감사’가 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좋은 상태나 사건을 두고 긍정적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기쁨이나 안도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두 번째 유형의 감사, 즉 ‘전치사적 감사’(prepositional gratitude)에 주목한다. 전치사적 감사란 ‘...에게’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to’를 포함하는 감사다.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줘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는 수혜자(Y), 은혜를 베푼 사람(R), 그 사람이 한 행위(φ)가 포함되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격적(personal) 감사’라 할 수 있겠다. 

 

2016년 6월 23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추죄 6.25전쟁 제76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고운호 기자

 

더 큰 것을 희생하는 은혜의 비대칭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나그네 선비는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그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까치 부부는 수혜자가 되었고 선비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 되었다. 까치 부부는 선비에게 인격적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날 밤 수혜자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되었다. 손발이 묶인 채 붙들려 있는 선비를 위해 머리가 깨지도록 종을 들이받아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등장한다. 선비는 까치 새끼들의 목숨을 구했다. 자식은 목숨만큼, 아니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니 까치 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종을 친 것은 당연한 일 같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활 잘 쏘는 선비에게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거나 본인을 큰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작은 까치가 온 산에 울리도록 종을 치려면 머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지도록 종에 몸을 부딪쳐야 한다. 선비는 작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까치 부부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되갚았다는 이야기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격적 감사에 수반되는 구체적 행위는 대칭적이지 않다. 고마운 마음과 은혜를 서로 똑같이 1:1로 주고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치 구렁이를 쏘아 죽이는 일과 종을 울리는 일의 위험도가 같지 않았던 것과 같다. 감사할 일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벌어지며, 수혜자와 은혜를 베푼 사람의 관계 역시 많은 경우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철학적 논점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현실 세계에는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처럼 타인을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도 감사의 대상일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니, 다시 말해 자발적인 행위의 주체가 아니니, 따로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는 걸까? 

 

개전 한 달도 안 된 1950년 7월 20일,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진주해 들어오는 북한군 제3사단. /청미디어

 

유엔군에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일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북한의 기습 남침에 맞설 힘이 없었지만 약 한 달간 전열을 유지하며 후퇴하여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였다. 까치 둥지를 향해 구렁이가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전래동화와 달랐다.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은 유엔군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미국은 178만명이 참전해 3만6574명의 전사자를 냈고, 영국은 1078명의 자국 청년들의 생명을 바쳤다. 튀르키예,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그리스,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벨기에,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뉴질랜드는 모두 수백에서 수십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상식적인 보통 사람의 윤리적 직관이 향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이것은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일이다. 지구 반대편,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준마저 버리는 일이다. 지난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개장한 ‘감사의 정원’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평화를 상징해야 할 광화문광장에 ‘받들어 총’을 모티프로 한 기념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둥, 용산 전쟁기념관에나 설치되었어야 한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철학자의 사고실험에나 나올 이야기가 공론장에서 버젓이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단한 철학적 논의가 필요한 일조차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감사의 마음을 잊는 것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 중 가장 끔찍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치에 눈이 멀어 개념을 상실한 어른들에게, 철학이 너무 어렵다면 전래동화라도 읽어볼 것을 권한다. 

2022년 11월 11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 UN참전용사 국제추모식. /김동환 기자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조선일보(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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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선에 섰던 일본인…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6·25전쟁 참전국은 공식적으로 모두 22개국이다. 물론 일본은 아니다.

한데 17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개최한 6·25전쟁 제76주년 학술 세미나에선 다소 도발적인 주장이 나왔다. 일부 ‘참전 일본인’을 ‘참전 용사’나 ‘참전 영웅’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현직 교사인 박용준 씨(한국교원대 대학원)는 이날 발표에서 “‘참전국’이라는 틀은 전투부대 파병국과 정규군을 중심에 두는 탓에 실제 참전 양상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6·25전쟁 당시 일본이 물자 지원 외에 기뢰 제거와 군수 등 분야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1970년대 이후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북한군을 추격하기 위해 원산에도 상륙하고자 했지만 기뢰 3000여 발에 가로막혔다. 기뢰 제거(소해)에 동원된 게 일본 해상보안청의 소해정 46척과 1200명이다. 작전 중 기뢰에 접촉하며 배가 침몰해 나카타니 사카타로(당시 21세)가 숨지고 중경상자 18명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이 기뢰를 제거한 통로를 따라 미군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롯폰기의 미군 기지에 페인트공으로 취업했다가 사실상 전투원으로 참전해 1950년 9월 4일 가산 전투에서 전사한 히라쓰카 시게하루도 있다. 이처럼 6·25에 참전한 것으로 확인되는 일본인 개인이 대략 40명 정도로 파악된다고 한다. ‘일본이 6·25전쟁 특수를 타고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고만 알고 있는 우리에겐 낯선 이야기다.

발표자는 “참전 일본인들은 미일 양국 정부에 의해 존재가 은폐, 부정됐다”며 “이들을 ‘비정규군 공로자’로서 공적 기억의 장에서 기념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물론 이 주장엔 허점이 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통치했으며, 주권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동원’됐다는 뜻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알다시피 6·25전쟁의 원인은 분단이고, 분단의 기원은 일제의 강점이라는 데 있다. 군정을 벗어난 일본은 전쟁 막바지이던 1953년 여러 차례 관용선을 보내 독도에 상륙했고, ‘다케시마’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침탈하기도 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박성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소해정에 탄 이들은 일본 제국군 출신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억압한 군사력의 일부”라며 “그들을 보훈 서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식민지 피해국이 가해국 군사 체제 참여자를 ‘영웅’으로 호명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이런 ‘두 얼굴의 일본’은 이웃한 국가로서 좋건 나쁘건 그들과 긴밀하게 얽힐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는 걸 보여준다. 일본 NHK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쓰인 책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후지와라 가즈키 지음·소명출판)엔 태평양전쟁 당시 고아가 된 후 미군 일자리를 지키려다가 19세의 나이로 장진호 전투까지 겪은 다카쓰 겐조를 비롯해 다양한 개인의 서사가 담겼다.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 문제를 비롯해 일본의 과거사 왜곡이 여전한 가운데 ‘우리 정부 차원의 참전 일본인 기념’ 같은 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전쟁의 격랑에 휩쓸린 힘없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어디에선가 기억돼야 하지 않을까.

 

-조종엽 문화부 차장, 동아일보(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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