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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범재판] [대통령, 국가 興亡의 이치로 나라 돌아볼 때]

뚝섬 2024. 11. 20. 11:57

[나치 전범재판]

[대통령, 국가 興亡의 이치로 나라 돌아볼 때]

 

 

 

나치 전범재판

 

79년 전 시작된 나치 전범재판… 지금도 계속

 

오늘로부터 79년 전인 1945년 11월 20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선 역사적인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전범재판)이에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킨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한 최초의 재판이었죠.

 

재판이 열린 뉘른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던 ‘선전 도시’였습니다. 재판에 부쳐진 피고들은 나치 독일의 지도부였습니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를 비롯한 여러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았죠. 재판은 1946년 10월 1일까지 약 1년간 진행됐고, 피고 24명 가운데 1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당시 뉘른베르크의 현장으로 떠나보도록 할게요. 

 

1차 대전 후 전쟁범죄 인식 달라져

 

뉘른베르크 재판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전쟁을 통제하기 위해 전범재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제기돼 왔어요. 하지만 19세기까지 전쟁은 주권을 가진 국가의 고유한 권리로 여겨졌고, 승자와 패자가 나뉠지라도 전쟁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입니다. 당시 화학 공격 등 잔혹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면서 전쟁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전쟁 책임자를 국제법으로 단죄하는 대규모 재판이 치러지게 된 거예요.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연합국(영국·미국·소련) 지도자들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열고 전쟁 이후 독일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의논했어요. 이들은 독일의 주요 전범들을 붙잡아 재판에 넘길 것을 확정했고, 그해 여름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이 내용을 다시 확인했죠. 같은 해 8월엔 국제군사재판소가 설립됩니다.

 

재판부는 연합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에서 추천한 재판관과 검사로 구성됐어요. 반면 전범들을 변호한 변호사들은 주로 독일인이었습니다. 약 1년 동안 전범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증인만 해도 수백 명에 달했어요. 나치 협력자, 연합국 군 관계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등이었죠.

 

연합국은 나치 독일의 주요 지도자를 기소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나치 체제에서 중요한 정책 결정에 관여했거나, 대규모 학살 등 직접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었죠. 나치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을 포함해 24명이 기소되었습니다. 나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선전에 앞장섰던 요제프 괴벨스 등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피고가 아니었어요.

 

피고들에게는 2차 대전 전까지 없던 새로운 죄목 두 가지가 적용됐어요. 하나는 정당한 이유 없이 침략 전쟁을 벌이는 ‘평화에 반한 죄’였고, 또 하나는 유대인 등 민간인을 학살한 ‘반인도적 범죄’였어요.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됐는데, LP 레코드판으로 무려 2000장 분량이었다고 해요.

 

각국에서 전범재판 이어졌죠

 

전범들은 대부분 무죄를 주장했어요. ‘상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거죠. 기소된 24명 중 재판 진행 과정에서 죽은 사람 등을 제외하고 22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집니다. 12명에게는 사형이, 3명에게는 종신형이, 4명에게는 징역형이, 나머지 3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3명이 무죄를 받은 건 나치에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 직접적인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이유였죠. 사형이 집행된 후 전범들의 시신은 비밀리에 화장돼 강에 뿌려졌어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엔 왜 승전국의 전쟁범죄는 심판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이어졌어요. 그럼에도 전쟁범죄 책임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물은 이 재판은 국제법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아요. 게다가 훗날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나치의 잔인한 행적이 드러남으로써 나치 같은 극단적 집단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교육적 효과도 있었고요.

 

이후엔 연합국 주도로 나치의 법률가, 사업가, 의사, 엘리트 장교, 외교관 및 공무원을 피고인으로 한 후속 재판도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등 각국에서도 나치 전범이나 나치에 협력한 이들을 법정에 세웠어요.

 

독일 태도 바꾼 아이히만 재판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모든 전범이 단죄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전범이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거나, 해외로 도피했어요.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도 그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하는 역할을 맡으며 홀로코스트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죠. 독일 패전 이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거주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 끝에 1960년 체포됩니다. 이후 유대인 나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되죠.

 

아이히만에게 적용된 혐의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 15가지였습니다. 1961년 시작된 재판은 세계적인 화제가 됐고, TV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세계에 전해졌어요. 그는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어요. 그는 단순히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범죄를 조직하고 직접 실행한 책임자라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죠.

 

예루살렘에서 열린 이 재판은 나치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독일 내부에서도 재판 이후 역사적 책임에 대해 더 많이 반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어요. 독일은 국내 형법에 전범 처벌 규정을 둬 스스로 나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재판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과거사 청산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지난 8월에는 나치 시절 강제수용소에서 타자수로 일했던 99세 할머니가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나치의 집단 학살을 도왔다는 ‘살인 방조’ 혐의 등이 인정됐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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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국가 興亡의 이치로 나라 돌아볼 때

 

나라가 弱해지면 그 백성에게 역사의 惡役 돌아가
이승만 빼고 박정희 빼는 式의 '마이너스 歷史觀' 버려야

 

1948년 12월 23일 도쿄 국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A급 전범(戰犯) 7명의 형(刑)이 집행됐다. 육군 대장과 외교관 출신 총리 2명, 육군 대장 4명, 육군 중장 1명이었다. 전시(戰時) 일본 정부와 군(軍)을 이끌던 수뇌부였다. 미국은 일본 통치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저항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시 일본 '수뇌부 위의 수뇌'였던 천황(天皇)을 전범 소추 대상에서 배제하고 계속 재위(在位)를 보장했다.


거의 같은 시기 전쟁 중 일본이 점령했던 각 지역에서 전범 재판이 진행됐다. 재판 결과 조선인 BC급 전범 23명이 총살형 또는 교수형을 받았다. 전원이 포로수용소 감시원이었다. 포로 구타와 학대 혐의였다. 일본 군대에서 포로수용소 감시원 처우는 이등병보다 못했다. 군마(軍馬)나 군견(軍犬)만도 못한 존재로 천시(賤視)받았다.


조선인 포로 감시원 3016명은 타이·자바·말레이반도 지역에 배치됐고 이들 가운데 129명이 전범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기소율이 3.4%였다. 일본 역사가들은 군국주의 시대의 가장 악랄한 수족(手足)으로 헌병(憲兵)을 꼽는다. 헌병의 전범 기소율이 4.3%였다. 조선인 전범들은 한국이 독립하고 일본이 미국의 점령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일본 교도소에 남았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재판 당시 일본 국적'이란 이유로 석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석방 이후에는 일본 정부의 구군속(舊軍屬)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제는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걸 이유로 들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일본에 붙어먹은 부역자(附逆者)라는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다(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


올 3·1절은 의미가 각별하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이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겹쳐서다. 지나간 100년을 돌아보고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계기다. 걱정거리는 정부다. 작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이었다. 정부는 제대로 된 기념의 자리 한번 마련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 정권 주도 세력들은 이승만 시대 12년은 '친일 독재'로 역사에서 지웠다. 박정희 시대 17년은 '군사독재'로 밀어냈다. 전두환·노태우 시대 12년은 '대통령이 감옥에 간 시대', 이명박·박근혜 시대 9년은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시대'로 부인하고 보니 70년 역사에서 남는 게 없다. 그렇다고 김대중·노무현 시대 10년을 대한민국 역사의 전부라고 내세우기도 멋쩍었을 것이다. 작년 대한민국 총수출액은 중국·미국·독일·일본 다음이었다. 세계 5위다. 프랑스·영국·캐나다·러시아가 한국 뒤에 있다. 그런 나라의 역사가 10년밖에 안 된다면 세계가 웃을 일이다.


우리의 100년은 고난(苦難)의 역사. 식민지·해방·폭동·전쟁·혁명·쿠데타의 바퀴가 쉼 없이 돌아갔다. 함석헌의 말대로 '십자가를 진 역사'다. 그 바퀴에 깔려 죽지 않고 살아서 꽃을 피운 게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역사의 숨은 뜻을 바로 새겨야 한다. 조선인 포로수용소 감시원들의 운명은 나라가 쇠(衰)하면 그 백성이 침략의 피해자에서 가해자(加害者)로 바뀌어 법정에 서는 비극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할 당시 두 나라 인구 비율은 10대1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전 유럽에 널린 독일 수용소 감시원의 절반이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채워졌다. 역사의 악역(惡役)은 힘없는 나라 백성에게 돌아간다(토니 주트·포스트워(Post war).


3·1 절에 침략자 규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지도자는 대중의 함성(喊聲) 속에서 다른 소리를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당파(黨派)가 아니라 국가 흥망(興亡)의 이치로 나라 안을 살펴야 한다. 지도자가 국민의 편을 가르는 게 쇠망(衰亡)의 출발이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을 불신(不信)하는 것과 그런 북한을 신뢰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멀다. 불신에서 신뢰로 건너가려면 '의심의 지팡이'로 두드려 보는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지팡이를 든 국민은 '남북 간 적대(敵對)를 원하는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


돈이 일자리의 전부가 아니다. 젊은이에게 직업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과 독립성의 근본이다. 일자리를 달라는 그들 손에 일자리 대신 현금을 쥐여주는 정부는 무능한 정부가 아니라 죄(罪)짓는 정부다. 젊은이가 땀 흘릴 곳을 찾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감옥을 비워야 나라가 가벼워진다. 감옥이 가득찬 나라치고 미래로 나가는 나라는 없다. 3·1절에 대통령에게 이런 실천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강천석 논설고문, 조선일보(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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