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흔적
경찰 과학수사대 사무실 앞에서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현대 과학 수사의 개척자로 불리는 프랑스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접촉한 두 물체 사이엔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며 남긴 말이다. 실제로 범행 현장에 출동한 감식반원들은 범인이 무심코 스치고 지나갔을 법한 곳, 만졌을 법한 물건 등에서 1㎜도 안 되는 미소(微小) 흔적을 찾아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포렌식'은 휴대폰, 태블릿 PC, PDA 등 디지털 기기와 서버에 남아있는 범죄의 흔적을 찾아내는 기법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물리적 장소에서만 흔적을 찾는 게 아니라 '전자(電子) 흔적'을 뒤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소에 언제, 어떤 경로로 방문했는지와 같은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록을 지워도 금세 복원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용 인터넷 공간(클라우드)으로 자료가 넘겨져 흔적이 남는 경우도 있다. 한 수사관은 "휴대폰 포렌식을 하면 그 사람의 정신까지 몽땅 털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젠 일반인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걸 알아차리면 맨 먼저 해야 할 일로 '휴대폰을 한강에 버리는 것'을 꼽는다고 한다. '1도(망), 2부(인), 3빽'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 휴대폰은 방수 기능이 좋은 데다 수중 금속탐지기 성능도 탁월해 CCTV 등으로 던진 장소만 알면 얼마든지 강에서 꺼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대기업 임원은 "특수 장비로 휴대폰 몸체를 완전히 갈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검찰이 그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출신 수사관의 휴대폰을 경찰에게서 압수했다. 경찰이 애초 확보한 휴대폰을 검찰이 법원 영장을 발부받아 경찰서에서 압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러자 경찰은 "휴대폰 포렌식 과정에 경찰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검찰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여당 지지자들도 "검찰의 휴대폰 압수는 증거 인멸 시도"라고 공격한다. 조국씨 아내가 컴퓨터를 들고 나온 것을 '증거 보전'이라고 했던 궤변이 생각난다.
▶그런데 숨진 수사관의 휴대폰은 아이폰이라고 한다. 미국 FBI도 쩔쩔맬 정도로 비밀번호 보안 강도가 높다. 특히 신형 아이폰은 '비번을 모르면 잠금을 풀 가능성이 제로(0)'라는 말이 있다. 구형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검찰로선 마지막 관문이 남은 셈이다.
-박은호 논설위원, 조선일보(19-12-0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의자 靑·경찰이 한편 돼 검찰 공격, 기막힌 나라 꼴
청와대가 3일 '백원우 특감반' 출신 검찰 수사관 사망 등과 관련해 "(검찰이) 유서에도 있지 않은 내용을 거짓으로 흘리고 있다"고 했다. 전날엔 검찰이 자살 수사관 휴대전화를 압수하자 울산에 함께 간 경찰 출신 백원우 특감반원의 진술을 공개했다. 연일 검찰을 공격한 것이다. 청와대는 숨진 수사관이 "내가 개인적으로 감당할 일"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청와대 비리가 아니라 개인 문제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수사관
자살이 검찰 탓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 수사관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핵심 참고인이었다. 청와대는 그 수사관과 경찰
출신 특감반원이 '고래 고기' 사건 때문에 울산해양경찰서를
함께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해경은 그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고 사건 내용도 모른다고 한다. 청와대는 수사관이 울산지검도 방문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한
울산지검 간부들은 그 수사관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숨진 수사관은 다른 특감반 동료들에게는 '백원우팀'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위험해 겁이 난다고 했고, 숨지기 직전에는 "청와대가 유재수 수사 상황을 계속 캐물어
괴롭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당
울산시장에 대한 경찰 수사는 담당도 아닌 민정비서관이 경찰에 지시했다. 민정비서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울산 시장만이 아니라 울산 지역 야당 의원들 관련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모두 사실무근으로
결론 났다. '선거 공작'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청와대는 검찰에 대한 비난 공격에 나서고 있다. 민주당도 "검찰이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를 막기 위해 표적 수사 한다"
"법무부가 감찰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선거에 개입해 야당을 표적 수사 해놓고 검찰이 이를 수사하자 '강압 수사' '감찰하라'고 한다. 조국
사태와 판박이다.
경찰은 검찰이 수사관 휴대전화를 압수하자 자신들도 포렌식(자료 복원 작업)을 같이 하겠다고 요구했다. 지금 경찰은 피의자와 같다. '선거 공작'의 행동대로 경찰 자체가 검찰의 수사 대상이다. 지방선거에선 울산시장뿐 아니라 창원·양산·사천시장 등 경남 지역 야당 단체장들도 경찰의 소환 조사, 압수 수색을 당했다. 이 수사를 담당한 경남경찰청 책임자 역시 울산
수사 책임자와 똑같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비슷한 경우가 얼마나 더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수사 대상 피의자가 수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정권 들어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떼어오려는 경찰은 청와대의 행동대를 자처하고 있다. 드루킹
사건 때는 수사 경찰이 아니라 대통령 측근의 변호사처럼 행동했다. 이상한 야당 공격도 대부분
경찰이 한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청와대·경찰이 한편이 돼 검찰 수사를 방해하고 증거를
인멸하려 든다. 조만간 극렬 지지층 시위도 본격화할 것이다. 남미
같은 곳에서 보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날 조짐이다.
-조선일보(19-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