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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 [제국주의 전철 밟는 중국은 실패한다]

뚝섬 2026. 4. 22. 13:35

[쑨원(孫文)]

[제국주의 전철 밟는 중국은 실패한다]

 

 

 

쑨원(孫文)

 

중국선 '혁명가' 대만선 '국부' 양쪽서 위인 평가받아

 

올해는 중국과 대만이 모두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쑨원[孫文]의 탄생 160주년입니다.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연 혁명가이자, 중화민국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정리원 대만 국민당 주석이 중국 방문 일정을 마쳤는데요. 그는 장쑤성 난징의 쑨원 묘소 ‘중산릉’을 참배했어요. 쑨원은 어떤 인물이길래 양안(중국과 대만)에서 모두 위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요? 

 

지난 8일(현지 시각) 정리원 대만 국민당 주석이 중국 장쑤성 난징에 있는 중산릉에서 참배하고 있어요. 중산릉은 쑨원의 묘입니다. /AFP 연합뉴스

 

‘손대포’라 불린 의사 쑨원

 

쑨원은 1866년 중국 광둥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당시 광둥성에는 서양 열풍이 불어 많은 사람이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쑨원은 미국 하와이에서 사업을 성공한 형 덕분에 열두 살이 됐을 때 하와이로 가 4년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였는데요. 쑨원은 다양한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청나라의 낡은 정치·사회 시스템을 바꿔 근대 국가로 만들자는 ‘현실 개혁’을 꿈꾸게 됐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쑨원은 1887년 홍콩 서의서원(홍콩의대의 전신)에 입학해 5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1893년 광저우에서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의술을 베푸는 것보다 현실 개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헛된 주장만 늘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손대포’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대요. 대포처럼 큰소리만 친다는 뜻이었어요. 

 

1924년 촬영한 쑨원.

 

쑨원 납치·감금 사건

 

쑨원은 포기하지 않았고 인맥을 총동원해 당시 군사 지도자로 정계의 실세였던 리홍장을 만날 계획까지 세웠어요.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리홍장과의 만남이 무산되자, 쑨원은 중국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는 화교(외국에 사는 중국인) 사회의 도움을 얻으려고 하와이로 건너갔고, 1894년 11월 회원을 20명가량 모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자는 목표를 가진 단체 ‘흥중회’를 결성했어요.

 

이듬해 홍콩으로 돌아온 쑨원은 홍콩 흥중회를 조직하고, 광저우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조직적인 봉기를 준비했다는 사실만으로 청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고, 쑨원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쑨원은 이를 피하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를 떠돌아야 했어요.

 

그러다 1896년 쑨원이 납치돼 영국 런던에 있는 청나라 공사관에 감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쑨원이 서의서원에 다니던 시절 은사였던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캔틀리 교수의 노력으로 영국 언론에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어요. 쑨원은 ‘청나라에 쫓기는 혁명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가 영문으로 출판한 ‘런던 조난기’가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죠. 

 

쑨원(왼쪽에서 둘째)이 홍콩 서의서원 재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협력

 

이후 쑨원은 여러 차례 봉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를 통해 쑨원과 혁명 세력은 더 조직적이고 통일된 혁명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그렇게 1905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기존의 흥중회를 통합한 전국적 혁명 조직 ‘중국동맹회’를 결성했습니다. 중국동맹회는 중국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됐습니다.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성 우창에서 신식 군대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 혁명이 시작됐어요. 당시 해외에 있었던 쑨원이 이 봉기를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동안 구축한 조직과 사상이 기반이 된 것이죠.

 

이후 중국으로 돌아온 쑨원은 1912년 1월 난징에서 임시 정부 건립을 주도하고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어요. 하지만 혁명을 완전히 성공시키려면 당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쑨원은 그에게 임시대총통 자리를 넘기는 대신,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켜 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결국 1912년 2월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중국 역사에서 황제는 사라지게 됐습니다. 새로 수립된 국가의 이름은 ‘중화민국’이 됐죠.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새로 수립된 공화국의 발전보다는 자신의 권력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1912년 총선에서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당수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회를 해산시키는 등 독재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혁명 세력의 봉기도 실패하면서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가 중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1915년 12월 중화제국의 황제로 자신의 통치를 선포했지만 전국적 반발에 부딪혀 정치적 기반이 급격히 흔들렸습니다. 이에 힘입어 쑨원은 이듬해 4월 중국으로 돌아왔고, 약 두 달 뒤 위안스카이는 건강 악화로 사망했어요. 

1911년 중국 후베이성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킨 신식 군대 포병들(왼쪽). 1915년 위안스카이의 모습. /위키피디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각지에서 그의 후계를 자처하는 군벌이 등장해 수도 베이징을 장악했고, 쑨원은 고향인 남쪽 광둥성에서 별도의 정부를 세운 채 수도를 되찾아 국가를 통일하려 했습니다. 한편 위안스카이의 탄압으로 기존 국민당이 무너진 뒤,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가 이를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했습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해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고 있었고, 중국에서도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됐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공산당의 힘만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기 어렵다고 보고, 중국 내부에서 협조할 사람을 물색했죠. 이때 낙점된 인물이 바로 쑨원이었어요. 쑨원은 소련에게 재정·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신, 중국공산당과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제1차 국공합작’이라고 합니다. 쑨원은 중국공산당의 협력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층까지 지지 기반을 넓혀 갔지만, 이 무렵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1925년 3월 12일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쑨원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쑨원 사후 쑨원이 이끌던 중국국민당과 협력 관계였던 중국공산당은 갈등을 겪으며 내전에 들어갔고, 결국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해 중국 본토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습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이동해 중화민국을 유지하게 되면서 오늘날처럼 양안으로 나뉘었어요.

 

그럼에도 쑨원은 양쪽 모두에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정치 체제는 서로 달라졌지만, 두 지역 모두 쑨원을 현대 중국의 출발점으로 보는 공통된 인식을 갖는 것이죠.

 

-서민영 경기 군서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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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전철 밟는 중국은 실패한다

 

中, ‘제국의 책임감’ 역설 쑨원에 귀 기울여야
“약소민족 도와야 치국평천하”
 

 

신해혁명으로 근대 중국을 건설한 쑨원(孫文). [위키피디아]

정치적 의미에서 중국의 20세기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시작됐다. 쑨원(孫文·1866~1925)은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주역이다. 국민당과 중화민국을 만들어 근대 중국을 열어젖혔다. 현대 중국에서 쑨원은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혁명의 상징으로 통한다.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


마오쩌둥과 차이점은 쑨원이 타이완과 홍콩에서도 국부로 추앙받는다는 점. 쑨원은 중국공산당에는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킨 걸출한 지도자다. 타이완 국민당 정권에는 당 창시자이자 정통성의 상징이다. 홍콩에서는 광둥성 출신으로 서의서원(西醫書院: 현 홍콩대 의과대학) 1기생인 쑨원을 홍콩인으로 본다. 21세기 ‘중국몽(中國夢)’을 표방한 시진핑 체제에 쑨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00년 전 세계 질서의 재편 속 쑨원은 당대 중국 운명을 결정했다. 쑨원의 정책과 사상을 지금 재음미해야 하는 이유다.

 

쑨원 사상의 총집약체는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 삼민주의(三民主義)다. 그는 1905년 일본에서 결성된 동맹회 기관지 ‘민보(民報)’ 창간사를 통해 민족·민권·민생 3대 주의를 처음 제시했다. 민보 제1호 첫머리 도판에 ‘중국 민족의 개국시조 황제’ ‘세계 제일 민권주의 대가 루소’ ‘세계 제일 공화국 건설자 워싱턴’ ‘세계 제일 평등박애주의 대가 묵자(墨子)’의 초상도 함께 실어 삼민주의를 이미지로도 표현했다.

 

쑨원 사상을 분석해보면 근대 중국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구상이 교차한다. 당장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동시에 먼 미래 중화제국을 다시 꿈꾸는 이중성이 공존한다. ‘헌정(憲政) 질서로 도약’과 ‘제국의 책임감’은 20세기 중국 지도자들의 사고를 관통한다. 쑨원은 신해혁명으로 근대 중국을 열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1949년 신(新)중국을 선보였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무위지치(無爲之治)로 중국을 잘살게 만든 주인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내다봤다는 것이다시진핑이 중국사의 새 이정표를 세우려면 앞선 지도자들처럼 현실에 발 딛고 50~100년 미래 가치를 준비해야 한다.

중국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최종 심급은 ‘역사의 포폄’(褒貶: 시비·선악에 대한 평가)이다. 지금처럼 사상·언론을 통제하고 ‘강한 중국’(super China)만 추구해서는 후대 역사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지금은 유교 부흥과 흉노 정벌로 ‘팍스 시니카’를 이룩한 한나라 무제(武帝)의 시대가 아니다. 현 중국 판도를 사실상 완성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시대도 아니다. 부강을 추구하되 부강을 초월한 가치, 즉 현대 중국을 위한 ‘헌정의 기획’이 나와야 한다.

 

‘당이 통치하는 나라’ 중국 

 

지난해 5월 20일(현지 시각) 차이잉원(蔡英文) 타이완 총통이 타이베이 총통부 강당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해 쑨원 초상화 앞에서 선서하고 있다. [AP=뉴시스]


쑨원은 정치가 군정(軍政), 훈정(訓政), 헌정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봤다. 각각 군치(軍治), 당치(黨治), 법치(法治)에 대응하는 정치 단계다. 군정은 계엄 상태에 버금가는 혼란기에 필요한 통치 형태다. 훈정은 인민을 근대적 시민으로 교육하고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단계다. 헌정은 헌법에 따라 시민의식을 가진 국민들의 투표로 공화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2013년 시진핑 집권 당시 광저우 언론 ‘난팡르바오(南方日報)’는 ‘입헌제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놓았다. “헌정을 실시하고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체계가 작동해야 국민이 권력에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기대는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이 사설은 시진핑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남쪽에서 불어온 훈풍은 베이징에 도달하기 전 이렇게 식어버렸다.

중국공산당은 현 시대를 훈정기로 보는 듯하다. 1987년 자오쯔양(趙紫陽)이 밝힌 “‘사회주의 초급 단계’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100년간 필요하다”는 발상과도 통한다. 신해혁명 후 쑨원이 세운 정부의 최대 정치적 과제는 주권재민의 국민국가 창출이었다. 당대 중국 지도자들은 이러한 정치적 목표를 이루고자 ‘정당이 국가를 통치(以黨治國)’하는 정치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이는 곧 국가 통합 원리로서 훈정적 국민주권제로 귀결됐다. 당이 국가와 국민을 가르치고 다스린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당국체제(黨國體制·party-state system)도 여기서 비롯됐다. 중국은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당이 국가를 창출하는 정당국가(party-state) 시스템에 따라 운영돼온 셈이다.

오늘날 쑨원을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정치혁명뿐 아니라 사회혁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삼민주의의 한 축인 민생주의가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미래 가치로 조명됐다. 민생주의는 균등한 토지 소유권을 뜻하는 ‘평균지권(平均地權)’으로 구체화돼 당대 강력한 변혁 슬로건으로 자리매김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쑨원은 소련 외무부 대표 아돌프 이오페와 ‘쑨원-이오페 선언’을 발표했다. 중국 국민당과 소련 간 협력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듬해 쑨원은 소련과 연합하고(聯蘇), 공산주의 주장을 수용하며(容共), 노동자와 농민을 돕는다(扶助農工)는 내용을 추가해 신(新)삼민주의를 탄생시켰다. 이는 국공합작(國共合作)의 토대가 됐다.

21세기 중국에서 쑨원의 ‘왕도문화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24년 쑨원은 일본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주제로 연설했다. 무력에 기초한 서양의 패도(覇道)에 맞서 동양 각국이 연대해 도덕 중심의 왕도(王道)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대아시아주의는 중국과 비(非)중국 아시아 국가의 시각차가 큰 사상이다. 오늘날 중국의 ‘네오 시노센트리즘’(neo-sinocentrism: 신중화주의)이나 현대판 ‘조공 체제’ 모델 구상의 사상적 원천이기도 하다.

 

서양 패도에 맞선 동양 왕도


쑨원도 제국을 꿈꿨을까. 그는 티베트, 몽골뿐 아니라 타이, 버마, 부탄, 네팔 등을 중국 지배하에 둬야 한다고 봤다. “우리 (중국) 4억 인은 매우 평화롭고 문명적인 민족이다중화제국의 전통을 지킨 덕에 동남아시아 소국들은 중국에 조공하고 귀화하고자 했다그들이 중국 문화를 흠모했을 뿐, 무력으로 굴복시킨 것이 아니었다며 왕도문명 실현을 그 명분으로 삼았다. 다만 쑨원은 삼민주의 중 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만일 중국이 힘을 키우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배워 다른 나라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들의 실패한 자취를 뒤쫓는 것이라며 약소민족이 (오늘날 중국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면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그래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이뤄진다고도 지적했다.

1924년 쑨원은 당시 중국을 식민지만도 못한 차식민지(次植民地)로 규정했다. 차식민지의 중국인 4억 명이 책임 주체로서 우뚝 서야 참된 민족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100년 전 중국 정치 발전의 미래와 제국으로서 책임을 역설한 쑨원. 시진핑 시대 중국이 진정한 G2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그의 사상을 되새겨야 한다.

 

조경란 교수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국현대사상·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주간동아(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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