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기다리는 잡초의 생존 전략]
[잡초]
때를 기다리는 잡초의 생존 전략
서울 중구의 시각장애인 유도 블록 틈에서 피어난 개망초, 2025년 5월/ 조인원 기자
풀이 무성한 이 계절엔 어디든 잡초가 흔하다. 쉽게 자라지만 뽑아도 또 나오는 게 잡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 자라나서 빈 집이나 인적 없는 골목, 가로수 그늘에서도 잡초는 잘 산다. 하지만 잡초라는 풀은 없고 저마다 이름을 가진 식물이다.
잡초의 생명력을 알게 된 첫 기억은 대학 때 농촌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벼가 무성한 논에서 자라는 피를 뽑았는데, 피는 뽑아서 버린 하수구에서도 안 죽을 만큼 생명력이 강했다. 같은 벼과 식물로 맛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 피는 벼가 자라는데 방해된다고 가장 먼저 제거되는 잡초다.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2호선 당산역 출구 옆에 핀 오동나무. 2024년 (좌)/서울 중구의 한 건물 기둥 틈에 피어난 중대가리풀, 2025년 4월 /조인원 기자
다음 잡초의 기억은 군대에서 였다. 봄부터 초가을까지 근무나 훈련이 아니면 목장갑에 낫 한 자루 쥐어 주고 무조건 나가서 잡초제거라는 낫질을 해댔다. “낫 세 자루는 닳아야 제대 한다”며 말년 병장들은 잡초가 무성하면 적이 안보여서 군대도 아니라고 했다. 사실 군 시절의 태반은 잡초 제거로 보냈다. 휴가 나오면 사격이나 훈련, 점호 같은 군인 다운 경험만 강조했지만.
경남 고성군의 국도변에 있는 빈집 주변으로 칡넝쿨이 덮혀 있다. 2018년 9월(좌)/서울 동작구의 한 빈집을 점령한 미국자리공, 2020년 /조인원 기자
또 사진기자가 되어 지방을 갈 때마다 빈집들을 찍었는데 다 쓰러져가는 폐허에서 맨 먼저 보이는 건 푸르게 자라난 잡초들이었다. 풀들이 무성할수록 얼마나 오래 방치된 집인지 알 수 있다. 어쩌면 지구에서 주인은 사람보다 어디든 잘 자라는 잡초가 아닐까 생각했다.
서울 중구 황학동 골목의 방치된 쓰레기 틈에서 자라는 오동나무, 2025년 5월(좌)/서울 서대문구의 철거예정인 한 상가건물 앞에 피어난 잡초, 2024년 9월/ 조인원 기자
사실 잡초 중에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고 있는 것도 많다. 쑥은 떡이나 차, 약으로 먹고 민들레나 돌나물도 약효 뿐 아니라 반찬으로도 자주 먹는다. 질경이, 명아주, 개망초 등도 된장국에 넣어 먹거나 국거리, 무침으로 사용되지만 아무 곳이든 자라니 잡초로 분류될 뿐이다.
서울 성동구 아파트 상가 에어컨 실외기 앞에서 자라는 고들빼기, 2025년 5월(좌)/서울 동대문구 성북천 옆 벽사이로 핀 고들빼기꽃, 2025년 5월/ 조인원 기자
도심에서 자라는 잡초는 나무와 풀이 무성한 숲이나 산에서 다른 종자들을 피해 비교적 강자들이 없는 도시로 나온 도망자들이다. 식물도 주변에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자라나는) 경쟁자들이 있으면 그만큼 살기 어렵다. 일본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사람들이 발아 시기를 알고 씨를 뿌리는 채소와 다르게 잡초는 당장 싹을 틔우지 않는 대신 “발아에 적합한 ‘시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서울 중구의 시멘트 바닥에 난 구멍으로 핀 개망초, 2025년 5월/ 조인원 기자
그렇다면 잡초는 언제 싹을 틔울까? 잡초를 포함한 야생식물은 땅 속에서 숨어 있다가 봄의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서 나오는데, 전제 조건이 겨울 추위 같은 저온을 경험한 후로 이를 ‘저온 요구성’이라고 했다. 새싹이 나오기 위해 묵묵히 몇 년 혹은 몇 십 년도 기다리는 씨앗이 있다.
잡초가 종자를 번식하기 위한 노력은 기다림만이 아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꽃을 피우거나 씨앗을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새의 분비물 속에 혹은 길가나 차도에 피어나 사람들의 신발이나 자동차 바퀴에 묻어 멀리 씨를 퍼뜨린다.
서울 양천구의 교각 틈새에 핀 바랭이와 강아지풀, 2024년 6월(좌)/서울 청계천 자전거 전용도로 틈에서 자라난 개갓냉이, 2025년 5월 / 조인원 기자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도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맞게 변하는 생명들만 살아 남는다고 했다. 지금 지구상에 모든 생명은 변화에 적응해서 남은 후손들인 셈이다. 후미진 골목 구석에 박혀 있는 저 흔한 잡초도 살기 위해 그러는데 사람이 어떻게 변화를 피할까. 세상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위험을 감수해도 변하는 길 밖에 없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기둥과 바닥 사이에 핀 미국쥐손이, 2025년 5월(좌)/서울 동대문구 성북천변에 핀 개망초, 2025년 5월/ 조인원 기자
-조인원 기자/자문: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닷컴(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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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국립수목원, 첫 잡초 전시회… 흔한 풀 40여종 모델로 등장
바랭이는 '잡초의 대명사', 망초·개망초도 요즘 왕성
잡초는 이름 없고 쓸모없다? 다양한 용도 대비해 보존해야
요즘 경기도 포천 국립수목원에서는 이색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논밭은 물론 보도블록, 공터, 습지에서 자라는 잡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회 제목은 '잡초를 보는 새로운 시각, 잡초에 반하다'. 토끼풀, 서양민들레, 냉이, 쑥, 질경이, 애기똥풀 같은 잡초들이 원래 사는 환경과 유사하게 꾸민 전시대에 올라 있다. 국립수목원은 "잡초가 더 이상 '이름 없고 쓸모없는 풀'이 아니라 각자 특징과 이름을 가진 생태계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수목원 직원 이진아씨는 "아침마다 물을 주는데 잡초들이 이런 귀한 대접을 받기는 처음일 것"이라며 웃었다. 국내에서 잡초 전시회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양평에서 온 손기영(64)씨는 "잡초도 전시대에 놓으니 근사하고 하나하나 예쁘다"며 "집 화단에서 잡초를 뽑아내면서도 미안하긴 했다"고 말했다.
잡초(雜草)는 사람이 재배하는 작물(作物)의 상대적인 개념인데, 인간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수목원은 잡초를 '사람이 관리하지 않은 식물'로 해석했다. 그러다 보니 어엿한 야생화로 생각해온 꽃들도 잡초 목록에 올라 있다. 씀바귀나 꿀풀은 몰라도 금창초나 꽃향유, 영아자 같은 꽃들은 잡초 취급을 받는 것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모두 128개 잡초를 찾아 이 중 요즘 볼 수 있는 잡초 40여종을 전시했다. 수목원 구석구석에서 잡초를 찾아보는 체험행사도 하고 있다. 전시회는 11일까지 열린다.
주변 식물에 관심을 갖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잡초다. 이들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고 작고 가벼운 씨앗을 대량 생산해 맹렬하게 퍼뜨리기 때문에 주변에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강아지풀, 쑥, 서양민들레에다 바랭이, 왕바랭이, 망초, 개망초, 쇠비름, 명아주, 환삼덩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위-좌로부터) 바랭이(2)-왕바랭이/(아래)망초-개망초-금창초
바랭이는 잡초의 대명사다. 지면을 기면서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는 방식으로 빠르게 퍼져 밭이나 과수원, 길가를 순식간에 장악한다. 뽑아내도 한 마디만 남아 있으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뽑아도 뽑아도 계속 생긴다. 농민 입장에서는 이런 원수가 없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는 "(잡초 중에서) 젤 징글징글헌 놈"이라고 했다. 반면 일본 잡초생태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풀들의 전략'이란 책에서 부드러운 기품과 빠른 세력 형성을 들어 바랭이를 '잡초의 여왕'이라고 했다.
(좌로부터) 꽃향유-영아자-강아지풀-서양민들레
왕바랭이는 옆으로 퍼지지 않는 대신 여러 줄기가 뭉쳐서 밟혀도 별 문제 없는 몸을 만들었다. 억세고 다부지게 생겨 남성적이다. 땅속으로 뻗는 뿌리도 깊어 여간해선 잘 뽑히지도 않는다. '풀들의 전략'에서는 왕바랭이의 굵은 이삭이 '호걸의 짙은 눈썹' 같다고 했다.
망초와 개망초 구분은 야생화 공부의 시작이다. 야생화 모임에 가면 "내가 망초와 개망초도 구분하지 못했을 때…"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요즘 공터에서 꽃 핀 개망초와 쑥쑥 크는 망초 무리를 흔히 볼 수 있다. 개망초는 꽃 모양을 제대로 갖춘, 그런대로 예쁜 꽃이다. 흰 혀꽃에 노란 중심부를 보고 아이들이 '계란꽃' 또는 '계란후라이꽃'이라 부른다. 반면 망초는 꽃이 볼품없이 피는 듯 마는 듯 지는 식물이다. 식물 이름에 '개'자가 들어가면 더 볼품없다는 뜻인데, 개망초꽃은 망초꽃보다 더 예쁘다. 망초라는 이름은 개화기 나라가 망할 때 들어와 전국에 퍼진 풀이라고 붙여진 것이다.
(좌로부터) 왕바랭이-쇠비름-명아주-환삼덩굴-냉이
쇠비름은 가지를 많이 치면서 사방으로 퍼져 방석 모양으로 땅을 덮는다. 뽑더라도 그대로 두면 다시 살아날 정도로 끈질기다.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잡초를 가장 실감 나게 묘사한 소설은 천명관의 장편 '나의 삼촌 브루스 리'다. '쇠비름보다 더 악랄한 새끼!' '뽑아내도 뽑아내도 질기게 다시 뿌리를 내리는 쇠비름처럼…' 같은 대목이 있다. 명아주도 어디에나 흔하디흔한 잡초의 하나다. 줄기 가운데 달리는 어린잎이 붉은빛이나 흰빛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다 자란 명아주를 말려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靑藜杖)이라 하는데, 가볍고 단단해 지팡이로 제격이다.
국립수목원 전시회에 나온 풀들은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호강에 쑥스러운 듯했다. 새삼 풀들이 예쁘게 보였다. 요즘 잡초의 다양한 용도에 대한 탐색이 한창이다. 냉이·민들레처럼 건강식으로 각광을 받는 식물도 있고 개똥쑥은 항암작용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보기도 힘들어졌다. 잡초의 놀라운 생명력을 작물에 결합시키면 병충해에 끄떡없는 품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용도에 대비해 잡초도 잘 보존하며 활용 방안들을 찾아가야겠다.
-김민철 기자, 조선일보(1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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