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이후 급속 성장한 일본?]
[사쓰에이(薩英)전쟁]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 성장한 일본?
에도 시대 이미 '100만 도시'
신상목 지음|출판사 뿌리와이파리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광복절은 해방의 기쁨이 담겨 있는 날이지만, 동시에 씁쓸한 역사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 통치를 견뎌야 했던 우리의 역사. 그때마다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쉽게 나라를 빼앗겼을까?” 그러나 진짜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쪽일지 모릅니다. “어떻게 일본은 그토록 빨리 강해졌는가?”
오늘 소개할 책은 그 답을 에도 시대(1603~1868)에서 찾습니다. 흔히 일본 근대화 성공의 이유로 ‘메이지 유신’을 꼽지만 저자는 260년간 이어진 에도 시대에서 그 뿌리를 발견해요. 사실 우리는 에도 시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사무라이가 칼을 차고 다니던 시절 정도로만 인식하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에도 시대 일본은 유럽 대도시를 능가할 정도의 소비력과 상업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허허벌판이었던 에도(지금의 도쿄)에 대규모 수로와 운하를 건설하며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냅니다. 여러 인프라가 들어선 에도는 급속 성장했고,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인구 100만을 자랑하는 거대 도시가 됩니다. 당시 파리 인구가 약 50만이었음을 생각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에도 시대의 번영은 특히 ‘참근교대(參勤交代)’라는 제도 덕분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이는 지방 다이묘(영주)들이 일정 기간마다 반드시 수도인 에도에 머무르도록 한 제도였는데, 수많은 다이묘와 수행원이 에도에 체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소비 시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건축, 운송, 숙박, 외식, 공연 등 수많은 산업이 생겨났고, 경쟁과 혁신을 통해 상업적 활기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지요. 잇따라 화폐 경제와 금융 서비스도 발달했고, 출판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18세기 중반 일본은 연간 100만명 이상이 전국을 여행하는 관광 선진국이기도 했습니다. 각종 숙박 시설과 관광 명소, 유흥 산업도 이에 따라 발전했지요.
지식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사전 편찬과 번역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이 개항했을 때 빠르게 서양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즉 에도 시대의 축적된 역량이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일본의 빠른 근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일본을 칭송하지도 조선을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데 왜 이렇게 다른 길을 걸었는지 냉정히 짚어보기를 권하지요.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과거를 성찰하는 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진혁 출판 편집자, 동아일보(25-06-26)-
______________
사쓰에이(薩英)전쟁
1865년 3월, 사쓰마번의 작은 포구 하시마(羽島)에서 15명의 앳된 소년들이 증기선에 오른다. 번주의 명으로 비밀리에 영국 유학을 떠나는 소년들이었다. 배에 오른 소년들은 촌마게(사무라이 상투)를 풀어 단발(斷髮)하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1862년 8월, 일본은 '나마무기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다. 요코하마 개항지 인근의 나마무기(生麥)를 지나던 사쓰마 다이묘(大名) 행렬에 영국인들이 말을 타고 끼어들어 행렬이 흐트러지자 사무라이가 이들을 베어 버린 사건이다. 영국 정부가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사쓰마는 외국인들이 일본 법도인 하마평복(下馬平伏·말에서 내려 몸을 낮춤)의 예(禮)를 어긴 데 대한 정당한 조치였음을 들어 책임을 부인한다.
1863년 8월, 영국은 6척의 군함을 사쓰마로 보내 무력시위에 나섰고, 도발에 자극받은 사쓰마의 해안 포대가 포문을 열면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소위 '사쓰에이(薩英)전쟁'의 발발이다. 피격을 당한 영국 함대도 피해가 상당했으나, 시내가 불바다에 휩싸이며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된 사쓰마의 사실상의 패배였다.
사쓰마의 지사(志士)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서양으로부터 배워야 함을 절감한다. 가장 역점을 기울인 것은 인재 양성. 1864년 양학 교육기관인 가이세이쇼(開成所)를 설립하고, 이듬해 우수생을 선발하여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모두에 언급한 소년들이다. 어제의 적(敵)이던 영국은 발상을 전환한 사쓰마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유학생 중의 한 명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는 영국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1872년 일본 최초의 외교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주영 공사, 외무차관이 되어 서구 열강과의 외교 현장에서 활약한다. 메이지 시대는 '싸움에서 지는 것은 분한 것이지만, 승자에게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발상이 낳은 인걸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8-12-28)-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世界-人文地理]'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요한계시록] .... (3) | 2025.06.25 |
---|---|
[200년 가까이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음악가의 스승] (0) | 2025.06.24 |
[광고사진가가 찍은 몽골의 거대한 풍경] [몽골 황사 바람] [몽골] (0) | 2025.06.24 |
[미국은 왜 미터법을 쓰지 않는 걸까] (0) | 2025.06.24 |
[2차 대전 승리 비결은 총이 아니라 '美 공장'이었다] [히로시마] (0) | 2025.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