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노잼 도시’ 대전? 빵이 살렸다]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

뚝섬 2024. 5. 12. 09:03

[‘노잼 도시’ 대전? 빵이 살렸다]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대전 성심당] 

[식민시대, 그 이중적인 삶과 기억과 군산에 남은 흔적들]

 

 

 

‘노잼 도시’ 대전? 빵이 살렸다

 

빵 먹으러 지방 가서 유원지도 들른다 

 

흑돼지 삼겹살도 아니고, 송어회도 아니고, 하모 샤부샤부도 아니다. 단팥빵, 소보로빵, 크림치즈빵일 뿐이다. 하지만 요즘엔 그 빵을 사 먹기 위해 시간을 내서 일부러 그곳에 간다. 몇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전날 밤 기차를 타고 가서 줄을 서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원하는 빵을 손에 쥐면 이왕 돈과 시간을 들인 김에 그 지역 관광지나 맛집도 찾아 들어간다. 지금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이런 ‘빵의 경제학’이 쓰이고 있다.

 

그 중심에 대전의 동네 빵집 ‘성심당’이 있다. 빵 맛을 본 MZ세대는 “대전이 왜 노잼 도시냐”고 되묻는다. 대전역에서 일단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를 잔뜩 산 뒤 조금씩 떼 먹으면서 걸으면 어딜 가도 꿀잼이라는 농담까지 한다. 어느덧 대전은 노잼 도시를 탈출했다. 대전 사람들조차 “성심당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입을 모은다. 빵이 이 도시를 살렸다.

 

빵 때문에 KTX 탑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사진 한 장이 화제였다. 대전역 물품 보관함에 성심당 빵 봉투가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역내 성심당 분점에 들러 빵을 잔뜩 사서 보관한 것. ‘돌아갈 때 사도 될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뭘 모르는 참견이다. 현명한 관광객들은 ‘품절돼서 못 먹느니 보관료 1000원 내고 맡기는 쪽’을 택했다.

 

1956년에 문을 연 성심당의 대표 메뉴는 1700원짜리 튀김소보로, 2000원짜리 판타롱부추빵이다. 과일이 수두룩하게 들어있는 딸기시루, 망고시루 케이크는 줄을 서야만 살 수 있다. 과일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이 케이크는 주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과일을 가득 넣었다. 그러니 몇 시간이 걸려도 이걸 먹겠다고 대전에 간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이 케이크를 산 사람이 가격을 2~3배까지 올려 되팔이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성심당 가려고 대전 갔다”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대전에 갔다가 한밭수목원, 엑스포 과학공원 등도 들렀는데 볼거리가 꽤 있다는 얘기도 많다. 한 유튜버는 “대전 엑스포가 열린 게 한옛날인데 꿈돌이 굿즈숍에 가니 너무 반갑더라”며 “정신이 팔려 몇 만원을 썼다”고 했다. 성심당 효과가 지역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 성심당의 작년 매출은 1243억원. 전년(817억원) 대비 50% 넘게 늘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를 빼고 빵집이 1000억원을 넘긴 첫 사례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104.5% 늘어난 315억원. 매장 수천 개를 가진 파리바게뜨(3419개), 뚜레쥬르(1316개)의 영업이익을 추월했다.

 

전북 군산의 이성당도 비슷하다. 작은 항구도시쯤으로 각인돼 있는 이 지역에서도 생선회가 아니라 빵이 대표 음식이 됐다. 군산에 들르면 밥은 안 먹어도 이성당 빵은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단팥빵은 2000원, 야채빵은 2500원. 1945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원하는 빵을 살 수 없을 때가 많다. 20여 년 전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당당하게 군산에 상륙했다가 이성당에 밀려 문을 닫는 굴욕을 겪었을 정도. 이성당 빵 맛에 익숙해진 주민들이 프랜차이즈를 외면했다. 이성당도 작년 매출 266억원을 찍었다. 지역에선 “군산이 ‘먹방’ 여행지가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게 이성당”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 밖에 경북 안동 맘모스제과의 크림치즈빵, 전북 전주 풍년제과의 초코파이, 광주(光州) 궁전제과의 공룡알빵·나비파이도 그 도시에 가면 꼭 맛봐야 하는 메뉴로 꼽힌다. ‘빵지순례’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특정 브랜드라기보다 지역을 대표하는 빵도 있다. 충남 천안 호두과자, 경북 경주 십원빵, 경남 통영 꿀빵, 경북 울진 대게빵 등이다. 이 빵을 먹기 위해 이 지역을 찾진 않지만 이 지역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이 빵을 사 먹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역시나 줄을 서야 할 때도 더러 있다.

 

성심당 빵으로 꽉 찬 대전역 물품보관함 /인터넷 커뮤니티

 

왜 하필 빵일까

 

빵은 흔하다. 호불호가 없는 음식 중 하나다. 요즘엔 편의점에만 가도 수십 종류의 빵이 진열돼 있다. 눈만 돌리면 프랜차이즈 빵집이 즐비하다. 그런데 구태여 ‘그 빵’을 먹겠다고 지방까지 달려가는 이유가 뭘까.

 

희소해서다. 대전에 가야만 성심당 빵을 먹을 수 있고 군산에 가야 이성당 빵을 즐길 수 있다. 이성당은 서울 등 몇 군데 지역에 분점을 냈지만 성심당은 오로지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일부 빵집도 마찬가지다. 한 여행 블로거는 “빵이 맛있는 거야 말하면 입 아프지만 그렇다고 미쉐린 스리스타를 줄 만큼의 특출난 맛은 아니지 않냐”면서 “그 빵집에 가면 그 빵집의 역사와 스토리를 맛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끌리는 것”이라고 했다.

 

성심당이 이달 서울에서 열리는 팝업 행사에 참여하면서 “빵은 안 판다”고 선언한 것도 영리한 마케팅이란 말이 나온다. 외식업계 관계자는 “장사가 좀 되면 2, 3호를 내는 식의 문어발식 확장을 하거나 돈 가지고 가족끼리 싸움이 나기 일쑤”라며 “희소성이 사라지면 소비자도 등을 돌린다”고 했다.

 

싼 가격도 한몫했다. 먹거리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데 빵 값은 아직 누구나 부담 없이 사 먹을 만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관광지에선 바가지요금에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몇 천 원이면 빵도 사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건질 수 있다. 실제 인터넷에는 “서울 여자 3명이 20만원으로 대전 가서 1박2일 여행하기” “군산에서 3만원으로 빵만 먹고 데이트하기” 같은 글이 올라와 있다. MZ들은 돈을 아끼려고 1시간 정도 걸리는 KTX 대신 새마을호를 탄다고 한다. 한 직장인 20대 남성은 “밥을 먹고 나면 2차로 카페에 가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빵과 커피를 함께 먹으면 꼭 2차를 가지 않아도 된다”며 “돈을 아끼는 길”이라고 했다. 특히 MZ에게 가격은 큰 메리트다.

 

빵의 신분 상승은 식습관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쌀 소비는 급격히 줄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70년과 비교해 반 토막 났다. 먹거리 소비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2030의 쌀 섭취 빈도가 가장 낮다. 끼니 해결을 위해 밥을 찾지 않고 빵이나 면류 등 대체 식품을 찾는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일부 지역은 ‘제2의 성심당’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지역 빵을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대전관광공사는 작년 말 성심당 인기 열풍을 등에 업고 빵 축제를 열어 ‘대박’을 쳤다. 전국에서 12만명이 찾았다. 이 모델과 비슷하게 충남 천안시도 ‘빵빵데이’를 열면서 “전국의 빵돌이와 빵순이들을 기다린다”며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12월 23일 성심당 크리스마스케익을 사려는 사람들이 영하의 날씨에도 길게 줄을 섰다. /X(트위터)

 

-김아진 기자, 조선일보(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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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대전 성심당

 

한국전쟁 때 흥남 철수선을 타고 탈출한 실향민 임길순씨가 진해에서 서울로 가려다 열차에 문제가 생겨 대전에서 내렸다. 생계가 막막하던 그에게 대전 대흥동 성당이 구호물자였던 밀가루 두 포대를 내줬다. 임씨는 가족 끼니를 해결하고 남은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나무 간판에 ‘성스러운 마음’이란 성심(聖心)을 새겨 넣었다. 대전의 명물 빵집, 성심당의 시작이었다.

 

북한을 탈출할 때, 임씨는 ‘이번에 살아남으면 남은 인생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임씨는 하루에 만든 빵 중 100개는 이웃에게 나눠줬다. 당일 만든 빵 중 안 팔린 빵은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성심당의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지난해 성심당이 지역사회에 베푼 나눔 빵은 10억원어치가 넘는다. 직원들은 매일 각지에 보낼 나눔 빵을 포장하며 ‘사랑’을 체감한다.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임영진 대표가 1981년 소보로, 앙금빵, 도넛을 합친 듯한 ‘튀김 소보로’를 개발, 히트를 쳤다. 2005년 화재로 매장과 빵 공장이 모두 소실되는 위기가 찾아왔다. 사장은 장사를 접으려 했지만, 직원들이 ‘잿더미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는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재건에 나섰다. 성심당은 직원 인사 고과에 ‘사랑’ 항목을 만들어 배점 40%를 주고, 퇴사 직원에겐 ‘재입사 권리’를 보장하며 화답했다.

 

▶2012년 부친의 창업지였던 대전역에 분점을 낸 것이 ‘전국구 빵집’ 도약을 이끌었다. 대전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성심당 빵을 앞다퉈 사가면서 군산 이성당과 함께 ‘전국 2대 빵집’ 반열에 올랐다. 하루 내방객이 1만7000명이 넘는 성심당은 1년에 하루 직원 체육대회 날에만 문을 닫는다. 그날이 되면 “재난 문자로 휴업 알려주세요” “KTX가 대전역 무정차 통과하게 해주세요”라는 등의 광(狂)팬들 요청이 소셜미디어를 달군다.

 

성심당이 지난해 1243억원의 매출을 올려 동네 빵집 최초로 1000억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은 무려 315억원에 달해, 파리바게뜨(199억원), 뚜레쥬르(214억원) 등 대기업 빵집 프랜차이즈를 앞질렀다. 작년에 선보인 ‘딸기 시루’가 가성비 케이크로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성심당 임 대표 책상 위엔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 있다. 동네 가게가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겨 향토 기업이 되고,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성심당 모델’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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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시대, 그 이중적인 삶과 기억과 군산에 남은 흔적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3-구마모토 농장과 의료 선구자 이영춘 

군산 동국사. 1913년 구마모토 리헤이를 비롯한 군산 지역 일본인 시주로 만든 금강사가 원형이다. 지금도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남아 있다. 식민시대 탐욕으로 점철된 삶이 있었고, 단칼로 재단하기 어려운 삶이 있었다. 식민 본국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식민지 조선의 삶은 요동쳤다./박종인

 

# 세월과 공간을 넘어, 이성당

 

남원 사람 이석호는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해 살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군산 중앙통에 정착해 빵집을 냈다. 이름은 이성당(李盛堂)으로 지었다. 이씨가 번창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948년 6월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옆집 적산가옥으로 가게를 옮겼는데, 지금은 이석호의 집안 손주 며느리 김현주(59)가 주인이다.

 

지금 이성당 주소는 군산시 중앙로177인데, 해방 전 주소는 군산부 메이지마치(明治町) 2초메(丁目) 85번지2였다. 거기에는 1906년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出雲)에서 군산으로 이주한 히로세 야스타로가 운영하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 이름은 이즈모야(出雲屋)다.

 

1981년 군산을 방문한 히로세의 손녀 쓰루코는 자기네 빵집 자리에 있는 빵집 문을 열며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함한희 등, ‘빵의 백년사’, 전북대 무형문화연구소, 2013, p21) 이 글은 빵집 이즈모야와 이성당, 그리고 세월과 공간을 초월해 군산에서 벌어졌던 삶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구마모토 농장과 의료 선구자 이영춘 

 

군산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 뒷뜰. 이 자리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모은 석물(石物)이 박물관처럼 모여 있다. 상당수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박종인

 

# 농민을 옥죈 소작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만 35년. ‘왜 일본이 그 식민 시대를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자기네에게 득이 되니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조선에게 득을 주려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조선인은 매년 지주는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자작 겸 소작으로 화하고 자작 겸 소작은 순소작으로 화하는 반면에 일본인은 매년 소작은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지주로 화하여 매년 농가 호수가 증가하는 까닭에 조선인의 생활 상태는 나날이 퇴보하여 살 수 없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북만주로 향하게 되었다.’(1928년 8월 1일 동아일보 ‘매년 3000여 정보가 일본인의 소유화’)

 

500년 동안 조선 농민을 옭아맸던 소작제는 식민 지주제로 진화했다. 식민 조선 농민은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 땅을 빌어먹으며 살아야 했다. 조선 쌀은 분배 단계에서는 그 지주에게, 가공 단계에서는 대규모 정미업자에게, 최종 유통 단계에는 이출항의 대규모 이출상인에게 집중된 분배와 유통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송규진, ‘일제하 쌀이출 좁쌀 수입 구조의 전개 과정’, 사총 55권0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2)

 

# 떼부자가 된 지주들

 

생산성은 증가했고 쌀 생산량 또한 증가했지만, 이런 독점적 유통 구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비율은 더 증가했다. 1910년 조선 쌀 생산량은 1040만석이었는데 수출(일본 이출 포함)은 83만석으로 7.98%였다. 그런데 1928년 생산량 1351만석 가운데 49.65%인 671만석이 일본으로 나갔다. 1931년에는 생산된 쌀 가운데 54.29%가 대일 이출 물량이었다.(‘조선총독부총계 연보 농업편’) 그동안 잡곡을 포함한 조선 내 일본인-조선인 곡식 소비량은 2.03석(1915~1919)에서 1.64석(1930~1936)으로 감소했다.(菱本長次, ‘朝鮮米の研究’, 千倉書房, 1938, p703: 이상 송규진, 앞 논문 재인용) 그런데 조선 내 일본인은 쌀 소비량이 1920~1928년 1.20석으로 변동이 없지만 같은 기간 조선인 쌀 소비량은 0.62석에서 0.52석으로 감소했다.(이여성 등, ‘數字朝鮮硏究’ 1권, 세광사, 1931, p37) 재한 일본인은 쌀을 양껏 소비했고, 조선인은 부족한 쌀을 잡곡으로 충당했다는 뜻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중반 조선은 대일 쌀 생산기지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조선 농민들이 대지주로부터 수탈당한 시기가 분명하다. 대일 쌀 이출(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수출’이 아니라 ‘이출’이라고 한다)로 돈을 번 집단은 지주들이었고 소작 농민들은 고액 소작료와 고리대로 힘든 삶을 살았다.

 

조선 시대 평균 50%였던 소작료를 식민 시대에는 70%가 넘게 받는 지주들도 있었다. 여기에 비료와 볏짚, 종자 값을 별도로 책정했다. 아무리 생산량이 증가했어도 지주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인이 됐든 조선인이 됐든 지주에 대한 적의와 피수탈의 경험은 민족 차원의 수탈로 각인됐다. 1930년대 말 전국 500정보(150만평) 이상 대지주 가운데 조선인은 43명이었고 일본인은 65명이었다.(’화호리,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기억1′,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p27) 

 

구마모토 리헤이.

 

#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와 군산

 

그 대지주 가운데 조선반도 1위가 군산과 정읍 일대에 대농장을 소유한 구마모토 리헤이였다. ‘수탈’로 상징되는 모든 일이 구마모토 농장에서 벌어졌다. 70%가 넘는 소작료, 비료와 볏짚 비용 소작인 전가, 계약 위반 시 소작 계약 일방 해지 등등.

 

구마모토 농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거대한 쌀 창고가 가마니를 공룡이 먹이를 빨아들이듯 했다’고 기억한다.(함한희 등, ‘식민지 경관의 형성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 한국문화인류학 43권1호, 한국문화인류학회, 2010) 

 

한때 대지주 구마모토 별장이었다가 더 오랜 세월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이영춘의 사무실로 쓰였던 군산 이영춘 기념관.

 

그런데 그때 지역 신문인 ‘군산일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구마모토를 비롯한 (전북) 지방 지주들은 토지와 농사 개량, 소작인 지도에 열심이지만 소작료 징수에는 다소 비난을 받고 있다. 다작(多作)하여 다취(多取)하는 주의인데 다취가 과하다는 비난이 없지 않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반면 (조선인 대지주인) 현준호 같은 사람은 경영 방식이 상당히 원시적이고 소작료는 아버지 시대 그대로이지만 소작인 지도도 별로 하지 않아 오히려 좋지 않다는 비평까지 있다.’(1935년 9월 19일 군산일보 ‘전남북 지주 색채 양분’)

 

구마모토가 ‘소작료를 많이 취한(다취‧多取)’ 악덕 지주인가 혹은 ‘근대 기술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인(다작‧多作)’ 자본가였나에 대해 당시에도 여론이 엇갈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기가 수확한 쌀을 절반 이상 바친 조선 농민에게 구마모토는 그냥 지주가 아니라 악덕 ‘일본인’ 지주였다. 대신 구마모토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아주며 먹고살던 가난한 일본인 시가(志賀)는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초라한 사람’으로 낮춰보며 살았다.(함한희, 앞 논문)

 

# 선한 지주 구마모토, 선한 의사 이영춘

 

1935년 6월 17일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에 근무하던 이영춘이 일본 교토제국대 의학박사 학위논문 심사에 통과됐다. 조선인 지도교수 윤일선 아래 조선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박사였다.(1935년 6월 19일 ‘동아일보’) 사흘 뒤 경성 조선호텔에서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지주가 세브란스 교장 오긍선을 만나 병리학교실에 3년간 연구비 500원을 매년 지원하겠다고 약정했다. 이영춘은 8월 31일 정식으로 일본 문부성에서 박사 학위 인가증을 받았다.(같은 해 6월 23일, 9월 1일 ‘조선일보’) 

 

이영춘

 

1호 박사가 확정되기 두 달 보름 전인 4월 1일, 이영춘이 학계와 의학계를 버리고 구마모토 농장 조선인 전담 병원 주치의로 취직했다. 구마모토는 본인이 운영하는 재일 조선 유학생 장학회 혜택을 받은 조선인 의사들에게 먼저 의뢰를 했으나 거절당한 터였다.(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p27: 영문학자 이양하도 구마모토 장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취직을 청하는 구마모토에게 이영춘은 “월급이 아니라 무료 진료가 목적이니 귀하가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답했고, 구마모토는 총독부 의원부 고등관 월급인 150원을 주겠다고 답했다.(이영춘, 앞 책, p23)

 

조선인 진료는 전액 무료였다. 이영춘에 따르면 구마모토는 ‘수일 전까지 건강하던 소작인이 농장 앞 공동묘지로 장사(葬事)해 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하고,’ ‘수의사는 두 명이나 두고도 가장 중요한 소작인 질병에 대비하지 못해 자책감을 느꼈다’고 했다.(이영춘, 앞 책, p26)

 

이영춘은 또 구마모토가 한 말을 이리 기억한다. “세상은 선의의 사업도 호평하려 하지 않는 법이니, 우리 무료 진료 사업도 농장의 정략 사업이라 혹평할지 모른다. 이 선생만은 내 진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 문 앞에는 연일 소작인과 가족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영춘은 1935년 첫해에만 환자 7000명을 진료했고 연인원으로는 3만명을 진료했다. ‘지랄병 발작’이라는 응급 요청에 회충약만으로 순식간에 치료된 아이도 있었다. 소작인을 가장해 찾아오거나 소작권을 사려는 사람도 생겨났다.(이영춘, 앞 책, p28)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날랐던 임피역./박종인

 

# 해방, 그리고 그들

 

해방이 되었다. 구마모토처럼 군산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시마타니 야소야는 개정면 발산리 농장에 그동안 수집한 석물(石物)과 농장을 그대로 두고 귀국했다. 농장에는 2층짜리 콘크리트 금고 건물도 있었고, 석물 몇몇은 훗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인 동시에 식민지에 각인해둔 탐욕의 흔적이다.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던 일본인 사기는 어찌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구마모토 또한 모든 걸 놔두고 두 번 다시 조선으로 오지 못했다. 도쿄 조선인 YMCA는 용산에 고아원을 운영했던 소다(曾田)와 구마모토에게 감사장을 증정했다. 이영춘은 1961년 일본에서 구마모토와 재회했다.(이영춘, 앞 책, p45)

 

이영춘은 구마모토농장 병원을 인수해 농촌보건사업을 계속했다. 간호대학을 설립하고 병원을 증설하고 농촌을 순회하며 보건 활동을 벌이다 1980년 재산 하나 없이 죽었다. 사무실로 쓰던 군산 구마모토 별장은 이영춘기념관이 됐다. 그는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다. 큰아버지를 보며 자란 조카 이주민(78)은 의료와 봉사 그리고 가난까지 똑같은 길을 걸으며 군산에 살고 있다.

 

2011년 이성당 대표인 집안 며느리 김현주와 이즈모야 창업주 손녀 히로세 츠루코가 일본에서 만났다. 츠루코는 사위와 함께 이마리시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다. 사위에게 넘길 때까지 제과점 이름은 이즈모야였다.<군산기행 끝>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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