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군위] 이 가을, 군위에서 우리는 철학자가 된다

뚝섬 2021. 10. 29. 06:15

[박종인의 사색 여행]

철학의 땅, 군위

 

빈 곳과 빈 곳 사이가 ‘공간(空間)’이다. 공간을 채우며 사람이 살다가 사람이 죽는다. 가끔 그 흔적이 남으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이제 명상과 철학이 채운 공간, 군위(軍威)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경상북도 군위에서 겪은 사색과 철학 여행.

 

건축가와 조경가와 서예가와 철학하는 창업자가 만든 군위 수목원 '사유원'에는 팔공산이 있고, 가을을 맞은 느티나무 숲과 억새밭이 있고, 가을을 모르는 소나무 숲이 있고 방문객을 사색에 잠기게 하는 철학적 공간이 있다. 군위에 가면 사람들은 철학자가 된다. /박종인 기자

 

생과 사를 대면하는 철학, 사유원

 

김천에서 태어난 유재성은 6·25 때 아버지를 따라 대구 북성로에 살았다. 아버지 철재상을 함께 하다가 이러구러하게 지금은 포철(현 포스코)와 인연을 맺고 태창철강이라는 큰 철강회사를 운영하게 됐는데, 참 어쩌다 지금은 수목원 설립자가 되었다. 수목원 이름은 사유원(思惟園), 생각하는 정원이다.

 

1989년 2월 어느 날 공장 정원을 가꾸던 회사 직원이 유재성한테 와서 이러는 것이다. “300년 먹은 모과나무 네 그루가 일본으로 팔려간단다.” 그래서 부산항에 가 보니 늠름한 모과나무가 컨테이너에 실려 있었고, 유재성은 2000만 원을 주고 나무들을 사다가 공장 정원에 심었다.

 

귀신에 씌었는지 이후로는 모과나무, 소사나무, 소나무, 배롱나무를 계속 사다 모았다. 그러다 대구에 가까운 군위에 사둔 야산에다가 그 나무들을 심었다. 설계도도 없었고 마스터플랜도 없었다. 땅이 골프장 짓기 딱 좋아서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돈 그렇게 쓰는 거 아니다”라고 격하게 거절했다.

 

그게 30년이 지나니 수목원이 돼버렸다. 수목원 맨꼭대기에는 모과나무 108그루를 모아놓은 정원이 있다. 정원 이름은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 ‘모진 풍파 그 몇 천 년인가’이다.

 

그 사이 이 땅을 다듬은 사람은 대략 건축으로는 승효상(한국), 알바루 시자(포르투갈)와 박창열(한국)이요 조경은 정영선(한국)과 김현희(한국)와 카와기시 마쯔노부(일본)에 조명은 고기영(한국), 수목원 설립자 유재성과 중국 서예가 웨이량.

 

숲과 숲 사이 혹은 숲 가운데에 도시에서는 아무런 경제적 효용이 없는 건축물이 앉아 있고, 그 건축물에는 유재성이 짓고 웨이량이 쓴 건물명이 붙어 있다. 예컨대 ‘오당(悟塘·깨우치는 연못)’과 ‘와사(臥寺·누워 있는 절)’, ‘사담(思潭·생각하는 못)’과 ‘평전(平田·너른 밭)’과 ‘명정(暝庭·어둠의 정원)’, 그리고 ‘소요헌(逍遙軒·거니는 집: 장자의 ‘소요유’에서 따왔다)’과 ‘내심낙원(內心樂園·마음 속 낙원)’.

 

건물명이 의미하듯, 빈틈없이 채워 투자비를 쪽 빼내는 상업공간이 아니라 그냥 텅 비어 있는 공간들이다. 숲이 없이는 건물을 느낄 수 없고, 건물 없이는 그저 숲이다. 아무런 장식 없는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 나무들 사이에 보이는 순간 기이하게도 공간은 철학적으로 변한다.

 

사유원에 있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 작품 '내심낙원'. 성당이다.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과 ‘내심낙원’은 특히 더 그렇다. 내심낙원은 초소형 성당이다. 앞에는 십자가와 제단이 있고 바닥에는 의자가 있고 위에는 하늘과 연결된 작은 창이 있다. 소요헌은 전망대다. 그런데 입구에서 좌우로 길이 갈라진다. 두 길은 모두 어둡다. 왼쪽 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오른쪽 길 끝에는 탄생이 있다. 죽음은 허공에 뜬 붉은 철강 구조물로 표현돼 있다. 탄생은 바닥에 서 있는 거대한 알로 표현돼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두 창을 통해 하늘과 연결된다. 삶을 전망하고 죽음을 전망할 수 있는, 그런 전망대.

 

나는 내심정원 좁은 공간에서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고, 소요헌 어둠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팔공산에 내려앉은 가을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오히려 방문객은 자아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 짧은 글로 사유원이 가진 철학과 사색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3/4/5 사유원에 있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 작품 '소요헌'의 '죽음의 공간'/사유원에 있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 작품 '소요헌'의 '삶의 공간'/사유원에 있는 '소요헌' 부분.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 작품이다. 

 

운해(雲海)와 철학, 화산산성

 

18세기 초 병마절도사 윤숙이 자기 돈을 꺼내 고로면(현 삼국유사면) 화산(華山·828m)에 산성을 지었다. 윤숙이 전근을 가면서 축성은 중단됐고 지금은 문(門) 하나 석축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아침이면 그 화산으로 구름이 몰려온다. 운해(雲海), 바다다.

 

천지사방에 산줄기가 가득한데, 그 산을 덮쳐보겠다고 구름이 기를 쓰며 물안개와 함께 몰려드는 것이다. 그 장엄한 풍경이 소문을 타고 번져, 60가구 달랑 사는 산꼭대기 화산마을로 가는 7.6km 임도는 각종 승용차 행렬로 늘 붐빈다. 1960년대 산지개간정책을 좇아 이 하늘 꼭대기로 이주해 돌밭을 일궈낸 마을사람들은 외지인들을 위해 풍차를 세웠다. 그 풍차와 하늘과 구름과 산줄기를 보려는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이 닦아놓은 시멘트 도로 덕을 톡톡히 보며 주말을 즐긴다.

 

군위 화산산성 풍차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름바다.

 

그런데 산줄기 너머 해가 솟을 무렵 풍경은 철학적이다. 2010년에 완공된 군위댐이 군위호를 만들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구름바다가 벌건 태양에 쫓겨가면서 서서히 그 호수가 드러난다. 인생 막막하고 가슴은 먹먹한데 어디 기댈 데 없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이 풍차 아래 구름바다를 바라볼 일이다. 철학하는 수목원, 사유원 예약이 쉽지 않으니 이 산성 전망대는 더 쉽고 가까운 철학의 공간이 된다. 아침을 놓치면 웃음소리 가득한 나들이 장소로 변해 있을 터이고.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바보와 사랑, 추기경 김수환

 

한국 최초 추기경 스테파노 김수환은 1922년 세상에 태어나 2009년 하늘로 갔다. 세상에 온 곳은 군위 용대리다(대구광역시에서는 태어난 곳은 대구 남산동이라고 주장한다). 할아버지 김요안은 병인양요(1866) 때 순교했다. 박해 이후 조선 가톨릭 신도들은 옹기를 구워 생계를 잇고, 서로를 만나 신앙을 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어머니 조말손을 따라 옹기장수로 살며 신앙을 이었다. 그 김영석과 서중하의 아들이 수환이다. 김수환의 아호는 옹기이고, 그가 설립한 장학회도 옹기장학회다. 이 땅에 가톨릭은 옹기와 그런 인연이 있다. 귀얄로 십자가를 암호처럼 그려넣은 옛 옹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가 하늘로 가고, 군위에는 그 옛집을 중심으로 기념공원이 섰다. 예수 고난의 길을 비롯해 종교적 풍경 가득한 공원이지만, 공원에는 추기경이 그린 자화상(본인이 ‘바보’라고 불렀던)이 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있다.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별 것 없다. 이 두 마디 말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담겨 있다. 군위에 가게 되면 바로 이 공원에서 추기경이 남긴 그 말을 직면해보면 좋겠다. 같은 말이라도 듣는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다른 법이다.

 

'삼국유사'가 탄생한 인각사. 사진은 일연 비각이다. 

 

인각사 그리고 화본역

 

인각사, 많은 대한민국 사람이 알고 있다. 고려 때 일연이 ‘삼국유사’를 탈고한 곳이다. 몽고에 저항하는 와중에 일연은 ‘단군’을 앞세운 자주적 역사관으로 무장하고 후대에 사서를 남겼다. 지금 인각사에는 일연 사리를 담았던 보조국사정조지탑과 그를 기렸던 보조국사탑비만 남아 있다. 하마터면 앞에 나온 군위댐에 수몰될 뻔한 이 작은 공간에 그나마 이들이라도 남은 사실이 다행스럽다. 볼 것, 즐길 것 딱히 없는 공간이지만 군위 여행 경로에 꼭 넣어야 할 장소다. 그리고 ‘리틀포레스트’를 촬영한 화본역으로 간다. 어쩌면 묵직하고 신중했던 군위 사색 여행이 즐거움으로 변한다. 쇠락한 시골 작은 역이 현대인의 손길과 발길로 얼마나 화려하고 활기차게 변했는지 알려주는 찬란한 공간이다. 여기에서 군위 여행은 끝.

 

 

쓸쓸한 시골역에서 명소로 변신한 화본역.

 

여행 수첩

 

1.사유원 : 원래는 올해 중 완전개장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한정 개방한다. 홈페이지에서 예약으로 방문 가능. 11월 예약은 이미 마감. 1인 입장료 자그마치 ‘5만 원’. 하지만 방문한 사람들은 대만족이다. 원내 레스토랑도 함께 예약제로 운영한다. 내년에는 수목원 입구에 숙박시설도 운영할 예정이다. 정보 및 예약 sayuwon.com, (054)383-1278

 

2.화산산성 풍차전망대 : 내비게이션에 ’화산산성 풍차전망대’ 검색. 일단 산에 오르면 이후에는 이정표만 볼 것. 운해를 볼 수 있는 시간대는 일출 이후 길어야 두 시간 정도다.

 

3.인각사 : 앞 1과 2와 묶어서 코스를 잡는다.

 

4.화본역 : 인각사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

 

5.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 기념관과 생가(옛집)도 함께 있다. 군위 북쪽. cardinalkim-park.org, (054)383-1922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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