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한글 띄어쓰기 최초로 도입한 선교사 존 로스] ....

뚝섬 2024. 10. 9. 05:31

[한글 띄어쓰기 최초로 도입한 선교사 존 로스] 

[한글이 ‘정보의 완전한 소통’으로 이뤄낸 것들] 

[문맹률 90%의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한글 띄어쓰기 최초로 도입한 선교사 존 로스

 

일본어나 중국어에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읽거나 해석할 때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한글 역시 띄어쓰기 없이 표기됐습니다.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가 처음 등장하는 건 1877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 선교사(1842∼1915·사진)가 출간한 ‘조선어 첫걸음’입니다.

만주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로스 선교사는 조선에서 온 무역 상인들을 만난 후 세례를 받은 조선인 신자들을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됩니다.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점차 한국어가 가진 매력에 빠지게 되는데, 조선인 이응찬 등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문법과 단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7년 최초로 띄어쓰기를 도입한 교재 ‘조선어 첫걸음’을 만들었습니다. 외국인들을 위한 학습 교재로 한글 밑에 로마자 발음기호를 표기했습니다. 서구 학자가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만든 교재는 처음인데, 결과적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해 한글 가독성을 높이는 것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글은 현대적 문자 체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어 첫걸음’은 널리 퍼지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감리교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한글 띄어쓰기를 적극 권장하고 나서면서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흐름은 이어지게 됐습니다.

여기에 한글 대중화와 발전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의 노력이 띄어쓰기 보편화에 기여합니다. 1896년 주 선생이 주도해 본격적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한 ‘독립신문’이 세상에 나옵니다.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으로 띄어쓰기가 우리말 표기에 정착하게 됩니다.

당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우수성과 과학적 체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걸로 보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자음과 모음만 배우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글자”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습니다. 한글에 대한 이런 관심과 연구는 한글 표기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한글은 단순한 표기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문화와 언어적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런 한글이 일제의 탄압에도 살아남아 매년 한글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된 것은 국적과 민족을 넘어선 한글에 대한 관심과 연구,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의진 도선고 교사, 동아일보(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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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정보의 완전한 소통’으로 이뤄낸 것들

 

세종 임금의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문학적 업적이다. 한글날은 한자를 몰라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배우고 쓰기 쉬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3년간의 실험 과정을 거친 후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는 반포 578돌이 되는 해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은 세계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지구상의 어떤 군주도 세종 임금처럼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문자를 만들어서 쓰게 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덕분에 백성들은 한글로 일상어를 전면적으로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편지나 문학 작품을 쓸 수 있었으며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한문 숭상 의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한글은 거의 500년 동안 비주류 문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우리에게는 한글날 외에도 제2의 한글날로 기념해야 할 날이 있다. 1894년 11월 21일에 고종의 칙령으로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라고 선포한 것인데, 이 칙령은 비록 실효성은 약했지만, 한글이 처음으로 ‘국문’의 지위를 갖게 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를 전후로 나온 호머 헐버트 선생의 ‘사민필지’(1891년)와 주시경 선생이 편집한 ‘독립신문’(1896년) 한글판은 한문이 지배하고 있던 사회에서 보란 듯이 한글만으로 쓴 교과서와 신문을 발행한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100년을 앞서간 것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왜 한국어와 한글의 교육·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을까? 그 이유는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더라도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올곧은 신념 때문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1910년)라고 외쳤으며, 또한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1910년)라고 하여 반듯한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연구회(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 바꿈)에서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1926년에 ‘가갸날’을 처음 제정하였고, 2년 후인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한글의 역사를 문자사적 측면에서만 이야기하였지만 한글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따로 있다. 1945년에 광복 후, 일본어 교육을 받은 세대들의 한글 이해력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에서 마련한 한글맞춤법(1933년)을 바탕으로 하여 큰 혼란 없이 한글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상적인 어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즉 한글을 통해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일상적인 문자 정보를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이러한 정보의 완전한 소통을 통해서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나란히 설 수 있게 된 바탕에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동아일보(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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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률 90%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박종인의 땅의 歷史]

 

까막눈 조선인이 문화를 창조하기까지 

언문 즉 한글을 멸시하고 한문에 집착한 지식인들 탓에 조선 백성은 500년 내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다. 10명 중 9명은 까막눈이었던 조선은 식민시대 종료 후 문맹률 80%에 이르는 문맹국으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치러진 선거는 까막눈을 위해 이름과 함께 ‘작대기’로 입후보자 이름을 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문맹국민 완전퇴치 계획’을 세우고 5년 동안 민관합동으로 성인 한글교육을 실시했다. 1958년 말 대한민국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교육은 문화적 각성을 촉발시켰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문화(文化)를 찾는 문화 강국이 됐다. 사진은 2021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BTS 공연 장면. /연합뉴스

 

문맹에서 문화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땅에 사는 사람들은 1000 문맹(文盲)에서 해방됐다. 금속활자와 훈민정음의 나라 백성이 비로소 글을 깨치고 이를 통해 각성(覺醒)을 했다. 미몽과 주술에서 깨어난 것이다. 각성한 대한민국은 이후 문화 강국이 됐다. 한국을 알기 위해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글을 공부하는 시대가 왔다. 문화 강국 대한민국 시대다. 그 시대가 오기까지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근대 한국인 서재필과 윤치호, 미국인 호머 헐버트 그리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다.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며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위키피디아

 

신문을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

 

1882년 음력 11월 27일 오후 2시 넉 달 전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 박영효가 제물포로 귀국했다. 동행한 일본인이 일곱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박영효, ‘사화기략’, 1882년 11월 27일) 한 달 뒤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한성판윤 박영효가 한 첫 번째 작업은 박문국(博文局) 설립이었다. 박문국은 납활자 인쇄기를 이용한 출판 기관이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 설립을 책임질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화파와 교류하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제자였다.

 

1883년 음력 7월 15일 조선 정부 내에 박문국이 설립됐다. 그해 10월 1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다. 열흘에 한 번 발행되는 공식적인 첫 번째 근대 신문이다. 박문국 사무실은 저동(苧洞)에 있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사는 서울 집이다.(경성부, 국역 ‘경성부사1′(1934), 서울역사편찬원, 2012, p538) 인쇄기도 이 집에 있었다. 조선 신문은 그렇게 일본인 집에서, 일본인 손으로 발행됐다.

 

우편으로 신문을 받아본 후쿠자와가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의 가나문자(한글) 쉬운 이학(理學), 의학의 도리를 알리면 좋다. 아무튼 빨리 한글을 쓰게 되기 바란다.’(1883년 12월 15일 후쿠자와의 편지. 박천홍, ‘활자와 근대’, 너머북스, 2018, p262, 재인용) 답장을 받은 이노우에는 개화파 지식인 강위(姜瑋)를 개인 교사로 모시고 언문을 연구했다. 그 결과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1886 나온 주간지한성주보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순한문과 순한글도 병기됐다. 그 이노우에가 1885년 박문국을 관리하던 김윤식에게 편지를 썼다. ‘혼용체를 써서 오늘날 국가 영원의 토대를 세우고 세종대왕이 정음을 제정한 성의를 받들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노우에 가쿠고로, ‘후쿠자와 선생의 조선경영과 현대조선 문화에 관하여’. 박천홍, 앞 책, p340)

 

1886년 순한문인 한성순보에 이어 나온 주간지 ‘한성주보’는 ‘한언복합문체(漢諺複合文體)’, 국한문혼용체로 발간됐다. 이후 박문국에서 출간된 서적들은 모두 국한문혼용체였다. 1894 국한문혼용체는 갑오개혁정부에 의해 왕명을 비롯한 공문서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

 

한문을 버리고 한글 사용을 주장한 미국인 헐버트.

 

문맹률 90% 나라와 헐버트

 

외국 지식인이 마주친 조선은 문맹국이었다. 조선이 문맹인 원인은 달리 있지 않았다. 원인은 문자였다. 세종이 창제한 과학적이고 쉬운 문자는 외면받고, 지식인은 고급 지식을 한문으로 습득하고 유통했다. 훈민정음은 세상을 변혁시킬 어떤 고급 정보도 백성에게 유통하지 못했다. 19세기 조선은 ‘교묘함이 서양 알파벳을 능가하는 문자의 편리함을 모르는’ 문맹률 90%짜리 나라로 변해 있었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 최혜주 역, 김영사, 2008, p19)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비난과 조롱에 그치지 않았다. 입국 5년 만에 헐버트는 순한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출간했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도리어 언문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이에 특별히 언문으로 세계 각국 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려 한다.’(헐버트, ‘사민필지’ 서문, 1891) 그리고 그가 책임을 맡은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이렇게 썼다. ‘신분제와 특권의식을 고착시키고 게으름을 낳게 하는 중국 글자를 내던지고 새로운 표음문자를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 데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헐버트, ‘조선 문자(Korean Alphabet),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6년 6월호) 헐버트는 이 잡지에 수시로 조선어 문자와 문법에 대해 논문을 실으며 한글 보급과 이를 통한 대중의 각성을 유도했다. 이 미국인 한글학자는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신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근대 한글의 보급, 윤치호와 서재필

 

1896년 1월 바로 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T.H.Y’라는 필자가 영문으로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쉼표 혹은 띄어쓰기(Commas or Spacing)’.

 

‘평균적인 조선인은 소설 ‘삼국지’를 보다가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을 타고’라고 읽는 실수를 한다. 이는 쉼표와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들을 분리시키면 없앨 있다. 선교사들이 쓴 책은 필연적으로 단어와 숙어와 문장이 낯설다. 아무 띄우기 없이 조선어로 번역하면 조선인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시험 삼아 해보라.’

 

필자 ‘T.H.Y’ 본명은 ‘Yun Tchi-Ho’, 당시 조선 외부 협판(외교부 차관) 윤치호(尹致昊). 미국 에머리대 졸업생인 윤치호는 영문법에서 띄어쓰기를 차용해 한글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서재필에 앞서 띄어쓰기를 제안한 윤치호.

 

그리고 그해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만든 신문이다. 서재필은 신문 체제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순한글띄어쓰기. ‘모두 언문으로 쓰는 것은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한문으로 보낸 투고는 당초에 상관 아니함(취급하지 않음)’. 한문으로 쓴 글은 아예 기고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한글만을’ ‘떼어쓰는(띄어쓰는)’ 목적은 단순명쾌했다.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기리라’.(이상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 새로운 각성과 학문, 곧 근대를 뜻한다. 한글 근대화에 간여한 선각자들 없이 21세기 대한민국은 설명될 없다

 

‘대중의 각성을 위해’ 순한글 띄어쓰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까막눈으로 맞은 해방

 

식민시대도 개선은 없었다. 1930년 한글 문맹률은 84.6%였고, 일본어와 한글을 모두 못 쓰는 문맹률은 77.7%였다.(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1930). 노영택, ‘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 국사관논총 51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1945 해방 직후 미군정 조사 결과 조선 문맹률은 78%였다. 건국을 두고 우익과 좌익이 갈려 있는 사이, 군정은 각 시군에 국문강습소를 설치하고 문맹 퇴치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 미군 철수 때 문맹률은 41%까지 낮아졌다.(1959년 3월 31일 ‘조선일보’)

 

이미 1946년 2월 실질적 단독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북한은 “지금 싸움은 선전적 말의 싸움과 글의 싸움”(김일성, 1946년 5월 19일)이라며 맹렬하게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이주환, ‘1945~1949년 북한에서의 문맹퇴치운동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북한은 1949년 3월 문맹 퇴치 완수를 선언했다.(교육부, ‘한국 성인 문해 교육의 발전과정과 성과’, 2012, p30) 그리고 이듬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 

1950년대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 기사. ‘작대기 선거는 수치’(1950년 5월 10일), ‘이번엔 기어이 (문맹 퇴치) 성공을’(1954년 3월 21일), ‘그래도 남은 4%‘(1959년 3월 31일)./조선일보유

 

문맹 퇴치에서 블랙핑크까지, 대서사극

 

전쟁 와중인 1953년 1월 1일 대한민국 문교부가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을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민주 국가의 건전한 진전을 기함에는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지적 수준 여하가 절대적인 근본 요소이다.’(문교부, 1953년 1월 1일 국무회의부의사항 ‘문맹국민완전퇴치계획’, 국가기록원)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그해 2월 전국에 국문강습소가 설치되고 한글교재 84만부가 배포됐다. 5차례 실시된 퇴치계획 동안 문교부, 내무부, 국방부, 농림부, 보건복지부, 공보실부터 통·반장, 다시 말해서 전(全) 대한민국 정부가 총출동해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58 , 대한민국은 공식 문맹률 4.1%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교육부, 앞 책, p36) 이름 대신 작대기 개수로 선거 입후보자를 분별했던 까막눈 조선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어찌됐는가. 글을 통해 신문물을 습득한 대한민국인들이 각성을 하더니 500 동안 묶여 있던 문화 창조력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스로 즐기던 그 문화가 흘러넘쳐 BTS, 블랙핑크로 상징되는 한류(韓流)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틈에 2692명이었던 1997년 제1회 한국어능력시험 지원자는 2022년 35만6665명으로 늘었다.(교육부, 국제교육원 통계) 문득 보니 500년 문자 감옥을 목격한 숱한 선각자들이 내건 목표, ‘대중의 각성과 신문물 습득’이 예정했던 기적 아닌가.

1948년 첫 총선은 ‘작대기’ 선거로 치러졌다. 입후보자 이름을 못 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국사편찬위(좌)/2022년 미국 타임지가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한 블랙핑크.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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