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수원] 화성(華城) [14-02-27]

뚝섬 2014. 3. 1. 13:06

사적 제3. 지정면적 207,900, 둘레 5,520m. 서쪽으로는 팔달산(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산성(平山城)으로, 창룡문(蒼龍門)·

화서문(華西門)·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暗門)·수문(水門)·적대(敵臺)·공심돈(空心墩)·봉돈(烽墩)·포루(砲樓)·장대(將臺)·각루(角樓)·

포사(鋪舍)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래 수원의 읍치소(邑治所)는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에 있었으나, 1789(정조 13) 정조가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華山)으로

옮기면서 읍치소와 주민들은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읍치로 이주한 주민들의 안정과 영주를 위한 축지(築池)의 논의가 강선()

상소로 제기되자,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華城)이라 개칭하고 1794 2월 영중추부사인 채제공(蔡濟恭)의 주관하에 성역(城役)에 착수하여 1796 9월에 완공을 보았다.

성역은 정조가 친히 살피는 가운데 1794 7월에는 장안문의 홍예(虹霓), 8월에는 장안문 팔달문의 누각과 장락당(長樂堂), 북동과 북서 포루, 낙남헌(洛南軒),

서장대(西將臺)가 완공되고, 10월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완공되었다. 또한 이듬해 정월에는 강무당(講武堂)과 북옹성(北甕城), 2월에는 북포루(北鋪樓)·

남암문·적대·서노대가, 10월에는 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남공심돈이 만들어졌다이듬해 5월까지 화서문·남수문·서북공심돈·

북암문·동북노대·서포루가 준공되고, 8월까지는 대부분이 마무리가 되어 1796 9 10일 공사를 감독한 당상관과 낭관의 복명으로 성역은 끝나고 10 9일 낙성연이

베풀어졌다.

 

 

수원성곽의 축조방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축성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성제의 장점을 종합하고 있다. 성벽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돌과 모래로 다진 뒤 그 위에 배흘림을 준 규형(圭形)의 벽을 쌓았다. 치성(稚城)과 같은 시설은

중국식 성제를 따르고 있으며, 산지 부분은 착평(搾)과 삭토(削土)를 위주로 내탁(內托)이라는 방식을 썼다. 성곽 주위의 호()는 산지 부분에서는 두르지 않았으나

평지 부분은 둘렀고, 성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화양루와 서남암문 사이의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은 자연호를 이루었다. 

 

 

이 성의 축조에 소요된 인적·물적 자원은 막대한 것으로 동원된 노동력만 보더라도 석수 642, 목수 335, 미장이 295명을 비롯하여 기술자가 총 11820명이었다.

축성을 위한 석재는 숙지산·여기산·팔달산·권동 등지에서 크고 작은 돌덩이 187600개가 채취 운반되었으며, 벽돌은 695000, 6,200, 4,550, 기타 잡곡

1,050, 석재 201400덩이, 목재 26200, 철물 559000, 철엽(鐵葉) 2,900, 69000, 기와류 53만장, 석회 86000석이 소요되는 등 전체경비가

873520냥과 양곡1,500석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원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정번전(停番錢) 10년치를 앞당겨쓰는 한편, 전라도·경상도·평안도 감영에서

예비비적 성격의 보조재원을 활용한 것이었다.

 

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이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 반면, 이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시설이 설치되었고,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망루의 역할과 총안(銃眼)으로

적의 침입을 막게 되어 있는 공심돈(空心墩 : 두꺼운 벽을 높이 쌓고 벽면에 총구를 낸 돈대)이다.

 

 

또한 돌과 벽돌을 섞어 사용한 과감한 태도, 녹로(轆轤)·거중기 등의 과학기기를 활용하고 용재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삼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이 성곽만이 가지는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정조의 명으로 착수하여 1801(순조 1)에 간행된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가 전해 오고 있어

197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시작되었던 복원공사에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현재 수원성곽은 대대적인 중수 복원으로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성내에 지어졌던

각종 건축물들은 행궁의 일부였던 낙남헌 이외에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 화서문을 따라 장안문에 이르는 성벽 앞에는 복원공사 때 만들어진 장안공원이 있어 수원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국역화성성역의궤(國譯華城城役儀軌)(신구문화사, 1984)

『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華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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