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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특검'은 그때 尹에게 기회였다] ....

뚝섬 2025. 6. 19. 08:55

['김건희 특검'은 그때 尹에게 기회였다]

[4년간 안 나오다 재수사 한 달 만에 나온 金 녹음 파일]

[특검 뜨니 “김건희 육성 파일 확보”… 檢, 4년간 뭐 하다가]

[918년 6월 16일 궁예가 살해되다]

 

 

 

'김건희 특검'은 그때 尹에게 기회였다

 

[양상훈 칼럼]

총선 전 김 특검 수용했으면 지금 대통령은 尹일 것
거부만 고집하다 몇 배 더한 특검 맞아
권력도 피해갈 수 없는 세상의 섭리가 있어.. 李도 반면교사 삼길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4월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에서 나와 차를 타고 사저로 향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전 대통령은 귀한 정치 자산을 김건희 특검을 막는 데 소진하고 무너졌다. ‘법과 원칙’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무너진 공정(公正) 회복’ 등은 윤 전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이 기대했던 가치이자 그의 핵심 정치 자산이었다. 이 가치들이 김건희 앞에서 무력해지고 희화화되면서 정권 파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얼마든지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 2024년 총선 직전 친윤 핵심 정치인은 “총선을 치르려면 김건희 여사 특검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특검을 수용하되 특검 수사는 총선 이후로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윤 정권 내부에도 합리적인 의견이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고 꽉 막힌 정국을 뚫는 중대 발표가 나올 수 있겠다는 작은 기대도 가졌다.

 

그 기대는 며칠도 가지 못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김 여사 문제는 국민 눈높이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 것에 격분한 윤 전 대통령이 한 위원장 사퇴를 요구했다. 필자는 이 뉴스를 몇 시간 동안 믿지 않았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총선 직전에 이런 자해 행위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뉴스가 사실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 윤 전 대통령이 특검 수용의 결단을 내렸다면 부부 싸움은 했을지 몰라도 자신과 정부와 당,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부인을 구했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이 특검 수용으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선거를 치렀다면 국민의힘은 승리는 못 했다고 해도 130석 이상은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 어쩌면 거의 모든 것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대통령은 윤석열일 것이다. 김건희 특검은 그때 윤 전 대통령 부부에게 괴롭고 아프지만 진짜 살길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믿는다.

 

윤 전 대통령에게 특검 수용을 고언했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필자도 이 칼럼으로 권했다. 그 고언에 윤 전 대통령은 분노와 욕설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특검을 수용하면 온갖 것을 다 파헤쳐서 일이 더 커진다’는 취지의 논리를 댔다고 한다. 김 여사에게 숨겨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른다. 특검을 수용했으면 김 여사가 기소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처럼 감옥에 가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지금처럼 탄핵되고, 정권을 잃고, ‘내란 수괴’가 되고, 자신과 부인은 패가망신하고, 어쩌면 부부가 모두 감옥에 가고, 국민의힘은 폐족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이 왜 계엄을 했는지는 친했다는 권성동 전 원내대표조차 “지금도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김건희 특검 문제가 한 이유가 됐다고 생각한다. 당시 국힘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특검법이 통과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국힘 당원 게시판 사건으로 한동훈 위원장이 위기에 몰렸다. 한 언론이 ‘한 위원장이 김건희 특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윤 전 대통령 반응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 직후 계엄이 터졌다. 김건희 특검법이 계엄의 모든 원인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방아쇠가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김건희 특검을 막으려 했는데 이제 거꾸로 몇 배의 강도로 특검이 시작되게 됐다. 특검법 공포를 위한 국무회의 참석자들은 윤 전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이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싶다. 김건희 특검법은 수사관 등 총규모가 무려 205명이고 수사 대상은 16개에 달한다. 내란 특검과 해병 순직 특검도 있지만 실제 핵심은 김건희 특검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 아닌 포클레인으로도 못 막게 생겼다. 윤 전 대통령의 거의 병적인 ‘부인 구하기’가 정반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불행한 과정을 보면서 인간사, 세상사의 섭리를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서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 호미로 막아야 한다. 김건희 특검법을 총선 전에 수용했으면 김 여사 국정 개입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특검 수용으로 고개를 숙였으면 결국엔 이겼을 것이다. 무엇이든 막을수록 더 다가오고, 다 내려놓고 오라고 하면 오지 않는 게 세상이다. 좋은 일도 지나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 부인 보호도 그렇다. 참을 ‘인’ 자를 세 번 아닌 두 번만 썼어도 계엄은 없었다. 속담과 경구는 구태의연하지만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의 굴레를 담고 있다. 자리가 높고 권력이 크다고 이 섭리 밖에 있을 수 없다.

 

많은 정권이 오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비슷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데도 모든 권력은 자신들에겐 끝이 없는 듯 행동한다. 올라갔으면 내려갈 수밖에 없지만 아래는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5년 세월은 금방 지나가는데도 마치 영원할 것처럼 여긴다. 윤 전 대통령이 이 진리를 조금이라도 새겼으면 지금의 처지는 아닐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이재명 대통령과 측근들에게도 꼭 하고 싶은 ‘구태의연한’ 얘기다.

 

-양상훈 주필, 조선일보(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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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 안 나오다 재수사 한 달 만에 나온 金 녹음 파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뉴스1

 

김건희 여사 연루 의혹이 제기된 ‘주가조작’ 사건을 재수사하고 있는 서울고검이 김 여사가 주가조작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담긴 녹음 파일을 확보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자신의 계좌를 담당하던 증권사 직원과 2009년부터 3년간 통화한 내용이다. 여기엔 김 여사가 주가조작에 가담한 투자자문사 측에 ‘40%가량의 수익을 주기로 했다’는 내용과 ‘주가가 관리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40% 수익 약정은 이례적인 것이다.

 

아직은 이 녹음 파일이 김 여사의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명확히 입증할 직접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정황 증거는 된다. 문제는 이 사건을 4년 넘게 수사한 서울중앙지검이 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 여사를 무혐의 처분했다는 것이다. 반면 서울고검은 재수사 한 달여 만에 증권사 압수수색을 통해 이 증거를 확보했다. 서울중앙지검 수사가 부실 수사였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증권사는 고객의 매도·매수 주문과 관련한 통화 내용을 녹음하기 때문에 증권사 직원과 주가조작 연루 의혹 인물의 통화 내용 확보는 검사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수사다. 주가조작 수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 수사는 애초 문재인 정권이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해 시작한 수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문재인 정권 검찰도 이 증권사 통화 녹음 파일을 압수수색하지 않았다. 무능했거나, 압수수색의 필요성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봐주기 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수사는 처음부터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문재인 정권 검찰은 1년 반 넘게 수사했지만 김 여사 관여 여부를 입증하지 못했다. 결혼 이전의 일이라 권력형 비리가 아니어서 기소든 불기소든 빨리 결론을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윤석열 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계속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김 여사 대면 조사를 주장했던 서울중앙지검장이 교체되는 일까지 있었다. 이후 김 여사에 대한 ‘비공개 출장 조사’로 의혹만 키우다 작년 10월에야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일들 때문에 결국 재수사가 시작됐는데 곧바로 녹음 파일이 나왔다. 국민이 검찰을 어떻게 보겠나. 이러니 검찰 해체론이 득세하는 것이다.

 

-조선일보(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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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뜨니 “김건희 육성 파일 확보”… 檢, 4년간 뭐 하다가

 

김건희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범행을 인지했던 정황이 담긴 녹음파일이 최근 서울고검 재수사 과정에서 확보됐다고 한다. 김 여사가 2009∼2012년 자신의 계좌를 담당한 미래에셋증권 직원과 통화하면서 “그쪽에서 주가를 관리하고 있고, 수익의 40%를 그쪽에 주기로 했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쪽’은 주가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이모 씨가 대표인 블랙펄인베스트를 뜻한다. 과거 이 회사 압수수색 과정에서 김 여사 계좌 인출 내역 등이 정리된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이번에 나온 녹취에 김 여사가 파일 내용과 일치하는 수치를 언급한 대목도 있다고 한다. 김 여사가 주가 조작에 자신의 계좌가 사용되는 걸 알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들이다.

앞서 김 여사를 무혐의 처분한 서울중앙지검은 “김 여사가 주가 조작을 인식하거나 방조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2020년부터 4년 넘게 이어진 수사로도 찾지 못했다는 증거를 서울고검이 재수사에 나선 지 두 달도 안 돼 찾아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김 여사 육성 파일은 최근 미래에셋증권 압수수색 과정에서 나왔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다. 이 증권사를 포함해 김 여사의 계좌 3개가 주가 조작에 쓰인 건 진작에 파악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은 다른 두 계좌와 달리 미래에셋 계좌에 대해선 거래 내역만 봤을 뿐 증권사 직원과의 통화 기록은 확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이 소극적으로 수사한 경위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김 여사는 지난해 7월 김주현 당시 민정수석과 비화폰으로 30분 넘게 통화했다. 당시는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사건 등으로 김 여사 측과 조사 방식을 조율하던 시기였다. 이 통화 17일 뒤 수사팀은 대통령실 부속 청사에서 김 여사를 조사해 ‘황제 조사’ 논란을 빚었다. 김 여사 불기소 처분 6일 전에는 김 수석과 심우정 검찰총장이 비화폰으로 두 차례 통화하기도 했다.

 

검찰이 김 여사의 주가 조작 관여 증거를 이제야 찾아냈다고 하는 건 곧 출범할 ‘김건희 특검’을 의식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서울고검은 김 여사에게 소환 통보를 했지만 김 여사가 최근 병원에 입원해 조사가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특검은 김 여사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함께 검찰의 부실 수사 경위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동아일보(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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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6월 16일 궁예가 살해되다

 

[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궁예왕 표준영정. 강원 철원군 제공

 

궁예는 흙수저였다.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살 길이 막막해 승려가 됐다. 혼란한 시대를 만나 밑바닥 군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과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시대를 이끌고 나갈 높은 뜻도 세웠다. 궁예는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고 무리를 이끌며 전공(戰功)을 세웠다.

궁예는 치면 이기고 나가면 승리했는데, 그 비결은 병사들의 헌신에 있었다. 그는 어려울 때와 즐거울 때 병사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상벌은 공정했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러니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를 따랐다. 그는 엄격한 상사여서 두렵기도 했지만 그가 사랑에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병사들은 그를 사랑했다. 병사들은 자진해서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궁예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퍼지니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지경이었다.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그를 찾아와 항복했다. 궁예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신라의 북방을 근거지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했다. 고구려가 신라에 멸망당한 원한을 갚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구려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궁예는 또 스스로 신라의 왕자라 자처했다. 궁예는 한쪽 눈에 장애가 있었는데, 아기 때 죽음을 피하려다 입은 상처라고 말했다. 자기를 죽이려 한 신라는 멸망시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그렇게 가짜로 만든 증오로 백성들을 이끌고자 했다. 신라 왕자가 고구려의 원한을 갚겠다고 하니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한계를 깨달았는지 궁예는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금방 버리고 마진, 태봉으로 계속 나라 이름을 바꿨다. 이 나라 이름의 뜻이 뭔지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나라 이름이 뜻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궁예가 지향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신하와 백성들이 알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궁예는 이미 방향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취했고 자신의 위대함에 빠져들었다. 사치가 넘치는 궁궐을 짓고 주위의 간언은 듣지 않았다. 당연히 주변에는 달콤한 말만 늘어놓는 간신들이 꾀어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세상의 구세주라 여기고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했다. 괴이한 말로 가득 찬 경전을 짓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때려죽였다. 아내가 말리자 간통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잔인하게 죽였다. 엄마의 비극에 놀란 아이들마저 죽였다. 피를 맛본 궁예는 더욱 미쳐 돌아갔다. 그는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서스럼없이 살해하는 살인마가 됐다.

 

신하들은 더 이상 그를 주군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신망이 높았던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궁예 스스로도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왕건이 나섰다면 나는 끝났구나”라고 말하며 달아났다. 궁예는 이틀을 숨어 지냈으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남의 밭에 들어가 보리 이삭을 베어 먹다가 들키고 말았다. 음력 6월 16일, 궁예를 알아본 백성은 분노에 떨며 그를 죽여버렸다. 백성을 배신한 지도자는 가장 혹독한 심판대에 오른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권력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국민을 배신했는지에 대한 특검이 시작된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길 기대한다.

 

-이문영 역사작가, 동아일보(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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