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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고 송승환이 선택한 길]

뚝섬 2025. 6. 30. 09:19

시력을 잃고 송승환이 선택한 길

 

조명을 비춰도 눈앞이 어둡다
부축을 받으며 퇴장할 것인가
이 새로운 도전을 즐길 것인가
짓궂은 삶의 대본을 껴안았다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은 배우 송승환. 시각장애 4급이다. 잔인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그는 연극 '더 드레서'로 복귀했다.

 

서울 북촌에서 ‘송승환 데뷔 60년 사진전’이 열렸다.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의 배우 아니랄까 봐, 오래된 대중목욕탕 건물을 개조한 미술관이었다. 열탕과 냉탕이 있던 자리에 사진과 영상 150점이 진열돼 있었다. 송승환이 지나온 길을 보면서 두 질문 “왜 하필 나입니까?(Why me?)”와 “왜 넌 안 되는데?(Why not?)”를 생각했다.

 

1957년생이니 예순여덟 살. 송승환은 1965년 라디오 ‘은방울과 차돌이’의 아역 성우로 일을 시작했다. TV 어린이 드라마에 출연하다 ‘학마을 사람들’(1968)로 연극 무대에 처음 섰고 전설적 드라마 ‘여로’(1972)로도 기억된다. 2003년에는 비언어극 ‘난타’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18년엔 평창동계올림픽 총감독으로 드론 쇼를 보여줬다.

 

눈부신 경력이다. 하지만 속을 들추면 아득한 좌절의 시간들이 있었다. 송승환은 소년 가장이었다. 어려서부터 그가 돈을 벌어 가족이 먹고살았다.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워야 했다. 탤런트, 연극배우, 영화배우, MC, DJ…. 방송가와 연극 무대를 오가던 화려한 전성기는 부친의 사업 실패로 덜컥 막을 내렸고, ‘청춘 스타’는 모든 것을 내던진 채 도망치듯 뉴욕으로 떠났다. 

 

송승환 데뷔 60년 사진전 '나는 배우다' 포스터. 송승환은 "인생의 굴곡은 누구나 겪는 것"이라며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배우로 돌아왔다"고 했다.

 

비현실적 설정과 극단적 롤러코스터 인생. 미리 읽었다면 단박에 거절했을 그 대본의 주인공이 바로 송승환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공연 제작자로 변신했고 ‘난타’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롤러코스터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평창올림픽까지는 평탄한 궤도가 이어졌다. 환갑, 그 나이에 또 무슨 추락이 있으랴 방심하는 순간 급강하가 시작됐다.

 

송승환은 빠르게 시력을 잃었다. ‘6개월 후 실명’ 진단까지 받았지만 병은 다행히 진행을 멈췄다. 시각장애 4급. 볼 수 있는 세상은 ‘눈앞 30cm’로 제한된다. 지난 60년 동안 여러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송승환은 ‘새로운 인생’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역할도 그의 실제 인생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삶이란 연기와 달라서 연출자의 속내를 알 수 없고, 다음 장면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병의 후유증이 뭔지 알아 보니 우울증과 자살이었어요. 그렇게 되진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책은 전자 파일로 바꿔서 ‘듣고’, 문자 메시지는 500원짜리 동전만 하게 확대해 ‘보고’, 영화는 자막 읽어주는 기능으로 ‘감상’한다.

 

잔인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연극 ‘더 드레서’의 한 장면이 눈길을 붙잡았다. 시력을 잃은 송승환의 2020년 무대 복귀작. 대본은 들으면서 외웠다. 형체는 보이니까 충분히 연습하며 동선을 익혔다. 늘 뿌연 세상 속에서도 연기를 계속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의욕이 생겼다. 점차 자신감을 회복했다.  

 

연극 '더 드레서'는 쇠약해진 몸으로도 무대에 서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노배우(송승환)가 주인공이다. 100쪽에 달하는 대사를 들으면서 다 외웠더니 덤으로 다른 배역의 대사까지 외워지더라고 했다. /정동극장

 

불행이 엄습했을 때 송승환은 “왜 하필 나입니까?”라며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만큼이라도 보이는 게 고맙다”며 길을 모색했다. 좀 느려졌을 뿐, 시력 상실 전의 일상을 80~90% 복구했다. 12월에 국립극장에서 ‘더 드레서’를 다시 공연하고 새로운 2인극도 준비 중이라는 그는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보다 다음에 할 배역이 없는 게 더 불안하다”며 명랑하게 웃었다.

 

전시장 한쪽에 적혀 있듯이 늙음과 낡음은 다른 것이다. 아역 배우가 노역 배우가 될 만큼 긴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결코 낡지 않았다. 시력이 나빠진 ‘덕분에’ 욕심을 내려놓게 됐다. 계속 하고 싶은 일만 남기고 안 해도 되는 일은 정리했다. 제 삶의 짓궂은 대본 앞에서 송승환은 선택해야 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퇴장할 것인가, 자기 힘으로 무대에 올라 새로운 도전을 즐길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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