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실용적 역사관을 보라]
[대한민국 이승만, 이스라엘 벤구리온]
[역사는 역사, 외교는 외교다.. ]
대만의 실용적 역사관을 보라
[특파원 리포트]
최근 대만 타이난에 있는 국립대만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그중 일본 식민지 기간을 다룬 전시 내용에 상당히 놀랐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뉴 라이트 사관(史觀)’이라고 일컫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기반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 대만의 교육, 공중 보건, 교통 인프라 등 사회 각 분야의 수준이 얼마나 올라갔고, 또 농·임·어업 생산량은 얼마나 비약적으로 증가했는지 같은 내용이 버젓이 전시돼 있었다. 대만이 한국에 비해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국립박물관에 이런 내용을 전시해도 전혀 논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역사가 비슷한 대만과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왜 이렇게 다르게 바라볼까. 여러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양국이 이 시기를 해석하는 데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지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대만은 당시 일본이 빠른 서구화·근대화로 서양 열강에 필적하는 부국강병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만약 미래에 다시 한번 역사가 재편되는 전환기가 온다면, 속국으로 전락했던 과거와는 달리 실력을 바탕으로 대만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느껴진다. 2025년에도 여전히 ‘반일’이나 ‘저항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국과 달리 매우 실용적인 역사 인식이다.
자기 나라의 어두운 역사를 돌아볼 때, 공(功)과 과(過)를 정확히 구별해 짚어낼 수 있는 논의의 장이 한국보다 넓게 형성돼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대만인들의 조화롭고 실용적인 역사 인식이 빛나는 곳은 하나 더 있다. 대만의 초대 총통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 건설한 거대 건축물 ‘중정기념당’이다. 장제스는 진행 중인 대만 역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대만섬의 공산화를 막은 국부(國父)라는 평가와, 장기 집권을 위해 자국민 수만 명을 죽인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 같았으면 이런 시설은 진작에 철거됐겠지만, 대만의 진보 정권은 장제스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정면에 ‘자유 광장’이라고 적은 대문을 세우는 절충안을 마련했다. 국부로서 상징성은 그대로 남겨두되,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그곳에 새겨넣은 것이다. 상반된 역사관이 충돌하는 논쟁적 공간을 다양한 의견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탈바꿈시킨 그들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민주당의 반미·반일 기조 때문에 최근 한국을 바라보는 주변국의 시선은 매우 불안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리 외교’를 주장하며 이런 우려를 불식하려 하고 있으나, 민주당 주류 세력과 거리를 두고 독립된 행보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편협하고 경직된 태도만을 고수하는 정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대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대만 사례를 검토해 보면 어떨까.
-타이베이=류재민 특파원, 조선일보(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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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승만, 이스라엘 벤구리온
[김도연 칼럼]
독립운동-건국-국방력 강화 등 닮은꼴 궤적
벤구리온, 과오 있었지만 공은 공대로 평가
과오 때문에 모든 공적 묻히는 일은 없어야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은 관객을 모으면서 그의 정치적 공과(功過)에 대한 논쟁도 새로이 불거졌다. 어느 나라이건 첫 국가원수의 역할은 나라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정하는 막중한 것이며, 이어져 살아가는 국민의 삶은 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 덕에 오늘의 번영하는 대한민국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재임 중 공산 침략을 막아 낸 것은 정말 큰 공로지만 정치적 혼란과 독재적 리더십은 아쉬운 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지도자이건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하는데, 특별히 우리는 그 빛을 인정하는 일에 인색한 듯싶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 질서는 다섯 개 승전국, 즉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그리고 중화민국의 의지대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인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국제연합(UN)이 창설되었고, 상기한 다섯 개 나라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그 운영을 도맡았다. 그후 중화민국, 즉 대만의 역할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역사를 만들고 또 바꾸기도 하는 것이 강대국들이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38도선으로 나누겠다는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아무런 힘도 없던 우리가 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결국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그리고 김일성은 공산주의를 국가 정체성으로 세우며 1948년에 남북으로 나뉘어 독립했다. 이후 양쪽 국민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역시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1948년에 승전국들이 국경선을 마음대로 그어 출범시킨 나라인데, 그 과정은 우리보다도 더 혼란스럽다. 2차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떠나면서 영토를 자의적으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나누어 분배했다. 쫓겨난 난민(亂民)이 엄청났으니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의원 내각제 이스라엘의 초대 국가원수는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였다. 그는 영국의 철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후에는 유엔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다양한 군사작전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안보를 강화했다. 건국 전의 독립운동, 그후의 외교를 통한 정식국가 인정, 그리고 국방력 강화 등의 측면에서 벤구리온과 이승만은 유사한 길을 걸었으며, 각각 13년과 12년간 초대 국가원수로 일한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대통령의 과오만을 강조해 온 듯싶고 따라서 변변한 그의 동상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은 다르다. 이 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은 모두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착륙하며, ‘국립 벤구리온대학’은 세계적 교육 연구기관이다. 이스라엘 여러 도시의 도로와 공원, 그리고 학교 등도 벤구리온으로 이름 지어졌으며, 그의 동상도 물론 도처에 있다. 기념관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물구나무선 모습의 벤구리온 동상들은 그가 생시에 즐겨 했던 요가를 하는 자세다. 친근한 이미지, 즉 그림자가 아닌 그의 빛을 기억하기 위한 후세의 노력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벤구리온 역시 집권 기간 국민 모두가 찬성하는 일만 하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 특히 그가 1952년에 서독과 맺은 홀로코스트 피해배상 협정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극심했던 반대와 시민 저항이 있었다. 2차대전 중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유대인이 무려 600여만 명인데, 이를 어떻게 물질적 보상으로 용서하고 정리할 수 있었을까? 지극한 실용주의자 벤구리온이 친(親)나치로 몰렸을 것은 익히 짐작되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일본과 수교 협정을 체결한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그의 모든 공적을 묻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득세하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건국 후 76년이다. 이제는 그간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국가로 발전시킨 지도자 모두를 기리면 좋겠다.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역사에 확실하게 남기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림자를 이용해 국민을 편 가르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인천을 이승만 공항으로 바꾸고 영남에 김대중대학과 호남에 박정희대학을 만들어 모두 함께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정녕 꿈에서만 가능할까? 다시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를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들어 국격(國格)을 떨어뜨리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선거는 우리가 지도자를 고르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다. 4월 10일 총선에 모두가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동아일보(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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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 외교는 외교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의 역사를 읽으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조선은 왜 전후 7년 만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을까. 실록은 당시 일본을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고 표현한다. 강산을 피바다로 만든 것도 모자라 왕릉까지 파내 시신을 불태운 일본이었으니 증오를 짐작할 만하다. 국교가 이루어지는 대목에서 실록 편찬자는 이렇게 분노한다. "왜노(倭奴)는 9세(世)에 이르도록 갚아야 할 원수다.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이 통곡하지 않겠는가."
흔히 일본 국서(國書)를 위조한 대마도의 농간에 조선이 넘어갔다고 말한다. 통상하지 못하면 굶어 죽을 판국이던 대마도가 가짜 국서를 갖다 바친 사기극을 말한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잡범들을 "범릉적(犯陵賊·왕릉을 훼손한 범인)"이라며 송환하는 쇼까지 벌였다.
조선은 바보였을까. 실록은 "국서가 가짜인 듯하다"는 선조의 말을 전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진짜든 가짜든 놔두고 볼 뿐"이라고 답했다. 범인이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조용히 넘어갔다. 임금은 "진범이 아니라도 대마도 왜인으로서 적이 아닌 자가 누구이겠는가"라고 말한다. 당시 조선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무력했다.
속아줄 것인가, 말 것인가. 임금이 신하에게 물었다. "원수와 화해할 바엔 차라리 신을 죽이소서"라고 했을 법한데 실상은 달랐다. 영의정 유영경은 "위협을 당하고 허락하느니 먼저 잘 도모하는 것이 낫다"고 했고, 우의정 심희수는 "통호(通好)는 백성을 위한 계책"이라고 했다. 임금은 대일 수교를 결정하면서 말한다. "옛 임금은 (일본의) 허물을 덮어두고 참고 용서하면서 수족을 얽어매어 우리에게 난폭한 짓을 못하게 할 따름이었다."
조선은 왜 속아주는 길을 택했을까. 이때 실록은 만주의 발호를 걱정하는 임금의 또 다른 탄식을 전한다. "조짐이 흉악하다. 만여명의 병력으로 밀어닥친다면 기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너무도 우려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조선은 남북에 적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에게 12번에 걸쳐 매번 400~500명의 사절단을 보냈다. 전악·소동·마상재…. 요즘 말로 오케스트라·아이돌·서커스단 등 한류 사절단이었다. 다음 임금 광해군의 북방 실리외교 역시 선조가 치세를 마감하기 직전 오욕을 참고 구축한 남방의 평화 위에서 가능했다.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왕들이었기에 백성의 안위를 명분에 앞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의 유약함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무도함에 굴복할 만큼 지금 한국이 변변치 못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힘이 있다고 구원(舊怨)을 무작정 근린 외교에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강대국이 충돌하는 한반도 환경은 그대로다. 그래서 '교린(交隣)'은 여전히 한반도 안보 전략의 생명선에 자리한다. 영원히 함께해야 할 이웃이기 때문에 싫어도 일본과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냉정히 되돌아보면 지금의 한·일 관계가 MB의 유산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이 왜 이 유산만은 청산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명분에 죽고 살던 조선조차 범릉적과 화해하는 길을 택했다. 지금 우리가 당시보다 완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는 역사, 외교는 외교 아닌가.
-선우정 주말뉴스부장, 조선닷컴(1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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