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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선포와 원구단(圜丘壇)] ....

뚝섬 2024. 2. 16. 10:24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의 제단, 원구단(圜丘壇)] 

[덕수궁 돌담길]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영빈관… 건립 2년 뒤 외교권 빼앗겨 무용지물로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한 소장품 도록 '조명기구'에서 대한제국 궁궐의 대형 샹들리에를 소개했어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조명 회사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만든 제품이에요. 특징은 장식에 대한제국 황제 문장(국가나 집안 등을 나타내고자 쓰는 상징적 표지)인 이화문(자두꽃 문양)을 썼다는 점입니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의 접견실 회랑에 1904년 무렵 설치된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돈덕전은 어떤 건물이기에 이런 근대 서양식 조명 기구가 달렸던 걸까요?

대한제국의 외교를 위한 영빈관 겸 연회장

'사진 찍기 좋은 예쁜 건물' '인증샷 명소'라는 말이 나오는 건축물이 서울 한복판에 생겨났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00년 전쯤 사라진 건물을 그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죠. 지난해 9월 완공한 덕수궁 돈덕전입니다. 뾰족한 탑과 붉은 벽돌, 푸른색 창틀이 인상적인 근대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그저 예쁘고 이국적인 겉모습에만 사로잡혀 아무 생각 없이 사진만 찍기에는, 이 건물이 지닌 역사의 상처가 너무나 큽니다. 20세기 초 외교에 실패한 약소국의 슬픔과 망국(亡國)의 설움을 고스란히 안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의 '5대 궁(宮)' 중에서 덕수궁(경운궁)은 가장 늦게 지은 궁궐입니다.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돼 대한제국을 선포할 무렵 본격적으로 건물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궁전엔 근대 서양식 건축물도 세워졌는데 바로 석조전과 돈덕전, 중명전이었습니다. 석조전은 임금의 처소로 삼으려고 했으나 막상 1910년 12월 짓고 보니 석 달 전에 나라가 망한 상황이었고, 정작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그럼 돈덕전은 어떤 건물이었을까요. '자주국(自主國)'을 표방했던 대한제국이 서양 열강과 외교를 펼치면서 주권국으로서 이름을 높이려고 한 화려한 공간이었습니다. 외국 사절을 위한 영빈관이자 연회장으로 만든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 건물이죠.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국빈급 외국인 숙소로 활용한 곳이었습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03년 완공된 돈덕전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순(舜)임금의 말인 '돈덕윤원(惇德允元)' 즉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는 말에서 건물 이름을 따 왔다고 합니다. 뜻은 무척 좋았죠. 그러나 과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쟁탈전을 일삼고 있던 서양 열강들이 덕 있고 어질기만 한 자들이었을까요?

미국 사절단 방한 두 달 만에 외교권 뺏겨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는 돈덕전의 내부 공간은 대단히 화려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의전을 담당했던 독일인 에마 크뢰벨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실내 장식은 놀랄 만한 품위와 우아함을 뽐낸다.' '접견실은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장식됐다.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예술품, 이 모든 가구는 황제의 문양인 자두꽃으로 장식됐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살며 수탈받는 백성들의 피눈물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숙박한 대표적 외국인은 누구였을까요. 1905년 9월 벌어진 '미국 공주 행차 소동'의 주무대가 바로 돈덕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사절단과 함께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돈덕전에 묵은 것이죠.

국권 침탈을 눈앞에 두고 강대국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고종은 앨리스를 '미국 공주'쯤으로 여기고 황실 가마로 모시며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그러나 앨리스와 미국 사절단이 보기에 고종의 이런 호들갑은 무척 서글프면서도 우스운 모습이었을 겁니다.

사절단은 이미 두 달 전인 1905년 7월 일본에 먼저 들러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한다'는 밀약에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입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용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곰 인형 '테디 베어'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면 그의 12촌으로 훗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앨리스는 나중에 고종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황제다운 존재감이 없이 애처롭고 둔감했다." 미국 사절단이 떠난 지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더 이상 외국 사절이 대한제국에 찾아올 일이 없게 됐던 것이죠.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돼 버린 건물

외교를 위해 지은 돈덕전은 완공 2년 만에 사실상 기능을 잃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서양 각국에 밀서를 보내 일제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으나 더 이상 외교권이 없는 나라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이 빌미가 돼 1907년 7월 강제로 퇴위당했는데, 그 아들 순종이 다음 달 즉위식을 올린 장소는 얄궂게도 돈덕전이었습니다. '즉위식 현장이라니 참으로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임금을 마음대로 바꾼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즉위식'이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쓸모없는 건물이 된 돈덕전은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됐고 1920년대 초 일제가 철거했습니다. 1930년대엔 그 자리에 어린이 놀이공원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100년 만에 다시 지은 돈덕전은 자료 부족 때문에 내부 공간을 원형과 다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애초 돈덕전을 '복원'하겠다고 했던 문화재청은 '재건'이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미국과 영국 두 강대국의 공관 사이 절묘한 위치에 지었던 돈덕전은,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지해 연명(延命)을 노린 굴욕적 역사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으로 빛나는 화려한 연회장과 황제국의 의전, 말로만 '자주'를 외치는 외교 같은 것으로는 결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건물이 바로 돈덕전입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장근욱 기자, 조선일보(2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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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의 제단, 원구단(圜丘壇)

 

소공동 언덕에 하늘문이 열리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자고 있던 왕비 민씨가 일본인 무리에게 살해됐다. 남편 고종은 이듬해 2월 11일 아들과 함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난 지 만 1년 아흐레 만인 1897년 2월 20일 궁궐로 돌아왔다. 처음 떠났던 경복궁이 아니라 러시아 공사관 코앞인 경운궁(덕수궁)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조선 왕국 정치, 외교, 경제, 사회가 격동했다.

그해 10월 12일 조선국 26대 왕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초대 황제로 전격 등극했다. 이날 황제는 경운궁 정문인 대한문을 나와 동쪽 언덕을 향했다. 지금 소공동이다. 언덕에 설치된 천제단(天祭壇)에서 황제는 하늘에 황제 등극을 알렸다. 중국에 사대(事大)하며 하늘에 직접 제사를 올리지 못했던 조선이었다. 그날, 500년 만에, 조선에 하늘이 열렸다. 121년 전 가을날 화요일이었다. 폭우가 쏟아졌다.

그날을 서재필은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 사기에 몇 만 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 사설) 명(明)에 이어 청나라에까지 머리 조아리며 살던 나라였으니 서재필처럼 기뻐해야 마땅한 날이었다. 그런데 개혁파 지식인 윤치호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전 세계 역사상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황제 칭호가 있을까(Has the title of Emperor been so disgraced as this ever before in the history of this world)?'(국역 '윤치호일기' 1897년 10월 12일)

'조선 사상 제일 빛나는 날'과 '세계 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황제'. 뭐 이런 법이 다 있는가. 소공동 언덕에 세워진 제단에 답이 숨어 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 이름은 '원구단(圜丘壇· '환구단'으로도 읽을 수 있다)'이다.

위풍당당했던 조선

1416년 조선 태종 16년 음력 6월 1일 변계량이 왕에게 상소를 했다. 변계량은 세자 교육 부서인 경승부(敬承府) 부윤(府尹)이었다. 그가 태종에게 글을 올리니, 주제는 '조선 왕은 중국 황제처럼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였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다(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단군이 내려온 지 3000여 년이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예를 고친 적이 아직 없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祀天之禮 不可廢也)고 생각한다.'(1416년 6월 1일 '태종실록' 요약) 태종은 이치에 맞는 말이라며 변계량에게 궁중 말 한 필을 하사했으나 사관(史官)은 '분수를 범하고 억지 글로써 올바른 이치를 빼앗으려 할 뿐'이라고 평했다.

서울시청 동쪽 소공동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圜丘壇)’이 있었다. 청(淸)으로부터 독립한 나라임을 하늘에 고하던 제단(祭壇)이다. 1897년 세워진 원구단은 13년 뒤인 1910년 총독부 소유 부동산으로 인계됐고 3년 뒤 제단은 철거돼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다. 사진은 하늘신과 조선 태조 위패를 모셨던 황궁우(皇穹宇)다. 제단 본전인 원구단은 사진 오른편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황궁우 뒤편 롯데호텔(흰 건물) 자리에는 1934년 일본 자본가 노구치 시다가후가 지은 반도호텔이 있었다.

 

39년 뒤인 1455년 갓 왕이 된 세조에게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를 올렸다. 요지는 '조선은 중국과 다르니 정치도 조선다워야 한다'였다.

'우리 동방 사람들은 중국이 부성(富盛)함만을 알고 우리 옛일을 떠올릴 줄 모른다(知有中國之盛 而不知考東方之事).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은 (천자(天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황복(荒服)의 땅이다. 단군 이래 조선은 독자적인 위엄과 교화를 펴왔다(自爲聲敎). 수와 당도 신하로 삼지 못했고 요나라는 친선국 예로 대했고 금나라는 부모 나라로 일컬었다. 따라서 국속(國俗)을 변경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은) 예로써 중국을 섬기며, 문무(文武)를 대하기를 하나같이 하면(不變國俗以禮事大 待文武如一)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유실함이 없을 것이다.'(1455년 세조 1년 7월 5일 '세조실록') 세조는 "모두가 매우 긴절한 것이었다"고 답했다. 시행 여부는 기록에 없다. 1488년 성종 19년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은 평양 단군묘에서 "(단군을) 잘 알고 있다(我固知矣)"며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절로써 예를 표했다(遂步至廟 行拜禮).(1488년 성종 19년 3월 3일 '성종실록') 명나라 또한 조선을 막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후 변계량과 양성지가 제시한 국정 지표는 완벽하게 무시됐다. 역대 조선 정부는 명나라 신하국임을 자인하고 하늘에 제사할 권리를 포기했다. 명나라 멸망 후에도 명나라를 섬겼다. 군인을 철저하게 무시했다(실록에는 '비록 무신이지만' '일개 무신으로서' 따위 문장이 숱하게 나온다). 문약(文弱)으로 흐르다 변란을 만나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은 처음부터 문약하지 않았다. 중국을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몰래 하늘을 꿈꾼 왕들

"세조(世祖)께서는 정난(靖難)을 몸소 남교(南郊)에 제사를 올린 뒤 존호를 받으셨다. 실록(實錄)을 참고하여 잘 살펴 거행할 일을 예관(禮官)에게 말하라."(1616년 광해군 8년 8월 2일 '광해군일기')

위 엽서는 철거되기 전 원구단 모습이다. ‘명치 39년(1906년) 愛國婦人會京城市會’ 기념 도장이 찍혀 있다. 왼쪽에 황궁우, 가운데에 지붕을 씌운 원구단이 보인다. 아래 엽서는 원구단이 철거되고 호텔이 들어선 이후 촬영한 사진이다. 제목은 ‘잔디밭에서 음악에 맞춰 춤추는 기생’. 이 잔디밭이 조선철도호텔 정원이며 원구단 터다. /국립고궁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남대문 밖에 있는 제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 제단을 남교(南郊) 혹은 남단(南壇)이라 불렀다. 고려 이후 존재했던, 하늘에 올리는 제단, '원단(圓壇)'은 폐지됐다. 변계량과 양성지 같은 자주파 주장이 힘을 잃은 탓이다. 원단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역대 왕들은 이 남단을 하늘에 올릴 제단으로 활용한다. 남단은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 즉 하늘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한성 북쪽에 있었던 북교(北郊)는 지신(地神)을 모신 사당이다. 1537년 4월 29일 이 남교, 남단에 왕이 직접 나가서 기우제를 지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에 옹립된 중종이다. 권력 없이 집권했다가 32년을 보낸 중종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 (중국) 제왕들은 재난을 만나면 교외에서 기도를 했다. 우리나라에 전례가 없지만 이를 모방해 행하려 한다.'(1537년 중종 32년 4월 27일) 중종은 이틀 뒤 남단 제사를 강행했다.

이후 광해군 때 이를 따르려는 시도를 신하들이 포기시키고 200년 넘도록 조선 왕조에서 천제(天祭)는 사라졌다. 병자호란 이후 권력과 학문을 독점한 노론(老論)이 명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조선을 제후의 나라로 철저하게 규정해 버린 탓이다.

용산기지에 버려진 제단, 남단(南壇)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 지내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은 단군(檀君)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돌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홍재전서' 28권, '남단(南壇)의 의식 절차를 대신에게 문의한 1792년 윤음(綸音)')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남단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사방이 2장 3척(약 7m)이요 높이가 2척 7촌(약 80㎝)에 작은 담이 둘이다.(1430년 세종12년 12월 8일 '세종실록')

 

조선왕조에서 수시로 제사를 지내던 남단(南壇)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흔적. 최근 버스 투어가 시작된 서울 용산미군기지 부지 내에 있다.

 

남단 제단은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 모두 여기에 있다.('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 1934년 경성부가 펴낸 '경성부사'에 따르면 남단은 '1934년 당시 용산중학교 동측에서 야포대 병영 뜰 북부에 이르는 작은 언덕 남쪽에 있었다.' 그리고 '이 작은 언덕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에 남단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고 언덕은 깎아서 평탄한 도로가 되었다.'('경성부사' 2권 '이조시대의 경성1')

둔지산은 지금 서울 용산 미군 기지 내에 있다. 일본군이 주둔한 이래 오늘까지 군사 지역이다. 기지 평택 이전을 앞두고 지난주 버스 투어 코스로 개방됐다. 조선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보기에는 민망하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100년 넘도록 땅을 차지한 탓이다.

폭풍 속 조선, 천제를 올리다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규모(A). 일제강점기에 이어 1968년 도로확장공사로 덕수궁 담장이 축소되고 D에 있던 대한문(大漢門)도 지금의 E로 이전했다. C는 옛 원구단(지금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이고 붉은 점은 현재 남은 황궁우다. 대한제국 황궁인 경운궁에서 황제의 제단인 원구단은 지척이었다. B는 옛 경성부청 겸 현 서울시청. /문화재청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에 벌어진 일들은 제목만 봐도 위급하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 그 와중인 1894년 5월 10일 고종은 사대의 상징인 창덕궁 대보단에 세자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1894년 5월 10일 '승정원일기') 대보단에 모신 세 황제 가운데 왕권이 막강했던 명 태조 홍무제 제삿날이었다. 격변하는 세상과 집권 세력은, 무관했다.

그리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이 스스로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이를 하늘에 고했다. 마지막 대보단 제사 3년 뒤, 1897년 10월 12일이다. 그날 풍경을 서재필은 크게 칭찬했고 윤치호는 크게 평가절하한 것이다. 이보다 2년 전 당시 학부대신 이도재는 이렇게 상소했다. '허명(虛名)이나 차리는 말단적인 일은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가 강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서양이 동양을 노리고 있는 때에는 형식이나 차리는 한 가지 일이 어찌 시급한 일이겠는가.'(1895년 11월 16일 '고종실록') 이도재는 이 상소와 함께 사표를 던졌다.

매천 황현은 황제 즉위식과 원구단 제사를 두고 이렇게 기록했다. '어째서 굳이 궁궐을 수리하여 새롭게 조성하는 역사(役事)를 했다는 말인가. 혹자는 "두 궁궐이 외국 공관(公館)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 의외의 변란이 발생할까 두렵다. 그러니 새로운 궁궐을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로 변란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궁궐만 어찌 천상(天上)에 있을 수 있겠는가.'(황현, '매천집' '국사에 대해 논한 상소 남을 대신하여 짓다, 言事疏 代人')

허무하게 닫힌 하늘과 식민의 시대

대한제국은 하늘에 황제국을 고하고 11년이 지난 뒤에야 사대의 상징인 대보단을 폐쇄했다.(1908년 7월 23일 '순종실록') 그리고 2년 뒤 경술년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접수했다. 이듬해 총독부는 원구단 건물과 부지를 인수했다.(1911년 2월 20일 '순종실록부록') 그리고 2년 뒤 원구단이 조선철도호텔 부지 후보로 선정됐다. 1913년 원구단이 철거되고 그곳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다. 둥근 제단은 사라지고 원구단은 호텔 정원으로 변했다. 태조와 하늘신들 위패를 모신 황궁우는 살아남았다. 지금 '圜丘壇'의 공식 명칭은 '환구단'이다. '환'은 '에워싼다'는 뜻이고 '원'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원구단'이라고 읽어야 한다. 조선에 하늘이 사라졌다. 동시에 식민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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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돌담길


여러분은 혹시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서울 도심의 덕수궁을 두고 전해오는 얘기예요. 왜 이런 말이 생겼는지 몇 가지 설이 있어요.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은 원래 미술관이 아니라 법원이었어요. 1995년까지는 대법원과 가정법원 건물로 쓰였죠. 이혼을 앞둔 부부들이 자주 찾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났다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설은, 돌담길 근처에 남학교인 배재학당과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있었는데, 두 학교를 각각 다니는 연인들이 함께 등교하다가 학교 근처에서 잡았던 손을 놓고 헤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 떠도는 이야기일 뿐 정확한 근거는 없어요.

◇앞으로 20년 동안 덕수궁 복원 공사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누구도 덕수궁 돌담길을 완전히 한 바퀴 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돌담길 북쪽 70m 구간이 주한 영국 대사관 부지에 포함돼 있어서 길이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이죠. 이 길이 이달 안으로 열리게 된다네요. 이렇게 되면 1.1㎞에 이르는 돌담길이 모두 이어지는 것이죠. 그럼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이제 사라질지도 몰라요.

돌담길 연결은 2038년까지 3단계로 진행되는 '덕수궁 제 모습 찾기' 사업의 일부예요. 지금 덕수궁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먼저 1단계로 연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광명문은 원래 임금이 주무시는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일제가 자기들 마음대로 이 문을 뜯어내 궁궐 서남쪽 자리로 옮겨 버렸습니다.

2단계는 2021년까지 돈덕전을 복원하는 거예요. 이 건물은 연회장과 숙소, 외국 사신의 대기 장소로 쓰였던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역시 일제가 허물어 버렸어요. 그다음엔 2038년까지 옛 경기여고 자리에 있었던 선원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다시 짓는 3단계예요. 선원전은 조선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던 전각이었습니다.

◇근대 개혁의 '꿈'이 서린 궁궐

이런 상황에서 덕수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새삼 커지고 있어요.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 덕수궁 관람 인원을 비교해 보면 6만 명 넘게 늘어났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은 전통 양식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어우러진 궁궐이에요. 서구 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대대적으로 개축한 궁궐이라 그래요. 이 시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함께 각광 받고 있는 겁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덕수궁 자리에는 왕족의 저택이 있었어요.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선조 임금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삼으며 궁궐이 됐어요.

그때 덕수궁은 경운궁이라 불렸어요.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아버지의 마지막 왕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가둬뒀어요.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한 뒤에는 왕실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됐죠.

이 궁궐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 말기였어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뒤, 고종 임금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 만에 궁궐로 복귀했어요. 1897년 2월이었죠. 이때 고종은 원래 살던 경복궁 대신 경운궁, 곧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고종이 덕수궁을 의욕적으로 개축했다는 사실입니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덕수궁은 왕궁이 아닌, 황궁(皇宮)이 됐어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 중 황제가 있는 '제국(帝國)'은 왕이 있는 '왕국(王國)'보다 격이 높았습니다. 지금껏 왕국이었던 조선도 스스로를 제국이라 부르면서 더는 다른 나라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거예요.

고종은 이때부터 덕수궁에 많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국가 행사를 치르던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귀빈 접견용 건물인 덕흥전처럼 전통 궁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궁궐 중 처음으로 서양식 건물도 함께 지었다는 사실에 밑줄 그어 주세요. 석조전이 대표적이죠. '제국'으로 올라선 나라가 '근대' 궁궐을 지어 개혁에 나서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어요. 아쉽게도 석조전은 나라가 망한 직후인 1910년 12월에야 완공됐어요.

◇'망국(亡國)'의 수난과 아픔이 서린 곳

하지만 국내외 상황은 고종의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됐어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뒤 덕수궁 돈덕전에서 순종 즉위식이 열렸고요.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뒤 3·1운동이 일어났어요. 이후 일제는 갖가지 이유로 덕수궁 땅을 떼어내고 건물을 헐어 작은 공원처럼 쪼그라뜨렸어요.

대한제국에 대해서 '일제에 맞서 근대화를 추구했다'며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백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에 신경 썼다'고 비판하기도 해요. 최근에는 '그래도 고종이 일제 침략에 앉아서 무작정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이 바로 덕수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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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조선일보(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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