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과 통장
경기 농촌 지역구 A 의원의 하루 일정표에는 생일 맞은 이장에게 전화하는 계획이 늘 올라가
있다. 지역구에 이장이 800여 명 있다 보니 하루에 두세
명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전화를 돌리기도
한다. 대전 지역 B 의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역구로 달려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다. 지역구 통장 단합 대회다. 최근 만난
야당 소속 서울 지역 C 의원은 정권 교체 후 통장들마저 친여 성향으로 교체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선거법상 이·통장은 선거운동을 못 한다. 그렇다고 영향력까지
없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고무신이나 돈 봉투 돌리던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이·통장은 선거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의원들은 입을 모은다.
▶전국 이·통장은 9만5000여 명, 도시 통장이 6만여 명이고 촌 이장이 3만여 명이다. 통장보다 이장의 선거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선거를 앞두고 시골 노인들이 "이번에 누굴
찍어야 돼?" 하고 물어보는 대상은 식구 다음으로 마을 이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장은 선거 날 마을 방송으로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장으로 노인들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선거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아파트가 들어차고 젊은 층이 많은 도시 통장은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의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통장은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다. 주민 서명을 받거나 행정기관 복지 수요를 조사한다. 구전(口傳) 홍보력이 만만치 않다. "김 의원이 우리 동네로선 훨씬 낫다" "이 후보는 문제가 많던데" 식의 얘기가 오간다. 막강한 여론 주도층이다. 의원들이 동별 통친회(통장 친목회) 행사를 꼭 챙기는 이유다.
▶이·통장의 공식 등장은 1961년부터다. '행정동·리
하부 조직을 시·군 조례에 따라 둘 수 있다'는 지방자치법이 근거인데 정작 법에는 '통장' '이장' 명칭이
없다. 처우는 한 달 수당 20만원과 명절 상여금 200%, 월2회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면 수당 2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15년째 동결이라 처우 개선이 이·통장들
숙원이었다고 한다.
▶민주당과 정부가 이·통장 수당을 30만원으로 올리는 등 처우 개선에 나서기로하자 한국당이
발끈했다. 20대 국회 들어 이·통장 처우 개선 법안을 내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쪽은 한국당이었다. 그런데 작년 예산 심의 때 정부가 그 법안을 비토했다. 야당으로선
여당이 법안을 가로채 총선용 선심 쓰기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당은 "야당이 국회 등원 안 하니 처리한 것뿐"이라고
했다. 선거가 다가오긴 다가온 모양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조선일보(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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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長은 여전히 새벽 스피커...
전북 순창의 한 마을. 비보풍수인 당산나무 숲은 사라지고 두 그루만 남아 있다.
20여
년 전 조선일보 '일사일언'에 '동네 회의'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1995년 9월 20일치). 지금도 그 마을에 살고 있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 마을 앞 당산나무 몇은 고사하거나 잘려 두 그루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당산나무
숲은 마을을 감싸는 북동쪽 산능선이 낮고 약하여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비보 풍수이다. 북동쪽 골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여름날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였다. 마을 숲이 쪼그라든 것이
아쉽다. 변한 것은 이뿐만 아니다. 150명 가까이 되던
주민이 40여 명으로 줄었다. 대체로 70~80대 노인이다. 시골 마을 골목길에서 사람 보기 힘들다.
지금 이 한적한 산촌 한가운데를 뚫고 4차선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노인들이 한마디씩 한다. "차도 댕기지 않는 길을 왜 넓히는지
모르겄어. 문전옥답을 없애뿔고, 그것도 모질라 남이 살던
집까지 허물고. 잘하는 짓이여!" 그 작은 마을을
둘로 쪼개놓았다. 공사가 있기 얼마 전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가 붙었다.
'○○○ 국회의원 도로 확장 공사비 ○○억원 확보!' 국회의원의 업적이란다. 선정인지 악정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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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긴 있다. 필자가 대여섯 살 무렵인
1960년대 일이다. 해 지고 초롱불 켜질 무렵 앞동산에서 소리가 들린다. "동네 사람 들으시오! 돌아오는 장날 나락 공판(추곡 수매)이 있으니…."
그 당시는 스피커가 없었다. 이장이 앞동산에 올라가 주먹을 나팔로 만들고 소리소리 외쳐 '공지 사항'을 전달한다. 마을
사람들은 숨죽여 경청한다. 자칫 저녁밥을 먹느라고 제대로 듣지 못하면 이웃집으로 달려가 이장의 전달
사항을 확인하였다.
1970년대 전기가 들어오고 마을회관에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공지 사항 전달이 한결 쉬워졌다. "아! 아! 마을
이장입니다. 돌아오는 백중날 동네 회의가 있으니…." 그런데 이 '스피커 공지'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개 이른 아침 6시 전후에 잠을 깨운다. "아! 아! 마을
이장입니다. 군 지원 ○○ 구매를 원하는 사람은 ○시까지 마을회관에 나와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안 하면 신청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성능이
좋아져 앞마을 스피커까지 동시에 울릴 때도 있다. 60~70년대와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다르다. 그 당시는 공지 사항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귀가 어두운 노인이 대부분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도
이장은 60년대 전통을 이어받아 스피커로 '공지 사항'을 전달한다. '생활 적폐'다.
또한 마을에 이장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보니 일부는 '완장'을 찬 것으로 착각한다. 지난 8월
말 모 국회의원과 전국 이·통장 연합회 주최로 '이장·통장 지위와 처우 개선'을 위한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한결같이 처우 개선을 주장하였다. 업무가 많아진 도시의 이·통장에게는 필요한 일이나 뼈대만 남아 겨우 버티고 있는 마을에는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할머니·할아버지 자녀들 휴대폰으로 해당
관청(면사무소·파출소·농협·보건소 등)이 직접 문자를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대신하여 고향 일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부모에게 더 자주 연락할 것이다. 이것 말고도 사라져가는 마을을 살리는 방법은 궁리만 하면 적지 않다.
지금도 필자가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은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문구 '관촌수필')인
탓이기도 하지만, 밤하늘 별을 볼 수 있어서이다. "밤하늘
별빛이 지금 가고 있고 또 가야 하는 이 길을 밝혀주던 시대"(루카치 '소설 이론')를 행복해하는 까닭이다. 밤하늘 별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길 기원한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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