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업무출장을 마치고, 파리를 경유한 귀국 길에 하루의 스케쥴을 잡아 파리 시내를 둘러 보았다.
이때가 두번째 파리 방문..
-콩코드광장..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부터 약탈해온 탑(오벨리스크)..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도 하나보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중앙에는 끝이 뾰족하고, 높이 솟은 돌기둥으로 된 기념탑이 있다.
이 탑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한다.
-세느강(La Seine) 시테섬의 노틀담 대성당으로 가는 길..
-노틀담 대성당.. 1804.12.2. 나폴레옹이 황제대관식을 올린 곳.. 12세기에 건축한 프랑스 고딕양식 건물의 걸작이라네..
프랑스어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당이다. 전면에는 탑이 두 개 있고, 가운데에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는 듯한 모양의 첨탑이 있다.
-해질 무렵 에펠탑 주위로 전투기가 날아간다..
-앵발리뜨 군사박물관.. 1670년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부상병 치료를 위한 요양소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중세 시대 갑옷, 도끼, 대포 등 각종 무기와 2차 세계대전의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전면의 건물 뒤 황금 빛 돔 건물의 지하에는 나폴레옹과 포슈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파리시내의..
-전철... (바퀴가 고무.. )
-에펠탑 근처..
-에펠탑 주변은 생각했던 것 보다 산만하다...
-에펠탑과 마주하고 있는 사요궁..
(처음 파리왔을 때, 저 박물관 뒤켠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그 호텔 비싸고 시설은 한국의 여인숙 급... 이번에도 못지않게 더 했다.. )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 때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운 탑..
-전망대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타는 값이 어찌도 비싼지.. 높이가 324m.. 당시에는 우아한 파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철골 덩어리'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세느강(La Seine)이 이렇게 좁을 줄은.. (한강 넓이의 1/4.. ? )
-그렇지만 주변 볼 것과의 조화나 연계는 한강과 비교가 않될 정도..
-세느강을 끼고..
-개선문으로..
-개선문으로 가는..
-전면의 개선문..
-개선문... 웅장하다.. ! 에펠 탑과 더불어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 명소.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했다고 한다.
-개선문 안쪽..
-무척 화려한 조각 들...
-개선문 안쪽에는 오르는 계단이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파리 시내가 거침없이 조망된다.. (에펠탑 쪽.. )
-시내 지평선 끝에 있는 성당(몽마르트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다음날 아침 가 볼 예정..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 12개 중 콩코오드 광장까지 이어진 길.
17세기 초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가 튈르리 정원에서 부터 센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을 만들게 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구 시가지 너머로 신도시 지역인 라데빵스의 고층빌딩이 보인다.. 좌측으로 작은 산이 있지만.. 파리는 이외의 산이라곤 없다..
-다시 개선문 안쪽 벽과..
-천정..
-기둥 앞에는 나폴레옹 상이 조각되어 있다..
-내려와서 올려다 본 개선문 꼭대기..
-누군가 역사적 인물을 추모하는..
-시내를 전철 1일 회수권을 사서 돌아다녔다..
-콩코드광장.. (의외로 구걸하는 깨끗한 3국인 들이 많았다.. ) 이곳에서 에펠탑까지의 거리가 상젤리제 거리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찾아 나섰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프랑스의 승리를 기원한 성당.
1870년 부터 1871년 까지 프랑스-프로이센의 전쟁이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도들이 프랑스의 승리를 기원하며 낸
기부금으로 사크레쾨르 성당이 건축되었다.
-성 루이와 잔 다르크의 기마상.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어 성당 돔 내에서는 파리의 전망을 볼 수 있다.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 몽마르트 언덕 위 성당에서의 시내 조망..
-전철로 CDG(챨스 드골)공항으로.. 업무출장으로 파리는 10번 이상 경유.. 시내에 들어온 것은 단 2번..
-1박은 했지만, 만 하루도 않되는 파리일정... 귀국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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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역사와 기행'] 찬란한 몽마르트르 언덕에 쓴 프랑스의 반성문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성당, 유럽 최강 프로이센과 싸워 이길수 있다고 집단 최면
결국 1870년 전쟁 패배 후 아픈 기억 씻고자 성당 건립
지금 우리는…, 프랑스를 불태워버렸던 자만과 무지의 불꽃이
北위협 고조되는 요즘 우리 내부에 있지는 않은지…
몽마르트르(Montmartre)! 나지막하지만 멋스럽기 그지없는 이 언덕은 아직도 옛 파리의 정취를 머금고 있다. 푸른 잔디밭과 앙증맞은 포도원,
정겨운 카페와 화려한 카바레, 특색 있는 소(
小)미술관과 무명 화가들이 펼쳐놓은 수많은 캔버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몽마르트르의 백미는 사크레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e-Coeur)이다. 로만-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이 성당은 여러 돔과 첨탑이 어우러져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은 모양이다. 외관이 온통 흰색이어서 푸른 날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사크레쾨르 앞에 서면 파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노트르담 성당과 파리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1위를 다투는 곳이라는 평가가 분에 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언덕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한 순간을 기념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60년대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바다를 지배하던 영국은 별도로 하고, 모든 면에서 프랑스는 러시아∙오스트리아 등 다른 제국을 압도했다.
이 막강한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1808~1873)가 다스렸다. 그는 1851년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됐는데, 능력과 식견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그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프랑스는 계속되는 혁명과 소요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질서와 안정을 원했다. 나폴레옹 3세는
강압적 독재 정치를 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안정을 가져왔다.이런 평화와 질서는 산업의 발전과 물질적 번영으로 이어졌다. 대외적으로도 운이 좋았다.
프랑스는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를 물리쳤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싸워 이겼다.
그러나 성공이 오히려 독(
毒)
이 됐다. 작은 성공에 도취한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전체가 자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동안 이웃 나라인 프로이센에서는 탁월한 리더들이
등장했다. 내각 총리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케 장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불가피하게 전쟁해야 한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독일 통일에 대한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했다. 군 복무를 의무화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하고, 우수한 장교 집단을 육성함으로써
프로이센 군대를 유럽 최강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일전을 겨룰 날만을 기다렸다.
전쟁은 1870년 7월에 발발했다. 사소한 외교적 마찰이 빌미가 됐다. 역설적인 것은 전쟁 준비라고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심하기는 프랑스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선각자가 프로이센에 대비하려면 국방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낸 법안은 '프랑스 전체를 군대 막사로 만들려 한다'는 의원들의 맹비난 속에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의회는 한술 더 떠서 상비군 감축 법안을 통과시키는
반역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부 군 지휘관은 "완전한 (전쟁) 준비가 돼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여기에 속은 국민까지 포함해 온 나라가 자만과 오판에 빠져 우쭐대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프랑스 전국 방방곡곡에 "전쟁 만세!" "가자, 베를린으로!"가 울려 퍼졌다.
프랑스가 입으로 떠들고 있을 때 비스마르크의 40만 대군은 폭풍처럼 프랑스를 향해 쇄도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했다. 나폴레옹 3세는 9월 2일 프랑스 동북부
스당에서 10만 대군과 함께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강국 프랑스는 45일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군은 여세를 몰아 파리를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다.
파리 시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는 전쟁 직후 패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의 염원이 모여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치고는 드물게 건물 전체를
흰 돌로 장식해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당이 아름다워도 참담했던 패배의 역사까지 바꾸거나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독일에 넘겨주고 2등 국가로 내려앉았다. 프랑스는 오늘날까지도 독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사크레쾨르 성당은 전쟁 직전에 프랑스를
풍미했던 오만과 무지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이때 프랑스의 일이 과연 남의 일이기만 할까. 이 순간 우리 내부 어딘가에선 프랑스를 불태워 버렸던 자만과 무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지는 않을까. 북한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데도 정작 한국은 전쟁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외신 보도에서 140년 전 프랑스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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