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조선왕조 500년 기운 서린 왕릉 걷고, 인왕산 범바위 오르면 “하는 일마다 술술~”]

뚝섬 2022. 1. 1. 07:09

김두규 교수와 함께한 임인년 새해 풍수 여행 

 

‘동성상응 동기상구(同聲相應 同氣相求)’란 말이 있다.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구한다’는 뜻으로 ‘주역’의 ‘중천건(重天乾)’에 나오는 말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잘 맞는 기운을 가진 곳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환기하고 휴식하면 새로운 다짐에도 힘을 얻는 법. 좋은 기운 가득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임인년(壬寅年) 새해, 국내 풍수학 대가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김두규 우석대 교수와 함께 ‘풍수 여행’을 떠났다. 복잡한 풍수 이론을 논하기보다 “예부터 좋은 곳은 앞으로도 좋다”는 단순한 답을 내놓은 김 교수가 추천한 풍수 여행지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임인년 '호랑이 산' 서울 인왕산 범바위에 올랐다. 새해가 뜨자 희망의 기운이 도심을 건너와 온몸으로 파고드는 듯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왕릉 아홉 기가 모여 있는 동구릉

 

“오늘날엔 풍수를 터 닦기의 ‘테크닉’ 정도로 보지만, 고려나 조선조 때는 풍수가 하나의 신앙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왕조의 왕릉은 풍수의 좋은 기준을 모두 갖춘 터에 자리 잡고 있지요. 당대 최고 풍수 전문가들이 찾아낸 명당이라 왕릉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항심(恒心·늘 지닌 선하고 떳떳한 마음)이 되살아나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집 근처 가까운 왕릉을 천천히 산책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여행법이 됩니다.”

 

김두규 교수가 추천한 왕릉 중 ‘최고’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다. 서울과 가깝기도 하지만 약 450년에 걸쳐 조성된 능 9기가 모여 있는 조선 최대 왕릉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부터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목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인조비 장렬왕후의 휘릉, 경종비 단의왕후의 혜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경릉이 한데 모여 있다.

 

경기도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앞에 선 픙수 대가 김두규 교수는 "동구릉은 조선 왕릉 중 최고 풍수 명당"이라며 "새해에는 왕기 서린 왕릉 주변을 자주 걸어보라"고 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왕릉은 대체로 주산을 등지고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소나무로 둘러싸여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 구조입니다. 왕릉 주변은 사시사철 해가 잘 들어서 요즘 같은 겨울에도 따뜻해요. 도심 가까이에서 소나무의 피톤치드를 마시며 걷기에 이만한 곳이 없지요.”

 

동구릉 대표 능인 건원릉은 목릉과 함께 동구릉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건원릉은 요즘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도 등장하듯 고려 말, 조선 전기 문신 하륜의 뜻에 따라 터를 잡았지요. 하륜은 역사, 문학, 철학 외에도 관상과 풍수에 능했던 인물입니다.”

 

건원릉 봉분은 억새가 눈에 띈다. 김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청완)를 옮겨 와 봉분을 조성했다고 한다”며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잔디 대신 억새를 심은 곳”이라고 했다. 건원릉 앞에는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과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보물 제1803호)가 있다. 인근 숭릉의 정자각, 목릉의 정자각과 함께 동구릉 4대 보물로 꼽히는 것들이다. 높이 448㎝의 신도비는 140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건원릉을 조성한 이듬해에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왕릉 신도비 중 건립 당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영조와 정순왕후가 잠든 ‘원릉’이나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경릉’까지 능 아홉 기를 모두 돌아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동구릉과 함께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 묘인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 묘인 건릉,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도 가볼 만하다. 세종대왕릉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만들었다. 능 주변은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루고 야트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김 교수는 “융릉은 조선의 왕 중 풍수에 특히 능했고 효심이 깊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할 때 심혈을 기울였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기에 풍수는 말할 것도 없다. 세종대왕릉 또한 능지가 천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는 뜻의 ‘영릉가백년’ ‘조선가백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힌다”고 했다.

 

서울 인왕산 범바위 부근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등산객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범 내려온다 ‘범바위’

 

임인년 눈여겨봐야 할 가까운 풍수 여행지 중 하나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탄생의 배경이 된 서울 인왕산이다. 조선이 수도 한양을 건설할 때 도성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 삼은 산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했을 때 주산인 북악산 왼쪽에 있는 낙산이 ‘청룡’이라면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백호’에 해당한다. 최근 ‘권력과 풍수’를 출간한 김 교수는 “풍수에서 백호는 ‘재물’이며 바위는 ‘권력’이니, 재물과 권력을 얻길 원한다면 백호이면서 바위산이기도 한 인왕산을 선택하는 것이 풍수 여행의 힌트”라고 했다.

 

등린이(등산+어린이를 줄인 말로 등산 초보) 사이에서 ‘인왕산 포토존’으로 주목받아온 인왕산 범바위는 임인년에 들어서며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일출, 야경 전망 명소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맑은 날엔 사진 동호인들이 이른 새벽부터 터를 잡고 해 뜨기를 기다리고, 어스름 해 질 녘이면 일몰과 야경을 보고자 야간 산행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짧은 산행으로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다. 사직공원에서 시작해 범바위, 인왕산 정상에 오른 후 부암동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인기지만, 초보라면 다소 힘겨운 코스가 될 수 있다. ‘짧지만 강렬하게’ 범바위까지 오르는 코스는 3호선 ‘독립문역’에서 시작해 ‘종로구 도시텃밭’ 부근 등산로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계단’을 15~20분 정도 ‘숨찰 정도로’ 오르면 범바위와 만난다. 범바위에서 인왕산 정상까지는 20~30분 정도 걸린다.

 

인왕산 정상과 북카페 ‘더숲초소책방’ 사이 산 중턱엔 지난 10월 ‘인왕산 숲속 쉼터’가 문을 열었다. 군인들이 머물던 옛 인왕3분초를 시민 쉼터로 꾸민 곳이다. 숲속에 새집처럼 자리 잡은 것도 특이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인왕산 일대가 전망 창문을 통해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하산 후 국립민속박물관 부근을 지난다면 임인년 호랑이띠 해 특별전 ‘호랑이 나라’(~3월 1일)도 지나치면 아쉽다. 벽사(辟邪)의 의미로 새해 첫날, 집 안에 걸어놓았던 까치와 호랑이 그림부터 호랑이 장식까지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호랑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1월 1일은 휴관.

 

강원도 속초 8경 중 하나인 '영랑호 범바위'를 찾은 관광객 최경숙·김귀자(64)씨가 새해 소원을 빌고 있다. 영랑호 범바위에 서면 동해와 설악산 울산바위가 파노라마 전망으로 펼쳐진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김두규 교수에 따르면 “임인년은 방위상 동북방 기운이 강한 때”다. “풍수는 ‘팩트’로 다가가기보다는 삶을 풍요롭게 해석하는 ‘콘텐츠’로 바라봐야 한다”면서도 “새해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왕이면 우리나라 동북방, 강원도 속초나 고성 쪽도 풍수 여행지로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강원도 속초 영랑호 범바위 역시 임인년 범바위를 논할 때 둘째라면 서러운 곳이다. 영랑호는 둘레가 8㎞에, 넓이가 1.21㎢(36만평) 되는 거대한 자연 석호로 영랑호의 중간 지점 서남쪽 한편에 범바위가 있다. 신라의 화랑 영랑이 범바위와 영랑호 풍경에 빠져 오래도록 머물렀다고 해서 ‘영랑호’라 부른다. 언뜻 범이 웅크린 것처럼 보이는 범바위는 속초 8경 중 하나.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 같기도 하다. 커다란 바위 여럿이 서로 기댄 듯 바위군을 이루는 범바위에 오르면 가까이 영랑호는 물론이고 동해와 설악산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좌) 파도 치는 바위 절벽에 자리한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 바위와 물을 가까이한 관음 도량으로 관동팔경 중 하나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우) 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양양 낙산사 곳곳에는 새해 소원지가 가득하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소원은 역시 '건강'이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홍련암·영남루··· 명찰과 고택도 ‘풍수 명당’

 

영랑호 범바위에서 차로 20~30분 정도 양양 방향으로 내달리면 낙산사와 만난다. 전남 여수 향일암, 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관음 도량(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 중 하나인 홍련암이 있는 곳이다. 낙산사의 부속 암자인 홍련암은 신라 문무왕 11년에 의상대사가 해안 석굴로 들어간 파랑새를 보고 따라 들어가 석굴 앞 바위에서 7일 밤낮으로 기도하다 ‘붉은 연꽃(홍련)’ 속에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보고 세운 암자라고 전한다. 2005년 양양 산불 대화재 때도 화마가 비켜 간 곳. 법당 마루 가운데 작은 창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면 석굴과 파도를 볼 수 있다. 김두규 교수는 “홍련암 등 명찰들은 풍수에 능한 스님들이 터를 잡아 세운 곳”이라며 “풍수에서 물은 재물로, 물이 끊임없이 흐르거나 물과 가까이 있는 곳을 찾으면 재물운이 상승한다고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에선 물과 가까운 곳을 즐겨 찾으면 재물운이 상승한다고 알려져있다"며 "경남 밀양 영남루도 가볼만 하다"고 했다. 사진은 경관 조명이 켜진 밀양 영남루 야경./밀양시

 

경남 밀양 강가 절벽에 있는 영남루처럼 물과 가까운 곳에 있는 누대도 자주 찾으면 좋다. “명문가의 고택 역시 대부분 풍수적으로 좋은 곳에 자리 잡아 기운이 좋습니다. 젊은 커플이나 신혼부부들에게 ‘고택 스테이’를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결국 현대인들에겐 오래 머물러도 마음이 편안하고 치유되는 곳이 풍수 명당인 셈이지요.”

 

[꽃잎처럼 정성스레 빚은 만두… 새해 福이 한입 가득]

풍수 여행지 주변 가볼 만한 맛집

 

새해 기운 흠뻑 받고 나면 뜨끈한 맛이 그리워지는 법.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다산동 왕릉순두부보쌈은 동구릉 주변에서 확장·이전해온 곳. 돌솥밥에 순두부찌개(1만원부터)를 취향에 따라 맛볼 수 있다. 들깨, 부대, 곱창, 만두, 조개 등 순두부찌개 종류만 8가지. 해물 순두부엔 조개, 새우 등 해물이 푸짐하게 들어 있어 건져 먹는 재미가 있다. 주인이 직접 100% 국내산 콩으로 만들었다는 두부로 두부보쌈(중·3만5000원), 두부김치(1만2000원) 등도 선보인다.

 

새해 먹는 따뜻한 떡국과 떡만둣국 한 그릇은 올해를 견디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강원도 양양 '자연샘막국수'집은 겨울이면 떡만둣국을 찾는 이들이 많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인왕산’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 부암동 방향으로 내려온다면 자하손만두를 지나칠 수 없다. ‘미쉐린 가이드 2022′에 선정된 곳으로, 만두 자체가 요리에 가깝다. 직접 담근 조선간장으로 맛을 낸 만두전골(3인 기준, 5만1000원·6만5000원), 떡만두국(1만7000원) 등은 국물이 심심한 듯하면서도 깔끔하다.

 

통인시장 방면으로 하산하면 인왕식당 소머리국밥(1만2000원)이 기다린다. 깍두기, 젓갈 등과 함께 내는 소머리국밥은 진하면서 잡내가 느껴지지 않는다. 소머리국밥에 제육볶음을 반찬으로 곁들이는 이들도 많다.

 

강원도 양양 ‘홍련암’에서 소원 빌고 떡국 한 그릇 생각난다면 낙산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자연샘막국수로 간다.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는 아예 막국수 대신 떡만두국(1만원)을 판다. 한우사골 등을 넣고 끓인 육수에 소고기김치만두를 빚어 넣어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찐만두(1만2000원)는 양념 맛이 강하지 않아 질리지 않는다. 매주 토요일은 정기 휴무로 1월 1일은 쉰다.

 

속초 영랑호 범바위 부근 완앤송 하우스 레스토랑은 영랑호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뜨끈한 사태국밥(보통 9000원·점심 한정 판매)을 먹는 기분이 색다르다. 얇게 저미듯 썰어 얹어낸 사태고기도 부드러워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잘 먹는다. 신정 당일은 휴무.

 

-박근희 기자, 조선일보(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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