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과 만나는
경기 용인 묵리 여행
용인 묵리의 겨울 풍경은 수묵화를 닮았다. 먹[墨]의 농담으로만 그려낸 듯한 낮은 채도의 산과 저수지,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전원 풍경은 어수선한 마음을 차분히 다독여주기에 충분하다. ‘골프장이 있는 동네’ ‘수도권 전원주택지’ 등 난개발이 붙인 오명을 거르고 보면 묵리 일대는 숭고하고 고귀한 유산들로 가득하다.
묵동(墨洞)이라 불렸다던 묵리의 중심에는 ‘석포 숲’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등 2대에 걸쳐 수집한 고서화를 국가에 기증해 화제가 된 손창근(94) 선생이 10년 전 조용히 국가에 기부한 숲이다. 노옹이 한평생 가꿔 후대에 물려주었다는 이 석포 숲의 뒷이야기가 세한도 기증을 계기로 다시금 회자되는 요즘, 문득 숲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춥고 시린 이 세한(歲寒·세밑 한파, 혹독한 시련)을 어찌 견뎌내고 있는지.
2020년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하며 국민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던 손창근 선생이 50여 년을 손수 가꿔오다 10년 전 국가에 기부한 용인 묵리의 '석포 숲'. 지금은 '석포 숲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50여 년간 가꿔 기부한 명품 숲
추사의 세한도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보물,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보물을 국가에 기증한 이가 평생에 걸쳐 애지중지 가꿔온 숲은 어떤 모습일까. 손창근 선생의 차남 손성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석포 숲을 “감히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세한도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숲”이라 했다. 틀리는 말이 아니었다. 석포 숲을 찾는 이들 사이에선 “백만불짜리 명품 숲” “가만히 있어도 자연 치유되는 숲”이라는 감탄이 이어지고 있다.
석포 숲은 손창근 선생의 부친이자 19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제1624호)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한 개성 출신 실업가 석포(石圃) 손세기 선생의 아호를 딴 숲이다.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아들인 손창근이 50여 년간 용인·안성시 소재 사유림 662㏊(약 200만평)에 이르는 숲에 잣나무·낙엽송 200만그루를 심어 가꿔오다 2012년 식목일에 산림청에 기부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숲은 더욱 촘촘한 밀도를 뽐낸다. 숲길도 사람들 발길이 더해지며 단단해졌다. 나지막한 문수산 자락에 자리한 석포 숲은 대대적으로 조성한 자연 휴양림이나 울울창창한 삼림욕장은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이 만만하게 오를 수 있는 위치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휴식을 선사해준다.
조망이 뛰어나 2018년 강원도 양구 DMZ펀치볼전망대, 화천 용화산 전망대 등과 함께 ‘북부지방산림청 Vista Point 10선’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제1호 탄소 중립의 숲’으로 선정돼 지난 10월엔 시민 참여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는 전망대 일대를 ‘석포 숲 공원’으로 꾸며 수원국유림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묵리의 '석포 숲 공원'의 전망대인 팔각정 주변은 전시림이 채웠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구역마다 의미 있는 나무 심어
석포 숲 공원은 보통 걸음으로 15~20분만 올라도 탁 트인 전망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산림청에서 세운 석포 숲 공원 기념비 뒤편엔 석포 숲 기부 이야기가 담겨있다. 손창근 선생은 손성규 교수를 통해 “그동안 석포 숲 기부 얘기가 나오면 ‘1000억’이라는 금전적 가치만 부각이 돼 아쉬웠다”며 “기념비에 적힌 것처럼 나무를 심고 가꾼 것이 더 소중한 가치이고 이것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말로 석포 숲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전해왔다.
숲은 나무 덱을 따라 짜임새 있게 구성돼 있다. 유실수림에선 손창근 선생의 유년 시절 허기를 달래준 밤·호두·매실·살구나무 등이 자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다양한 열매를 관찰할 수 있어 자연 체험 학습장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전나무, 자작나무, 마가목 등이 숲을 이룬 전시림은 개성 출신 손세기 선생이 나고 자란 북한 지역의 향토 수종으로 채웠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듯한 숲 탐방로는 상공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이다. 남북 통일의 염원을 담은 길이다. 산세를 살려 숲 사이로 좁다랗게 난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추운 겨울을 견뎌내는 나무들과 조우한다. 그중 하늘을 향해 삐죽 솟아오른 유난히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언뜻 수형이 묘하게 세한도 속 그것과 닮아 보인다. 겨울엔 역시 설경. 눈 온 다음 날 찾는다면 강원도 산간 지역 못지않은 설경이 기다릴지 모른다.
석포 숲 공원의 탐방로는 상공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이다.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석포 숲 공원 주차장 입구에서 기념공원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종합 안내도가 있는 주차장을 지나 애덕고개 방향으로 천천히 오르는 완만한 임도와 종합 안내도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빠르게 올라가는 길. 어린아이나 어르신 등 노약자를 동반한 경우이거나 눈 내린 후라면 임도를, 짤막하게나마 등산의 묘미를 맛보고 싶다면 주차장 뒤 등산로를 따라간다.
양지면 은이 성지 김가항 성당은 중국 상하이에 있던 김가항 성당의 대들보 등을 가져오고 실측해 2016년에 복원한 건축물이다. 은이 성지와 석포 숲은 '청년 김대건길' 코스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천주교 순례 코스 ‘청년 김대건 길’도
석포 숲 공원은 천주교 성지순례 코스인 용인 남곡리 은이 성지와 안성 미리내 성지를 오가는 청년 김대건 길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전체 10.3㎞, 도보 순례 시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청년 김대건 길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박해 위험 속에서 밤마다 조심스럽게 삼덕고개(신덕·망덕·애덕고개)를 걸어 다니며 사목 활동을 전개했던 길이다. 순교 후 신부의 시신을 이장한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 성지 김가항 성당과 나란히 있는 김대건 기념관은 한국인 최초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공간이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청년 김대건 길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은이 성지엔 김가항 성당과 김대건 기념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건축물이 아름다워 젊은 커플들 사이에서 명소가 된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다. 2001년 상하이 정부의 도시 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된 김가항 성당의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부재를 수원교구가 가져와 2016년 완성했다.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1836년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으로 ‘은이(隱里)’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란 뜻. 은이 성지 일대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였다. 충남 당진의 솔뫼 성지, 안성의 미리내 성지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낮은 산세에 숨은 듯 자리한 은이 성지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아늑함이 느껴진다. 석포 숲 공원에선 차로 20~30분 거리에 있다.
용이 승천하며 구멍을 냈다는 묵리 용덕사의 '용굴(암굴)'. 관음보살 머리 위 동그란 구멍으로 겨울 빛이 스며들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박근희 기자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용굴
묵리에 간다면 용덕사를 지나칠 수 없다. 대한 조계종 2교구 용주사에서 갈라져 나온 말사로, 미륵전엔 통일신라 때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입상(경기도 지방문화재 111호)이 모셔져 있다. 석조여래입상보다 유명한 건 용굴(암굴)이다. 여의주를 얻어 승천하려던 용이 효심 지극한 여인을 만나 여의주를 주곤 우여곡절 끝에 승천하며 굴에 동그란 구멍을 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용의 공덕[龍德]이 서린 절’이란 뜻의 절 이름도 이 동굴의 전설에서 비롯됐다. 용덕사 대웅전 뒤편 성륜산의 가파른 계단을 10분 정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용굴은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동굴’로 유명하다. 기도처답게 소원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암벽 아래 자연적으로 형성된 용굴은 한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아담한 규모다. 규모는 작아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겼던 곳이자 의병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곳이다. 동굴 안쪽 가부좌를 튼 관음보살 앞에는 석간수가 만든 거대한 고드름이, 관음보살 머리 위 전설 속 용이 승천했다는 동그란 구멍으론 빛이 쏟아져 내려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묵리 성륜산 중턱에 자리한 용덕사의 설경. '석조여래입상'과 '용굴(암굴)'로 유명한 사찰이다./박근희 기자
◇용인 숨은 일몰 명소 용덕저수지
해 질 녘이라면 용덕저수지로 간다. 살얼음 위로 포근하게 눈 쌓인 풍경도 아름답지만, 용인의 숨은 일몰 명소라 불릴 만큼 서정적인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저수지를 두른 2.3㎞ 구간의 ‘오색둘레길’ 중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 질 녘 풍경이 장관이다. 텅 빈 낚시터 위 허공을 가로지르는 전선마저도 오렌지빛 하늘에 그어진 오선지 악보처럼 보일 만큼 황홀하게 느껴진다. 이따금 꽁꽁 언 저수지 위론 백로가 손님처럼 다녀간다.
평범해 보이던 '용덕저수지'는 일몰 무렵 옷을 갈아 입었다. 얼어붙은 물 위론 백로가 이따금 날아다녔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근 안젤리미술관 2층 카페도 용덕저수지 전망 카페로 통하는 곳. 강남대 미대 교수로 37년을 재직한 권숙자 교수가 사비를 털어 2015년 개관한 미술관은 현재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다음 전시를 준비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그냥 가기 아쉽다면 시궁산과 삼봉산, 굴암산으로 에워싸인 듯 자리한 브런치 카페 묵리459에 들러볼 만하다. ‘환기의 순간’이라는 묵상 공간이 있다. 카페의 한 공간이지만, 웅장하고 세련된 갤러리가 연상된다. ‘자연을 잠시 빌려서 즐긴다’는 차경(借景)의 자세로 통유리창 너머 계절과 날씨가 빚어내는 작품을 만끽하기에 좋다. 자연 친화 공간으로 꾸민 먹색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명상가가 된다. 용덕사 진입로 건너편에 있다. 석포 숲 공원, 용덕저수지와도 가깝다.
(좌) 자연을 잠시 빌려서 즐긴다는 '차경(借景)'의 자세로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카페 '묵리459'. 겨울 햇살이 만든 그림자마저도 작품처럼 느껴진다./(우) 브런치 카페 '묵리459'는 묵리(墨里)의 정체성을 살려 인테리어와 메뉴에 '먹색'을 입혔다. 먹색 치킨을 올린 크로플 '묵리플'과 '묵리459 시그니처 샐러드'.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입안에서 눈 녹듯 사라지는 붉고 영롱한 빛깔의 송어 한 점]
단골 많은 묵리 맛집
묵리는 산이 많고 골짜기가 있어 '용인 속 강원도'로 불린다. 묵리송어횟집에서 평창 송어회를 맛보니 별안간 평창으로 순간 이동한 것만 같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과 분당의 근교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묵리 이원로 주변은 마치 타협이라도 한 듯 식당별로 차별화한 메뉴를 선보인다. 한정식부터 셀프 바비큐, 송어회, 생선구이, 소머리국밥에 갈비까지. 덕분에 메뉴 선택의 폭이 자유로운 편이다.
묵리송어횟집에선 제철 맞은 평창 송어회(1kg·3만4000원)가 기다린다. 일정한 두께로 썰어낸 송어회는 참기름과 간장에 찍어 먹으면 부드러운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채소에 콩가루를 뿌려 회 무침처럼 곁들여 먹어도 맛있다. 회를 다 먹은 후 손수제비를 듬뿍 넣어 얼큰하면서도 깔끔하게 끓여내는 매운탕(5000원)은 안 먹으면 후회한다. 같은 자리에서 11년째 운영하는 곳으로 단골층이 두껍다.
캠핑은 번거롭지만 셀프 바비큐라도 해 먹고 싶을 땐 미생을 눈여겨볼 만하다. 실내 식당 외 건물 뒤편에 별도로 마련된 독채 방갈로에서 토마호크 등 스테이크를 직접 구워 먹는 재미가 있다. 정육 식당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하는데 고기가 다르다. 스테이크용 고기를 부위별로 판매한다. 고기 주문 시 상차림 세트(2~3인 3만원)를 추가하면 고기와 함께 샐러드, 숙성 빵, 효소 커피, 가니시, 숙성 김치 등이 포함돼 나온다. 이후 기호에 따라 원하는 부위를 단품으로 추가해 먹으면 된다.
자연의 밥 로송 용인묵리점은 가성비 한정식집으로 자리 잡은 곳. 달인 제육 정식(2인 3만4000원)이 맛있다고 소문났다. 직화구이 제육에 반찬이 깔끔하게 나온다. 혜선황게장 정식(2인 4만원) 등 메인 요리에 따라 메뉴가 달라진다. 모든 메뉴엔 돌솥밥이 나온다. 셀프바에는 보리빵과 샐러드, 기름떡볶이 등이 준비돼 있어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박근희 기자, 조선일보(2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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