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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탈환도] [선조는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

뚝섬 2025. 4. 17. 10:35

[평양성 탈환도]

[선조는 정말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했을까?]

 

 

 

평양성 탈환도

 

초라하게 그려진 조선군 그림... 명에 대한 고마움 강조 위해서죠 

평양성 탈환도

 

최근 한남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평양성 탈환도’가 민간에 공개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평양성 탈환도’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평양성 전투’를 병풍에 묘사한 그림인데요. 당시 전투 상황과 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 사용한 무기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평양성 전투를 그린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비롯해 국내에 몇 점이 남아 있는데, 세부적인 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구도와 장면은 같다고 해요.

 

평양성 전투는 1593년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평양성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전투예요. 이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데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어요. 오늘은 그림을 보며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평양을 두고 격전을 벌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됐어요.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조총 부대를 앞세워 조선군에 연전연승을 거뒀고, 빠르게 북상해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도 안 돼 수도 한양을 함락했죠. 당시 조선 왕 선조는 일본군 진군 소식을 듣고 개성으로 피란 갔고, 한양이 함락되자 다시 평양으로 피란을 갔어요.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세 방면(평안도·황해도·함경도)으로 북진을 이어갔어요. 그러자 선조는 평양 수비를 포기하고 다시 한번 의주로 피란을 떠납니다. 그리고 평안도로 진격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1592년 6월 평양성을 점령하지요.

 

임진왜란 때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어요. 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주라는 것이었어요. 전쟁 초기 명은 조선이 일본군에 길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선조의 거듭된 원병 요청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어요. 하지만 평양성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1592년 7월 명은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합니다.

 

1592년 7월 15일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군사 3000명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어요. 당시 조승훈은 북방의 몽골과 여러 번 싸워 이겨 공을 세운 경험이 있다 보니 일본군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했다고 해요. 이날 밤 조승훈의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작전에 휘말리며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고 말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막혀 번번이 평양성 탈환에 실패합니다.

 

1593년 1월. 다시 한번 평양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요. 이때는 명의 장수 이여송이 약 5만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상황이었죠.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해 압박했어요. 조선·명 연합군은 평양성의 북문(칠성문), 서문(보통문), 남문(함구문)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은 물자가 부족해지며 전세는 조선·명 연합군에 유리하게 흘러갔어요.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해 한양까지 물러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해요. 이 승리는 전쟁 초기 내내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풍당당한 명군, 초라한 조선군

 

‘평양성 탈환도’에는 당시 상황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양성 탈환도’를 보면, 사흘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가 화폭에 압축돼 담겨 있습니다. 

 

장면① - ‘평양성 탈환도’에 그려진 조선군이에요. 전체 그림에서 조선군은 한 번만 등장하는데, 그마저 귀퉁이에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을 도와준 명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선군은 작게 그린 것으로 해석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엔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가 묘사되어 있어요. 먼저 조선군은 어디에 그려져 있을까요? ‘평양성 탈환도’에서 조선군의 모습은 병풍의 가장 왼쪽<장면 ①>에서 볼 수 있어요.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전투를 벌이는 명군과 다르게, 숫자도 적고 초라한 모습으로 한쪽 귀퉁이에 그려져 있죠. 명군과 왜군의 전투를 구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장면② - 명나라 군대가 화포(가운데)로 평양성의 왜군을 공격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 북문을 그린 대목에선<장면 ②> 성 바깥에서 화포를 쏘고 있는 명군의 모습이 보여요. 이들은 남병(南兵)이라고 불리는 정예군으로, 조총과 화포를 활용한 병사들이었어요.

 

장면③ - 말을 탄 명나라 기병이 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왜군들이 어디론가 도망가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 서문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겠습니다<장면 ③>. 말을 탄 명군 기병이 그려져 있고, 뒤편 성벽엔 저항하는 왜군들이 보여요. 그 뒤로는 어디론가 황급히 도망가는 왜군들도 보입니다. 실제로 당시 왜군은 성 안에 땅을 파서 굴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조선·명 연합군이 성 내부로 진입하자 이 토굴로 들어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고 합니다.

 

장면④ - 말을 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명군(오른쪽 위)이 왜군 쪽으로 진격하고 있어요. 명군이 왜군을 제압하는 장면(아래 그림)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병풍 맨 오른쪽 상단엔 명의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장면 ④>이 나타나 있어요. 그 아래엔 왜군을 무찌르고 있는 명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재조지은’ 분위기 속 그려져

 

그림만 보면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처럼 보여요. 조선군이 실제 전투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음에도, 이렇게 소략하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양성 탈환도’는 누가 언제 그렸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화 양식과 병풍 형식 등을 봤을 때 18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임진왜란 이후 명이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지만, 조선 사회엔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존명대의론(尊明大義論)’이 강조되고 있었어요.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조선엔 청에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진정한 중화는 여전히 명이라고 생각했죠. ‘멸망 직전의 조선을 도와준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1704년 숙종 때 건립된 ‘만동묘’는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의 신종과 그의 손자인 의종을 기리는 사당이에요. 실제로 조선의 여러 왕은 주기적으로 만동묘를 정비할 것을 명령했고, 1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기도 했어요. ‘평양성 탈환도’ 역시 명군의 활약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군은 간략하게 그린 것으로 보여요. 명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죠.

 

-김성진 서울 상암고 교사/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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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정말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했을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선조의 명나라 망명이 무산된 진상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鳥谷關)’. 1592년 4월 26일 임진왜란 개전 보름이 못돼 새재를 무혈통과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한성에 임박하자 사흘 뒤 선조는 의주로 도주했다. ‘“명나라로 가겠다”는 선조를 류성룡을 비롯한 관료들이 단념시켰다’는 통설과 달리 선조는 “여진족 지역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는 명 정부의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에 망명을 포기했다. 조곡관은 2년 뒤인 1594년 류성룡 건의에 의해 충주사람 신충원에 의해 건축됐다./박종인 기자 

 

“명나라로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한 달이 채 못 돼 함락 위기에 빠진 한성을 탈출한 선조가 던진 말이다. ‘내부(內附)’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붙는다’는 뜻이다. 즉 망명이다. 항전 한번 제대로 독려하지 않은 왕이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겠다는 말에 당시 영의정 류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大駕離東土一步 則朝鮮非我有也·대가리동토일보 즉조선비아유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많은 사람은 류성룡이 보인 이 단호한 결기가 선조 마음을 바꿨고 그리하여 선조가 조선에 남아 전쟁을 치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보면 실상이 다르다. 결론부터. 요동 망명에 관해 선조는 류성룡을 비롯해 그 누구 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선조는 끝까지 망명을 고집했다. 그러다 명나라 황실에서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를 받고서야 조선 탈출을 포기한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조금 더 비겁했던 지도자 선조 이야기.

 

도주를 결정하기까지

 

14대 조선 국왕 선조는 인복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이순신, 권율, 정탁 같은 쟁쟁한 문무 관료들이 선조를 보좌했다.

 

그런데 인덕은 부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국으로 망명하겠다며 우중(雨中) 야중(夜中) 수도 한성을 탈출한 지도자가 선조였고, 그 지도자에게 한성 백성은 경복궁을 불태워 분노를 폭발시켰다. 

 

1753~1759년 사이 영조 때 그린 ‘도성대지도’(부분).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광화문(아래 동그라미)과 경회루는 기둥만 남아 있다. 경복궁은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가 빗속에 한성을 떠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에 의해 방화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시작은 일본군이 동래에 상륙하고 8일이 지난 4월 21일이었다. 문경에 도착한 경상 순변사 이일이 조정에 급전을 날렸다. 열여덟 자였다. ‘今日之賊有似神兵 無人敢當 臣則有死而已(금일지적유사신병 무인감당 신즉유사이이)’. ‘오늘 적은 신이 내린 병사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나이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박동량, ‘기재사초(寄齋史草)’ 下, 임진일록 권1, 4월 21일)

 

신립 부대까지 대패했다. 조선 정부는 전율했다. 선조는 즉시 여행용 미투리(짚신)를 구해놓고 말들을 대기시키라 명했다. 다음 날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친 무관 신립을 충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전략 요충지인 문경새재를 비워버리는 한심한 계책을 썼다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게 새재 너머 달천 평야에서 궤멸됐다.

 

한성을 버리던 날

 

선조는 이미 궁궐에 들어와 있던 광해군은 물론 궐 밖에 살던 식구들도 모두 불러들였다. 경복궁에는 선조와 그 비와 후궁 5명, 아들 7명, 딸 2명, 며느리 5명, 사위 1명 이렇게 22명과 두 형이 집합해 있었다.(신명호, ‘임진왜란 중 선조 직계 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호, 군사편찬연구소, 2011)

 

4월 27일 “죽을 따름”이라고 했던 이일이 상주전투에서 대패했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주, 아카넷, 2013, p178) 조정에 패전 보고서를 올렸다.

 

그날 요동 망명이 처음으로 어전회의 안건으로 상정됐다. 상정한 사람은 선조 본인이었다. “계속 기세를 몰아온다면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천자(天子)에게 간절히 요청하려 한다. 상국이 어찌 애처롭게 여겨 주지 않겠는가.”(회의 참석자 이정귀, ‘월사집’ 1, ‘임진피병록’) 류성룡이 말했다. “한번 다른 나라로 건너가면 곧 기공(寄公·나라 잃은 임금)이 됩니다.”

 

그런데 선조가 원하던 말은 영의정 이산해에게서 나왔다. “천문(天文)을 보니 천자가 반드시 허락해 줄 것입니다.” 즉시 선조가 말을 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다. 왜군이 요동에 난입하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북경이 있고, 북경이 버티지 못해도 남경으로 옮겨가 피할 것이다.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는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더라도 차차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최종 목표가 중국이고 북경에서 명 황실과 지낸 뒤 대륙을 횡단해 남경에서 안전하게 지내겠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틀이 지난 4월 30일 새벽, 선조를 태운 가마가 빗속을 뚫고 모래재를 넘었다. 류성룡이 모래재에서 뒤를 보니 한성이 불타고 있었다. 흙탕을 뚫고 도착한 임진나루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행은 나루를 관리하는 승청(丞廳)을 불태워 앞을 밝혀 강 건너 동파관에 도착했다.(앞 ‘징비록’, p207) 

경기도 파주 임진강 임진나루 주변. 동파리에서 본 모습이다. 야반도주한 선조는 사진 왼쪽 강 건너편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관에 닿은 뒤 “명나라로 가겠다”고 재차 선언했다.

 

5월 1일 꺾이지 않은 고집, 망명

 

5월 1일 동파관을 출발해 개성으로 향하기 전 선조가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렀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류성룡이 말했다. 나흘 전 중국 고사를 인용한 발언보다 더 강경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선조가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류성룡이 안 된다고 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주로 간 뒤 위급하면 요동으로 가자”고 했던 도승지 이항복은 좌의정 류성룡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탈출하는 난파선 사람들

 

동파관을 떠난 일행이 개성으로 향했다. 왕실 사람들은 동파관과 판문에서 끼니를 때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틀째 굶었다. 황해도 장단에 이르러 비로소 서흥에서 온 호위병 봇짐에서 현미 두어 말을 찾아 백관이 배를 채웠다. 경기도에서 따라왔던 병졸과 하급 관리들은 달아나고 없었다. 개성에 도착해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호위병 가운데 가위에 눌려 헛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었고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궁녀 가운데에는 목을 칼로 찔러 자살하려는 이도 나왔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그 사이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종묘를 불태웠다. 일본군에 붙어 길잡이 노릇을 하는 무뢰배가 매우 많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1일 “평양 사수” 선언과 도주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선조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개전 직전 명 황제 생일을 맞아 성절사(聖節使)로 유몽정이 선정됐는데, 선조는 평야에서 유몽정에게 이리 명했다. “북경에 도착하면 먼저 내가 망명하겠다는 뜻을 전하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망명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유몽정은 “일단 전황 보고부터 하겠다”고 답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6월 2일 선조가 평양성 문에 나아가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1592년 음 6월 2일 ‘선조실록’) 8일 일본군이 황해도를 휩쓸고 대동강변에 도착해 군영을 설치했다. 10일 왕비가 함흥으로 가기 위해 채비를 하자 평양 주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호조판서 홍여순도 두드려 맞았다. 칼과 창을 든 주민들이 거리마다 고함을 질러댔다.(1592년 음 6월 10일 ‘선조실록’) 다음 날 선조가 영변으로 떠났다.

 

6월 13일 요동 망명 최종 결정

 

6월 13일 영변에서 선조가 회의를 소집했다. “일찌감치 요동으로 가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 대신들이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하다”며 우회적으로 만류했다. 선조가 이리 말했다. “그렇다면 갈 곳을 말하라.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수는 없다(予死於天子之國可也 不可死於賊手·여사어천자지국가야 불가사어적수).”

 

그래도 반대 의견이 다수였다. 선조가 또 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세자를 여기 놔두고 나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광해군에게 국내 문제를 맡기고 자기는 망명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 말했다. 왜적 손에 죽느니 어버이 나라에 가서 죽겠노라(無寧死於父母之國·무녕사어부모지국).” 대신 최흥원이 “안 받아줄 수 있다”고 의견을 냈다. 선조는 이리 답했다. 받아주지 않더라도 기필코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雖然予必渡鴨綠江矣·수연여필도압록강의).”

 

“안남이 멸망하고 중국에 입조해 나라를 살렸듯, 나 또한 나라를 살리려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선조를 밀착하며 호종하던 사관(史官)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달아나버렸다.

 

선조는 다음 날 세자 광해군에게 병력 모집과 민심 위무를 위한 분조(分朝)를 명하고 망명과 원병을 청하는 자문을 명나라에 보냈다. 전시 관리는 세자가 맡고 본인은 요동행을 택한 것이다. 선조는 그 길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1592년 음 6월 13일, 14일 ‘선조실록’,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8일 류성룡의 선택, 권력 이양

 

망명을 결사반대했던 류성룡은 요동행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류성룡은 더 과격한 계획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세자에게 왕권을 양보받으려 한 것이다.

 

의주 가는 길목 선천에서 명나라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남인인 류성룡과 서인인 정철이 선조를 뵙자고 청했다. 두 사람은 “모두가 신(臣)들의 죄”라 아뢰고 별 이슈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두 사람은 “요동행밖에 방법이 없으니 아예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고 가시라고 하자”고 했으나 이 말을 하지 않았다.’(1592년 6월 18일 ‘선조실록’) 세자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해 전쟁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는 뜻이니, 아무리 간이 크고 결기 가득한 사람이라도 실천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6월 26일 거부된 망명

 

6월 26일 명나라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다음은 실록 기록이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을 본 뒤 우리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음 6월 26일 ‘선조실록’)

 

‘걸내부(乞內附·망명을 구걸한다)’라는 제목으로 ‘몸 둘 곳 없어 식구 몇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 출판부, 2022, p90 재인용)고 애걸한 망명 요청에 압록강 건너 100리 북쪽 여진족 지역에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고 답한 것이니, 실질적인 거부였고 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북경이 무너지면 남경까지 가겠다’고 했던 선조는 망명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형식은 ‘조선 잔류 결정’이지만 실질은 거부당한 것이다.

 

7월 11일 명 황실 답이 도착했다. 첩보대로였다. 원하면 100명까지 관전보 수용, 구원병은 보냄’. 황명을 첨부해 명 황실 병부가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보낸 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이 대대로 동방에서 왕위(王位)를 누려 대국(大國)으로 일컬어졌는데 어찌하여 왜가 한번 쳐들어오자 멀리서 보기만 하고는 달아났는가. 놀랍고 이상스럽다.’(1592년 음7월 11일 ‘선조실록’) 이상 귀 닫은 지도자, 선조의 요동 도주 미수 전말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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