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디 박물관에서 다시 필 '유길준과 개화의 꿈']
[미술품 복원의 세계]
피바디 박물관에서 다시 필 '유길준과 개화의 꿈'
리움에 전시된 피바디 병풍圖
우리 복원기술로 되살린 쾌거
국외 문화유산 환수 어렵다면
현지에서 활용할 방안 찾아야
지난 3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삼성문화재단과 함께 미국 피보디에식스(Peabody Essex) 박물관이 소장한 '평안감사도과급제자환영도'(平安監司道科及第者歡迎圖) 8폭 병풍의 보존 처리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사진은 병풍에 비단을 붙이는 모습./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조선 말 개화 사상가들은 “서양을 본받아 우리도 문명 개화를 이루자”고 외쳤다. 1883년 미국에 건너가 선진 문명을 접한 유길준은 한발 더 나갔다. 서양 문물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에 더해 그는 조선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관심이 컸다. 보스턴 인근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조선 풍물 수집을 권했고 귀국하면서 자신이 쓰던 물품도 기증했다. 이는 피바디가 2000점 넘는 한국 문화유산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대부분 수장고에 방치된 채 한 세기 동안 빛을 못 봤다. 전시할 일이 생기면 일본관에서 더부살이를 했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1994년 말, 조선일보와 국립중앙박물관이 피바디의 한국 풍물을 들여와 ‘유길준과 개화의 꿈’전을 연 것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이 이 유물들을 만나려 전시장을 찾았다. 입장료 수입에 각계의 성금을 더해 약 30만달러를 “한국실 짓는 데 써달라”며 피바디에 전달했다. 이후 정부 지원도 더해져서 2003년 마침내 78평 규모의 어엿한 한국실이 ‘유길준 갤러리’란 이름으로 피바디에 들어섰다. 한국 유물을 3500여 점이나 소장한 독일 함부르크 민속 박물관조차 1980년 고작 0.6평의 전시 코너를 배정하는 등 변변한 한국실을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유길준 갤러리 설치는 의미가 컸다. 유길준 갤러리는 ‘외국에 흩어진 문화재를 환수하는 것 못지않게 현지에서 활용할 방안도 찾아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는 계기도 됐다.
유길준전은 ‘외국 박물관의 한국실’ 필요성만 돌아보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전시를 계기로 국외 소재 문화유산의 보존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평양의 잔치 모습을 병풍에 그린 ‘평안감사도과급제자 환영도’는 곳곳에 벌레가 갉아먹은 구멍투성이였고 부식도 심했다. 당시 기술로는 어찌할 수 없어 아쉬움 속에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후 우리 복원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를 잘 아는 피바디가 오는 5월 15일 유길준 갤러리를 확대해 재개관하면서 “재개관전의 핵심인 병풍을 복원해 달라”고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에 부탁했다. 이 재단은 10여 년 전부터 50여 차례에 걸쳐 훼손이 심한 해외의 우리 유산을 무상으로 복원해 돌려주는 사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엔 삼성문화재단과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참여해 재능 기부로 피바디가 소장한 병풍과 활옷을 복원했다.
복원된 병풍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리움 미술관에서 지난 6일까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국민과 재회했다. 리움을 찾아가 병풍과 만났다. 대동강과 부벽루를 품은 평양 풍경, 뱃놀이 장면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병풍 뒤에선 복원 과정을 기록한 다큐가 상영 중이었다. 충해(蟲害)로 생긴 1만여 구멍이 말끔히 메워지는 과정이 신기했다. 병풍 옆 벽면에 설치된 대형 터치 스크린은 한국의 IT 기술과 그림 속 전통미가 결합해 마법 같은 화면을 선사했다.
터치스크린 앞에 서서 두 손가락으로 그림을 확대해가며 감상하는데 뒤에서 탄성이 터졌다. 돌아보니 병풍을 보러 온 외국인들이었다. 그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들은 이 탄성이 5월 재개관하는 피바디 유길준 갤러리를 비롯해 우리 유물을 전시하는 세계 20여 나라 70곳 박물관에서도 울려 퍼졌으면 한다. 외국 박물관에 갈 때마다 크고 화려한 중국실과 일본실에 비해 초라한 한국실과 빈약한 전시품 때문에 속상했던 현실도 함께 개선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 유산은 세계 어디에 있든 우리의 자랑이다. 환수할 수 없다면 우리의 자랑거리가 그들의 나라에서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140년 전 유길준이 품었던 개화의 꿈을 21세기에 실현하는 방법이라 믿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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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복원의 세계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2022년 봄 개막한 ‘보화수보’ 전시를 보러 갔다가 고미술품 복원의 놀라운 세계를 접했다. 수보(修補)란 ‘낡은 것을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운다’는 뜻이다. 2년여의 복원 과정을 거친 작품 수십 점 중엔 앞뒤 표지 대부분이 찢긴 조선 초기 문신 문집 ‘매헌선생문집’도 있었다. 표지의 남은 조각에 메움용 종이를 붙이고 천연 염색한 닥지를 덧붙이는 배접(褙接)이라는 보강 작업을 네 차례 했다. 옛 종이와 메움용 새 종이의 강도 차이로 인한 2차 손상을 막기 위해 덧댄 종이에 단파장 자외선을 일부러 쪼이는 열화(劣化) 작업도 한다.
▶때론 손상된 모습을 남기는 것도 복원이다. 보화수보전에 나온 심사정의 그림 ‘삼일포’는 벌레가 갉아먹은 충식(蟲蝕)으로 곳곳에 난 작은 구멍이 오히려 눈 내리는 풍경 같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전문가들은 고심 끝에 훼손된 부분을 메우되 색의 차이를 두어 눈 내리는 착각 효과를 남겼다.
▶미술품 복원엔 미학·역사·물리학·생물학·화공학·임산학·재료공학·금속공학 지식이 총동원된다. 최근에는 AI도 가세했다. 영국의 인공지능 공학도가 설립한 미술품 복원 업체는 피카소가 여성의 누드를 그린 스케치 위에 ‘맹인의 식사’란 그림을 새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업체는 ‘맹인의 식사’를 훼손하지 않고 누드화를 복원하기 위해 AI에게 피카소의 붓터치와 색채, 물감의 높이까지 학습시킨 뒤 새 캔버스에 유화를 그렸다.
▶미국 피보디 에섹스 박물관이 소장한 19세기 8폭 병풍 ‘평안감사 도과급제자 환영도’가 11일 리움미술관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이 병풍에도 보존 전문가들의 땀이 녹아 있다. 복원에 16개월이 걸렸는데, 벌레 먹은 구멍 1만개를 메우는 데만 전문가 3명이 하루 12시간씩 3개월 정성을 쏟았다. 지금껏 모호했던 그림 배열 순서도 최근 평양 시가를 찍은 인공위성 사진까지 참조해가며 정확히 밝혀냈다.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이렇다 할 복원 기술이 없어서 일본 전문가들에게 배워야 했다. 이번 병풍 복원은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삼성문화재단 내에 설치한 보존연구실이 맡았다. 그간 국내 유물 복원에만 재능 기부를 해오다 처음으로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 복원에 나섰다. 몇 해 전 방탄소년단 RM도 해외에 나간 우리 문화재 보존을 위해 1억원을 기부했다. 그 돈으로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에 소장된 조선 활옷을 복원해 국내에 들여와 재작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했다. 우리 기술로 우리 문화재를 복원해 세계와 즐기는 시대가 됐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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