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三國遺事)]
[最古 史書 '삼국사기']
[삼국사기]
['定本 삼국유사' 유감]
[사드 반대 중국은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식으로 다뤄야]
김부식과 삼국사기
이자겸·묘청의 난 겪은 고려, 혼란 정리하려 역사서 만들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일부가 경매에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삼국사기’는 1573년 경북 경주 일대에서 인쇄한 옥산서원 소장본, 옥산서원 판본과 비슷한 목판을 1512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판본 등 50권 9책을 갖춘 완질본(권수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책) 2건이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삼국사기’ 일부는 16세기 후반 자료로 알려졌어요. 5권 분량인데 시작가는 1억5000만원이었답니다. ‘삼국사기’는 과연 어떤 책일까요?

삼국사기를 쓴 고려 학자 김부식의 표준 영정. 그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고구려·백제·신라 역사를 기록했지요. /전통문화포털
문벌 귀족 세력의 역사관 깃들어
삼국사기의 대표 편찬자는 고려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부식(1075~1151)입니다. 경주에서 태어나 20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에서 일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한림원이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어요. 1123년(인종 원년) 고려에 파견됐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에 대해 ‘학식이 넓고 깊어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자들이 그를 믿는다’고 기록했습니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에 이어 1135년 고려에는 또다시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었죠.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부식 등 개경에 근거지를 둔 귀족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유명한 시인 정지상도 묘청에게 동조했습니다.
결국 묘청은 서경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부식이었습니다. 학자를 진압군 대장에 임명했다니? 이것이 무신의 난(1170)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려의 전통이었는데,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유명한 장군들은 무신이 아닌 문신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묘청의 난은 1년 넘게 이어진 끝에 진압됐는데, 20세기 전반의 역사가 신채호(1880~1936)는 이 반란을 ‘조선 역사상 1000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하며 자주적, 고구려 계승 세력이 사대적, 신라 계승 세력에게 패배한 사건이라고 봤습니다.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송나라의 선진 문화를 흠모하는 유교적 문벌 귀족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인 1145년(인종 23년), 김부식이 왕명을 받은 지 5년 만에 완성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였습니다.
당시 인종은 두 차례의 변란을 겪은 뒤 혼란한 나라 상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고려 이전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거울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서술의 표준을 따르고 있습니다. 군주의 역사인 ‘본기(本紀)’와 인물의 기록인 ‘열전’을 중심으로 쓴 책이라는 뜻이죠.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자주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조선 초에 쓰여진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제후를 서술한 부분인 ‘세가(世家)’로 한 등급 낮춰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대주의 역사서라서 믿을 수 없다?
오래전 필자가 대학교 역사학과를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누군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사기품이고 삼국유사는 유사품이다!” 한국 고대사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역사서 두 권에 모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인 역사관에 입각해서 우리 역사를 폄훼했고, 삼국유사는 역사서도 아닌 책이 역사서를 흉내 낸 것일 뿐이야.”

2011년 촬영된 서울 송파구 백제 풍납토성 발굴 현장. 풍납토성 발굴로 인해 삼국사기 기록의 신빙성이 높아졌죠. 삼국사기에는 초기 백제가 한반도 중부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국가로 기록되어 있는데, 규모가 큰 풍납토성의 존재가 그걸 뒷받침해준 거예요. /연합뉴스
세월이 흘러 곰곰이 그 사람의 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 비판이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먼저 ‘삼국유사’에 대해 짚어보자면, 고려 후기인 1281년(충렬왕 7년) 일연 스님이 쓴 책으로 공식 역사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단군신화를 비롯해 ‘삼국사기’가 누락한 숱한 기록들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어떨까요. 물론 중국을 받드는 사대주의 사상이 많이 함유됐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대국(당나라)에 죄를 지었으니 멸망함이 마땅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쓴 것은 잘한 일이다” 같은 서술은 오늘날의 시각에선 당혹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려가 나라 이름으로 계승한 고구려 대신 신라를 정통으로 받들었기 때문에 ‘철저히 신라 중심의 서술’이었다는 한계도 갖습니다. 열전(列傳) 10권 중에서 3권을 김유신전으로 도배하고, 나당 연합군에 끝까지 항거한 백제 장수 지수신 대신 당나라에 항복한 흑치상지를 열전에 넣는 등 ‘신라·중국 위주의 기록’이었다는 의혹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깃든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건 과연 타당한 태도일까요? 설사 비뚤어진 시각을 피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제 풍납토성과 같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들은 ‘삼국사기’에 수록된 삼국의 초기 기록들이 상당 부분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했습니다.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기록해 울릉도와 독도가 최소한 그때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기록한 책 역시 ‘삼국사기’였습니다. 어찌 됐든 ‘삼국사기’가 우리 고대사의 기본 정사(正史)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사대주의적인 의도를 충분히 감지한 상태에서 기록을 검토해야 하겠죠.
한 고려 시대 전공자는 ‘삼국사기’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이나 유교적 가치관이 풍미하고 있는 속에서도 자아 발견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뚜렷이 보이고, 그곳에 드러나고 있는 강한 국가 의식도 높이 살 만하다.”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라’(E H 카)는 말이 잘 들어맞는 책이 바로 ‘삼국사기’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무척 소중한 문화유산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2-27)-
______________
삼국유사(三國遺事)
서민 생활사 담은 역사서… 향가 14수도 실려있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시대 승려 일연(一然·1206~1289)의 표준 영정.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최근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우리나라 기록물 3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됐어요. 삼국유사는 언제 누가 쓴 책일까요?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인 13세기 후반 일연(一然·1206~1289) 스님이 쓴 책으로,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를 다룬 소중한 역사서입니다.
78세에 얻은 '마지막 효도의 기회'
"소승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소서."
1284년(충렬왕 10년) 고려의 수도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 충렬왕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불교 국가인 고려는 가장 덕이 높은 승려를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하다'는 뜻에서 국사(國師·한 나라의 스승)로 삼았어요. 종신직인 국사는 개경에 머물며 온 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임금의 자문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국사가 된 78세의 일연 스님이 국사에서 물러나 귀향하겠다는 선언을 한 거예요.
"대사,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과인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울상이 된 임금에게 일연 스님이 이렇게 말했어요. "평생 불효자로 살아온 소승이 이제라도 노모를 모시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된 지 어언 65년. 서른 살이던 어머니는 이제 95세가 됐고, 승려로서 최고 직위인 국사 자리에 오른 일연은 더 늦기 전에 모친을 봉양하며 뒤늦게 자식의 도리를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는 모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향인 경북 경산에서 반년 동안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늦게나마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일연은 무척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후 일연은 경북 군위의 인각사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대작 삼국유사가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절이죠.
수행과 학문 깊어 '나라의 스승' 돼
일연 스님의 본래 이름은 김견명(金見明)이었습니다. 모친이 환한 햇빛이 자신에게 비추는 꿈을 꾸고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열세 살 때인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해 승려가 됐고, 21세가 되던 1227년 승과(승려가 보는 과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수행 생활을 했지만 속세를 벗어나 살기엔 나라가 너무나 어지러웠습니다. 1231년 몽골의 고려 침략이 시작돼 40년 넘게 전국이 참화를 입었기 때문이죠. 그는 고통받는 민초들의 피폐한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수행과 학문을 멈추지 않았는데, 1256년(고종 43년) 집필한 불교서적 '중편조동오위'는 삼국유사와 함께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대표 저작입니다. 이 무렵 일연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 승려가 됐다고 합니다.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임금에게 불법을 설파했고, 이듬해 국사가 돼 궁궐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를 받았는데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존(國尊)' '보각국사'라는 칭호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절을 전후해 그가 집필한 책은 불교의 교리를 주제로 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던 시기, 외세의 침탈 속에서 나라의 소중한 역사를 담은 책인 삼국유사였습니다.
일반 서민의 생활사 담은 귀중한 책
당시 고려시대 이전을 다룬 공식 역사서는 삼국사기였습니다. 유학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신화나 설화는 최대한 기록에서 배제했어요. 그러나 삼국시대의 유사(遺事·예로부터 전하는 일)를 쓴 삼국유사는 형식과 내용에서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빠진 이야기를 풍부하게 넣을 수 있었습니다.
현존 문헌 중 삼국유사에 처음 실린 대표적인 기록이 고조선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입니다. '외세 침략에 시달리는 고려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죠. 신라인이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땅을 개척했던 것을 태양 신화의 상징 속에 담은 연오랑세오녀 설화, 끝없이 물질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헛된 것임을 설파하고 진정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조신 설화 같은 숱한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바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임금과 귀족뿐 아니라 지체 낮은 승려와 서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게 해 주는 이야기들 역시 많이 들어 있죠. 공식 기록엔 없는 생활사(史)와 문화사의 보물창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일연을 탁월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동요' '제망매가' 같은 귀중한 향가 14수가 실린 책도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국학자 최남선(1890~1957)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 말한 것은 이 같은 삼국유사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겠죠.
삼국유사의 여러 가지 한계도 분명 없지 않습니다. 저자가 전문적인 사관(史官)이 아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거나 잘못 기록된 것도 적지 않으며, 지나치게 불교·신라 중심이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공식 기록이 아니라 개인 저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것이 꼭 결정적인 흠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놓쳤거나 일부러 누락시킨 고대의 많은 기록들을 보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
삼국유사의 역사 서술 방식은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기사본말체란 뭘까요? 전통적으로 동양의 대표적인 역사 서술 방식으로는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 기사본말체가 있습니다. 먼저 편년체는 연월일의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공자의 '춘추',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입니다. 기전체는 역대 왕의 기록인 본기(本紀)와 인물 기록인 열전(列傳) 등의 체제를 갖춰 서술한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고려사'가 대표적입니다.
기사본말체는 일종의 '주제별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별로 제목을 달고 관련 기록을 모아 서술하는 것입니다. 전체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면 흩어지기 쉬운 한 가지 일의 발단, 전개 과정, 영향까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는 특징이 있죠. 자치통감을 기반으로 편찬한 중국의 '통감기사본말'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좌) 부산 범어사에 소장된 삼국유사 권 4~5의 일부. 삼국유사는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를 다룬 소중한 역사서입니다. /문화재청 / (우) 일연은 경북 군위의 절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군위군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12-15)-
______________
最古 史書 '삼국사기'
신윤복 '미인도' 등 8점은 보물로

4일 국보 승격 예고된 보물 제 525호 ‘삼국사기’. /문화재청
김부식이 삼국사기(1145년)를 먼저 썼지만, 국보 지정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1281년)가 15년 빨랐다.
문화재청은 4일, 경주 옥산서원 소장 보물 제525호와 개인 소장 보물 제723호인 '삼국사기'를 모두 국보로 승격 예고했다. 두 종은 모두 조선 태조·중종 때 만든 목판과 고려 시대의 원판을 혼합해 인쇄한 것으로, 당시 학술 동향과 목판 인쇄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승격 이유. 제525호는 1573년(선조 6년) 인쇄됐고, 제723호는 1512년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삼국사기는 모두 9책(冊)으로 구성된 완본(完本)이다.
삼국유사는 이보다 앞선 2003년 조선시대 판본 2종이 국보로 지정됐다. '삼국유사 권 1~2'(보물 제1866호)도 이번에 추가로 국보 지정이 예고됐다. 최초의 국가 주도 편찬 사서이자 현전하는 국내 최고(最古) 사서인 삼국사기의 국보 지정은 왜 늦어졌을까? 김은영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원칙적으로 소장자가 국보 승격을 신청해야 심사를 시작하는데 그동안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보·보물로 지정되면 소장품 가치가 높아져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소장품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면 전시를 열 때마다 문화재청에 '보존 장소 변경 신고'를 해야 하고, 5년마다 정기 조사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와 관리가 복잡해진다. 소장자 입장에서는 개인 재산권을 제한받는다고 여겨 굳이 국보·보물로까지 등록할 이유를 얻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보급 가치가 있는 문화재가 항온·항습 시설이 없는 은행 철제 금고 같은 곳에 보관, 방치되기도 한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도 소장자가 서울의 한 시중은행 대여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지난해엔 국보급으로 평가받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일부가 불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 소속 한 문화재위원은 "국가가 정말 중요한 국보는 개인에게 사들여서 관리하는 게 맞지만 예산 때문에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삼국사기 국보 지정 외에도, 말에 탄 선비가 시선을 돌려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를 보는 모습을 묘사한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 등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 '나전 경함' 등 총 8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지정 예고된 문화재는 30일 동안 의견 수렴·검토 과정을 거쳐 오는 2월 문화재위원회 심의 후 최종 지정된다.
-양지호 기자, 조선일보(18-01-05)-
______________
삼국사기
10년간 두 차례 반란 겪은 인종, 김부식 등에 正史 편찬
野史 중심의 '삼국유사'와 달라… 정부, 조만간 두 인쇄본 국보 지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전해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곧 국보(國寶)로 지정된다고 해요. 문화재청이 지난달 경주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1573년 인쇄)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1512년 인쇄 추정)를 모두 국보로 삼겠다고 밝혔기 때문이지요. 두 삼국사기는 각각 조선 선조·중종 때 인쇄한 것으로, 모두 9책(冊)으로 구성된 완본(完本)이랍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 제17대 왕인 인종 때 김부식이 여러 학자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역사책이에요. 같은 시대에 쓰인 역사서로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1281년 편찬)가 있지요. 오늘은 삼국사기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반란 속에 세력을 키운 김부식
12세기 초반, 고려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두 차례의 큰 반란이 일어났어요. 1126년 '이자겸의 난'과 1135년 '묘청의 난'이지요. 먼저 이자겸의 난은 열네 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인종을 대신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인종의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자신의 힘을 믿고 갖은 횡포를 부린 데서 출발했어요. 이를 보다 못한 인종과 여러 신하가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이자겸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붙잡혀 귀양을 간 사건이에요.
묘청의 난은 이자겸의 난 때 개경 궁궐이 불타는 등 피해를 입자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오늘날 평양) 출신 신하들이 서경으로 나라의 도읍지를 옮길 것을 주장하면서 시작됐어요. 개경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자 서경 세력들이 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 사회는 또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답니다.
10년 새 두 차례의 큰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 삼아 정치적 세력을 크게 키운 인물이 있었는데요. 당시 학문에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던 문신(文臣) 김부식(1075~1151)이었어요. 김부식은 경주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임금의 명령을 문서로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일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지요. 1123년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저서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을 '학식이 넓고 깊어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자들의 믿음을 받고 있다'고 평했답니다.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편찬
김부식은 이자겸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을 때 주로 학문 활동에만 열중해서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이자겸이 반란에 실패해 귀양을 간 뒤에는 정2품 중서문하평장사라는 높은 관직에 오르는 등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했어요.
김부식은 개경 세력을 대표하는 관료로서 서경으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묘청 등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직접 왕명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功臣)'으로 책봉됐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당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종1품 중서문하성 장관직)에 오르기도 했지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함께 공을 세운 윤언이라는 인물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김부식은 라이벌 윤언이를 내쫓기 위해 그가 묘청의 난을 일으킨 서경 출신 인물 정지상과 내통(남몰래 관계를 가짐)했다며 처벌할 것을 임금에게 요구했고, 이에 임금도 윤언이를 지방 한직(한가한 벼슬자리)으로 내쫓았지요. 그런데 인종이 1140년 다시 윤언이를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하자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답니다.
인종은 그런 김부식을 위로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지시했고, 젊은 관료 8명을 보내 그 일을 돕게 했어요. 김부식은 5년 동안 열심히 편찬 작업에 매달려 1145년 '삼국사기'를 완성했고, 인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 앞에 올렸습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선 막막… 한탄스럽다"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이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의 서적과 중국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아 자세히 설명하는 자가 많으나,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도리어 막막하여 그 처음과 끝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임금에게 올린 글인 '진삼국사기표'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김부식은 이 글을 통해 중국의 다양한 역사 기록들이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전해지던 우리 역사책은 표현이 거칠고 내용이 부실해 왕이나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어요.
'삼국유사'가 일연 혼자 쓴 이른바 '야사(野史)' 서적이라면, '삼국사기'는 김부식 등 당대 최고 학자들이 쓴 정사(正史) 책이에요. 그렇다면 인종은 어떤 이유로 김부식을 시켜 '삼국사기'를 짓도록 한 걸까요? 두 차례의 큰 반란을 겪은 인종은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을 정리하고 고려가 어서 안정된 국가로 발전하길 바랐어요. 이에 따라 고려 이전에 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왕과 신하의 자세를 바로잡아 흔들리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했지요. 김부식도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왕과 신하가 정치를 잘하고 못함에 있음을 과거 우리 역사를 통해 밝히고자 했던 거랍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8-02-06)-
______________
'定本 삼국유사' 유감

일연 스님이 1281년에 쓴 삼국유사는 우리 고대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보고(寶庫)이다.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상고(上古)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 기록, 민간 설화, 불교 사화(史話)가 두루 들어 있고 고대 시가인 향가도 14수(首)가 전한다. 그래서 수백 종의 번역본과 해설서가 나와 대중에게 널리 읽히고, 관련 논문이 3000편에 이를 정도로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삼국유사가 줄곧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중기에 목판 인쇄되긴 했어도 20세기 들어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될 때까지 600년 넘게 잊힌 책이나 다름없었다. 유교적 합리주의를 신봉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고대적 신비주의를 담은 삼국유사를 "허황돼서 믿을 수 없다"고 배척했다. 그 때문에 삼국유사를 찍은 목판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인쇄본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북도가 '삼국유사 현창 사업'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일연 스님의 고향(경산), 삼국유사의 산실(産室)인 인각사(군위), 삼국유사를 인쇄한 곳(경주)이 모두 있는 경북은 삼국유사를 높이는 주체로 가장 적격이다. 전해지는 인쇄본을 토대로 조선중기본과 조선초기본 삼국유사의 목판을 복각(復刻)하는 작업을 벌여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중기본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과 달리 조선초기본은 빠진 곳이 있어 목판이 학문적 엄밀성을 기하기는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사업이자 가장 역점을 두는 '삼국유사 정본화(定本化)'는 납득하기 어렵다. 경상북도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자료들을 원전과 대조하여 축약·대체·삽입·누락된 부분은 원문을 반영하여 '경상북도본 삼국유사'를 만들고 이를 목판으로 새긴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이 목판이 삼국유사의 '완성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삼국유사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삼국유사는 많은 저술을 인용했어도 일연 스님이 뚜렷한 문제의식과 관점을 갖고 재구성하고 자신의 견문(見聞)을 보태 쓴 저서이다. 인용된 원전을 그대로 반영하면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삼국유사를 단순한 사료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원전 반영을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할지도 문제다. 집필된 지 700년이 훨씬 넘은 책의 '완성본'을 지금 내겠다는 발상 역시 공감을 얻기 힘들다. 예전에 없던 목판을 새로 만든다는 착상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엉뚱한 계획이 세워진 것은 참여 학자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어느 책보다도 종합성이 강한 삼국유사는 역사학·국문학·불교사 등 여러 분야의 학자가 공동 작업을 해야 한다. 삼국유사를 알리는 데 힘써온 한 학자는 "삼국유사에 대한 정리가 몇 차례 있었지만 연구 업적도 쌓이고 디지털 인문학 등 방법론도 진보해서 이제 여러 분야가 협조하는 종합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 고전인 삼국유사에 쏟는 경상북도의 열정은 소중하다. 수십억원이 투입되는 만큼 방향만 잘 잡으면 오래도록 남을 성과로 이어져 온 국민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사업을 본격화하기 전에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다시 폭넓게 수렴해 보기를 권한다.
-이선민 선임기자, 조선일보(16-07-28)-
______________
사드 반대 중국은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식으로 다뤄야

김유신 영정/위기피디아
중국이 한국의 존망(存亡)이 걸린 핵(核)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놓고 간섭을 시도하는 것은 한국을 속국으로 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주권침해이다. 이런 간섭을 불러들인 자들이 한국의 반역적 종북 좌파 세력이고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이다. 당(唐)과 맞서 신라(新羅)의 자주성을 지켜낸 신라통일기의 영웅들이 새삼 위대하게 보인다. 특히 김유신(金庾信).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인종(仁宗)시대의 권신(權臣)이기도 했던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속으로, 또는 신화나 전설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채호(申采浩)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정사(正史)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정색(正色)을 하고 쓴 책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정사(正史) 고려사(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고동(鼓動)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걸)-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문무왕(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교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인간상(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전국(戰國)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주역)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시각(視覺), 무인(武人)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열전(列傳) 부분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痛心疾首)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난승(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어전(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김유신의 결전(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소정방(蘇定方)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은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신라(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
소정방(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부형(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의리(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이것이 신라(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자아(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대국(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임금의 조아(爪牙·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시석(矢石·화살과 돌) 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소강(小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누대(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수성(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기업(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元述) 같은 자는 이미 선군(先君 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김유신이 권병(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통일대업(統一大業)에 정진(精進)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공존(共存)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형장(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지성(至誠)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김부식은 김유신전(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김유신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김유신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김춘추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근친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김유신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안심(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김유신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전형(典型)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김유신(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유신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김유신의 전기(傳記)를 쓴 정순태(鄭淳台) 씨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정의(定義)하는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조선닷컴(16-07-11)-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國史-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욕 견디며 매달린 남북 협상, 김일성은 열흘 만에 걷어찼다] (0) | 2025.03.16 |
---|---|
[미술품 복원의 세계] (0) | 2025.03.12 |
[하늘과 바람과 별 그리고 윤동주] [조선일보 97년.. ] (0) | 2025.02.23 |
[김옥균 암살] .... [갑신정변과 원세개(袁世凱)] [우리는 왜 망했나] (1) | 2025.02.18 |
[태종과 원경왕후] [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 ] .... (0) | 202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