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암살]
[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조선형벌잔혹사.. 최후의 능지처사-김옥균]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한 지식인 홍종우]
[갑신정변과 원세개(袁世凱)]
[우리는 왜 망했나]
김옥균 암살
[임용한의 전쟁사]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의 미국 조계(租界)지에 있던 동화양행 호텔 2층에서 김옥균이 홍종우가 쏜 권총에 맞아 숨졌다. 김옥균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풍운아라는 명칭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일본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도 일본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일본도 그 사실을 눈치챘기에 작은 도움도 주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들었던 것 같다. 초조해진 김옥균은 이해에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 했는데, 이홍장이 상하이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다. 주변인 모두가 음모라고 의심했다. 심지어 이 일을 주선한 이일직과 홍종우에 대해 박영효와 윤치호를 비롯해서 일본에서 사귀었던 지인들 상당수가 자객 같다고 김옥균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한 일본인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아! 김옥균이 죽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암살 4개월 후인 7월에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박영효는 사면을 받아 귀국했다. 김옥균이 지인들의 충고를 따라 상하이로 가지 않았다면 조선으로 귀국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 같지만, 김옥균으로서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기회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김옥균은 예리하고 두뇌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신념과 자기 확신이 강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고 자만심이 너무 강했다. 이것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김옥균도 홍종우가 자객임을 눈치채고 있었는데, 자신이 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홍종우는 이를 역이용했다. 이홍장이 그를 부를 리가 없는데, 여기에 넘어간 것도 초조함과 자만심 때문이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신념이 그를 망친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가 아는 세상은 극히 일부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자가 신념에 사로잡히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5-02-18)-
______________
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땅의 팔자
서울 종로구 화동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 언덕에는 정체불명인 돌덩이가 보존돼 있다. 안내판을 봐도 정체가 도무지 불명이다.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존한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은 이 돌덩이는 1905년 을사조약 대표서명자인 외부대신 박제순 집터에 있던 우물돌이다. 새겨진 글자들은 박제순이 썼고, 정독도서관 부지 절반이 박제순 집터였다. 집터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 집터와 겹친다. 김옥균 집터는 이 언덕 아래 잔디밭 부근이었다. 정변을 함께 한 서재필 또한 이곳에 살았다. 두 사람 집터에는 훗날 대한제국에 의해 관립학교가 설립됐고, 식민시대인 1916년 박제순이 사망하고 2년 뒤 당시 총독 하세가와에 의해 집터 또한 학교부지로 편입됐다. /박종인 기자
정독도서관과 정체를 숨긴 돌덩이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 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에 있는 박제순 우물돌. 안내문은 ‘박제순’의 ‘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다./박종인 기자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이온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 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 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정독도서관 동쪽 잔디밭에 서 있는 김옥균 집터 표석(왼쪽). 흙이 붉어서 ‘홍현(紅峴)’이라 불렸던 도서관 언덕에 김옥균이 살았다. 1884년 함께 홍현에 살던 서재필, 고개 아래 가회동에 살던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정변 주인공들은 갑신정변 실패와 함께 죽거나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 집터는 폐허가 됐고 대한제국 관립학교로 변했다. 1918년 북쪽 언덕에 있던 을사오적 박제순 집터 또한 학교 부지로 편입됐다. 지금은 경기고를 거쳐 도서관이 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박제순 집터 쪽에서 본 도서관 전경. 사진 왼쪽이 김옥균 집터 방향이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 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1900년 대한제국 최초 관립중학교가 정독도서관 터에 있었음을 알리는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뒤편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 표석이다./박종인 기자
관립학교의 설립과 박제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 칙령을 발표했다.(1899년 4월 4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 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 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카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 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토지를…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 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이상 ‘경기90년사’, p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났다. 아내 유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시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김윤식, ‘속음청사’14(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 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궂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09-14)-
______________
조선형벌잔혹사.. 최후의 능지처사-김옥균
영조의 경고와 김옥균
재위 35년째인 1759년 한가위 나흘 뒤, 온갖 잔혹 형벌을 총동원해 정적을 다 처리한 영조가 명을 내렸다. 일체의 잔혹 형벌과 고문을 금한다는 하명이다. 아주 근엄하다. 그 가운데 역률(逆律) 추시(追施) 금지령이 들어 있었다. '추시'는 법을 소급 적용하는 조치다. 은전(恩典)이든 형벌이든 죽은 사람에게 적용하는 법적 조치가 추시다.
충남 아산에 있는 김옥균 유허. 1894년 양력 4월 서울 양화진에서 부관참시와 능지처사 당한 뒤 김옥균 시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일본으로 가 묘 두 군데에 안장됐다. 아산에는 김옥균의 옷가지와 아내 유씨가 합장돼 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10년 뒤 청나라 상해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서울로 운송된 시신은 고종 명에 의해 능지처사 됐다. 목을 베고, 온몸에 칼집을 내고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이다. 능지처사형은 원래 산 사람에게 가하는 잔혹 형벌이지만 김옥균은 부관참시를 겸한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135년 전인 1759년 법적으로 금지된 반역죄 소급형이었고, 조선 왕국의 마지막 능지처사형이었다. /박종인 기자
영조는 이렇게 명했다. "본인이 죽고 나서 반역죄를 소급 적용한 처벌은 금지한다. 이를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身已死而追施逆律者禁除 遵則興不遵則亡 ·신이사이추시역률자금제 준칙흥부준칙망)(1759년 8월 19일 '영조실록') '반역죄[逆律·역률]'에 관한 한 소급 처벌은 금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준엄한 경고도 덧붙였다.
"이 뒤로 군주가 이런 짓을 하거든 신하는 이 명으로 간쟁을 하라. 이를 따르지 않고 군주에게 영합하는 신하는 간사한 소인이다. 나라 흥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으니,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이후 이 규정은 조선 형법전인 '대전통편'에 성문화됐다.
사자(死者)에 대한 소급 처벌은 이후 헌종 때 부모를 죽이고 자기도 죽은 황해도 재령 사람 윤가현과 충청도 정산 사람 임태두가 그 시신을 거리에 팽개쳐버리는 폭시(暴屍)형을 당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1845년 8월 19일, 1848년 6월 17일 '헌종실록')
역률 추시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135년 뒤 어느 봄날 역적 하나가 청나라에서 암살돼 그 시신이 돌아오매, 역적 시신은 그 즉시로 강변에서 중인환시리에 역률 추시됐다. 이틀에 걸쳐 사내는 관에서 끄집어내져 목이 베이고 온몸에 칼집이 나고 사지를 절단당하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처형 이야기다.
상해에서 벌어진 암살극
1884년 갑신년 겨울 동료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과 벌였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흘 만에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일본 체류 내내 암살 위험에 시달렸다. 암살 시도 기미가 보였을 때 김옥균은 고종에게 "왜 경솔한 일을 행하여 국체를 손상시키고 성덕(聖德)을 더럽히는가"라며 원망을 하기도 했다.('한국근대사기초자료집 2', 1886년 김옥균이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외국인 정치 망명객 1호였지만 일본에서도 김옥균은 골칫거리였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등지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며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런 김옥균이 상해에 가서 청나라 거물 이홍장을 만나 조선 독립과 개혁을 담판하겠다는 것이다.
1894년 양력 3월 23일 김옥균은 고베 항에서 청나라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서 친해진 조선인 홍종우도 동행했다. 출국 직전 김옥균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 만사 운명이다. 이홍장은 나를 속일 생각이겠지만 나는 속을 작정으로 배를 탄다. 5분만이라도 담화 시간이 주어지면 나의 것이다."(미야자키 도텐, '김옥균 선생을 회고하며',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너머북스, 2011, p197 재인용)
3월 27일 상해 동화양행 호텔에 투숙한 다음 날 옆방에 있던 홍종우가 '자치통감'을 읽고 있던 김옥균에게 권총을 쐈다. 세 발을 맞은 김옥균은 즉사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는 일찌감치 병조판서 민영소가 밀정 이일직을 통해 포섭한 자객이었다. 수구 근왕파인 홍종우는 2년여 김옥균과 친분을 쌓은 끝에 '역적 처단'에 성공한 것이다.
"역적에게 또 한 번 죽음을!"
김옥균이 처단됐다는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지자 '온 조정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모든 관리가 도성문으로 나가 맞이해야 한다고 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3. 제방기밀신 '김옥균의 유해와 홍종우의 도착 및 김옥균의 유해처분의 건') 4월 12일 홍종우는 김옥균 시신을 중국식 관에 넣고 '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적은 천을 덮은 뒤 청나라 군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관과 함께 배를 갈아타고 다음 날 양화진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관리는 몇 명에 불과했다.
1894년 일본에서 발행된 '김옥균씨 조난사건' 목판화. 왼쪽이 김옥균이고 오른쪽 권총을 든 사람이 홍종우다. /도쿄게이자이대 도서관
4월 14일 검시관을 보내 김옥균임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현직 대신들이 연명해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누군들 그 사지를 찢고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이제 귀신과 사람의 격분이 조금 풀리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이 비록 죽었지만 소급해서라도 목을 잘라 두루 돌리고 법을 밝힐 수 있게 되었나이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이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인조 때 역적 이괄과 영조 때 역적 신치운이 능지처사를 당했듯 김옥균에게도 능지처사형을 내려달라"고 연명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곧바로 홍문관에서도 사헌부·사간원과 똑같은 내용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이 말했다. "간절한 경들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만둘 수가 없다. 윤허한다."(1894년 음력 3월 9일 '고종실록')
고종은 스스로 의견을 내기보다는 관료들의 의견을 마지못해 따르는 식으로 정책을 결정하곤 했다. 고종의 의사 결정 패턴은 40년 동안 그렇게 동일했다. 김옥균 시신 처리 방침 또한 그 패턴에 따라 결정됐다. '관료들의 결정이 그러하니 나 또한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대명률'에 따르면 모반과 대역은 모두 능지처사를 하되, 즉각 시행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보고했다. 또 "연좌된 사람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집은 허물어 연못으로 만들겠다"고 보고해 고종 윤허를 받았다. 그러니까 죽은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재판도 없이 '부대시(不待時·즉각) 능지처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불법으로 진행된 마지막 능지처사
문제는 이날 결정된 역률 추시는 135년 전 영조와 법률에 의해, 죽은 사람 가족을 연좌시키는 '노적(孥籍) 추시'는 1776년 9월 1일 정조가 즉위하면서 금지된 형벌이라는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현직 대신과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홍문관은 이 금지 조항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전문 관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최후의 능지처사는 그렇게 감정 가득한 회의 속에서 법을 무시한 채 결정됐고, 집행됐다. 그것도 죽은 자를 관에서 꺼내 그 시신에 집행하는 부관참시를 겸한 능지처사였다.
처형 직후 양화진 형장 사진. 참수된 머리에 내걸린 '대역부도옥균' 글자는 암살범 홍종우가 썼다. /미 헌팅턴도서관 잭 런던 사진 자료
조정의 일치된 결정에 따라 김옥균 시신에 대해 곧바로 형이 집행됐다. 집행은 양화진 보리밭에서 있었다. 땅에 반듯하게 엎드린 시신에 나무받침을 댄 뒤 머리와 오른손, 왼손이 톱으로 잘려나갔고 이어 두 발이 도끼로 잘려나갔다. 이어 등 양옆으로 1인치(약 2.5센티미터) 깊이 칼집을 세 군데 낸 다음 머리를 밧줄로 묶어 대나무 삼발이에 내걸었다. 손과 발도 양쪽으로 함께 내걸었다. 몸은 그대로 바닥에 내버려놨다. 집행을 마치는 데 모두 이틀이 걸렸다.('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외교보고서' 47, 1894년 5월 10일, p153)
그렇게 실패한 혁명가는 재판 없이 암살당했고, 그 시신은 본국 정부에 의해 불법적으로 훼손돼 흩어졌다. 외국 공사들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조각난 시신은 반도 전체에 종횡으로 조리를 돌리다가 경기도 직산 야산에 버려졌고 손과 발 하나씩은 일본으로 옮겨져 안장됐다.(위 보고서)
한 달 보름이 지난 5월 31일 고종은 "역적에게 능지처사를 추시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이 풀렸다"며 대사면령을 발표했다.(1894년 4월 27일 '고종실록') 또 한 달 뒤인 6월 30일 고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직접 과거시험 합격자 방을 붙였다.(5월 27일 '고종실록') 거기에는 김옥균 암살자 홍종우도 이름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과거시험을 '종우과(鍾宇科)'라고 불렀다.(황현, '매천야록'2 갑오년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홍종우는 다음 날 6품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됐다. 바야흐로 동학혁명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된 다음이었다. 영조가 한 예언은 옳았다.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사진 한 장에 담긴 악연]
왼쪽은 갑신정변 주역인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사진이다. 서광범은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양복을 구입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과 김옥균은 각각 미국과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조선사편수회 유리건판(1884년 촬영 추정)이다.
1866년 지운영이라는 사내가 '도해포적사(渡海捕賊使·바다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라는 고종 국서를 들고 김옥균을 암살하러 일본에 갔다. 미수에 그친 지운영은 유배형을 받았다.
옆 사진은 갑신정변이 터진 188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한 사람은 바로 김옥균 암살을 시도한 그 지운영이다. 지운영은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의 형이다. 지운영은 1882년 수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1884년 3월 서울 종로에 사진관을 차렸다. 훗날 암살범이 훗날 역적들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몇 달 뒤 두 사람은 망명하고 사진관은 일본인 소유로 착각한 시민들에 의해 파괴됐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0-08-19)-
______________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한 지식인 홍종우
1893년 7월 22일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조선 사내가 친구와 작별했다. 친구인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가 그에게 물었다. "프랑스에서 뭐가 좋았어요?" "마르세유에서 본 말들입니다. 아주 커 보이더군요." "나쁜 것은?" "이기주의요." 이 말을 남기고 사내가 탄 차는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잿빛 긴 옷을 입은 채 똑바로 앉아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펠릭스 레가메, '어떤 정치적 자객', 1894년, 국사편찬위 '한불관계자료')
3년 5개월 체류 기간 내내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고 다닌 민족주의자였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해 유럽에 소개한 사람이었다. 파리 지식인들과 역사와 철학을 토론하던 지식인이었다.
8개월이 지난 1894년 3월 28일 사내는 중국 상해에 나타났다. 묵고 있던 호텔 옆방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실패한 혁명가 김옥균에게 권총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국적(國賊)을 죽였다." 홍종우(洪鍾宇). '수구파 사주를 받은 암살범'으로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 지식인 이야기.
"민중이 무지하여" 3일 천하
19세기 말 나라 꼬라지는 엉망진창이었고 기성 정치가들에게 개혁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효가 훗날 회고했다.
제주도 제주시 용연(龍淵) 출렁다리 입구 쪽 전망대에서 정자 쪽을 유심히 보면 절벽에 한자 '洪' 자가 얼핏 보인다. '洪鍾宇'라 새겨진 글자다. 최초의 파리 유학생, 김옥균 암살범, 개혁을 주장한 관료 홍종우가 남긴 흔적이다.
'나는 21세 청년이요 서광범은 한 살 많고 김옥균은 10년 위였다. 항상 합심 동력하여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더니 마침 그다음 해(1882년) 일본에 사절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좋은 기회가 왔다 하여 자원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국운은 날로 융성하여 가는 판이었다. 3개월을 머무르는 동안 이 성황을 보니 부럽기 천만이라. "우리나라는 언제나…" 하는 초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혁의 웅심을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가 없었다. 훗날 개혁의 헛된 희생만 되고 만 것도 이 충동으로 인하여 빚어진 일이다.'('新民' 1926년 6월호 순종 인산 기념 특집호 '순종실기')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가 없던' 청년들이 벌인 사건이 갑신정변이었다. 준비가 없는 쿠데타였다. 그래서 '여론도 없고 정당이 없고 병력이 없기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를 주륙하는 비상 수단을 썼다.'(박영효, '순종실기') 혁명 동지였던 서재필은 이렇게 말했다.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無知沒覺)이었다.'(서재필, 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 '회고 갑신정변')
용연 절벽에 새겨진 홍종우 마애명. 왼쪽에는‘광무 갑진 4월’(1904년 4월)이라 새겨져 있다.
박영효 회고는 객관적이다. 서재필은 계몽적이고 오만하다. 옳은 일을 하는데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몰라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이 사흘 만에 실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 되었든,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반란이다. 반란 패적들은 처형당하거나 망명을 떠났다. 일본으로 간 박영효와 김옥균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박영효는 귀국해 친일파로 변신했다. 김옥균은 암살됐다. 홍종우가 죽였다.
첫 프랑스 유학생
조선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조선인은 1890년 프랑스로 떠난 유학생 홍종우였다.(이경해,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의 만남', 2011년)
홍종우는 1850년 음력 11월 17일생이다. 세도정치의 권세를 누린 남양 홍씨 남양군파다. 경기도 안산이 고향이지만 홍종우 가족은 땅끝 전남 완도 고금도에 살았다.(황현, '매천야록') 아버지가 관직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젊은 시절 기록은 없다. 홍종우는 서른여섯 살이 되던 1886년 3월 어머니 경주 김씨가 죽자 프랑스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2년 뒤 도쿄에 도착한 홍종우는 2년 동안 프랑스행 여비를 벌었다. 오사카에서는 아사히신문사 식자공으로 일했고 규슈에서는 휘호를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만난 화가이자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홍종우는 커다란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이 섞여 있는 비밀스러운 공포를 주었다. 그는 자국 이익을 위해 유럽 문명을 이해하기를 갈망했다. 러시아와 미국에 흩어져 있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기획을 했다. 조선을 압박하는 중국, 일본과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세계로부터 조선을 격리하는 장벽의 철폐다.'(레가메, '어떤 정치적 자객') 근대 유럽을 배워 나라를 고치겠다는 열정이 호랑이처럼 불타는 사내였다.
레가메 소개로 홍종우는 파리 사교계에 데뷔했다. '조선 상황은 위태롭다. 유럽 문명 수용만이 구제될 수 있는 길이다. 일본에서 정치를 깊이 연구했다. 그런 믿음을 확인시켜줬다.'(1891년 2월 '여행자 모임 연설' 중) 늘 한복을 입고 정자관을 쓰고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진을 품고 다니는 이 기이한 사내는 사교계에 틈만 나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홍종우는 동양학 전문 기메박물관에 일자리를 얻었다. 외국인 조력자(collaborateur étranger) 신분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 자료를 번역했다. 기메박물관 한국관 설립도 그가 관여했다. 그 과정에서 '춘향전'을 번역하고 '심청전'을 프랑스 학자와 공동 번역했다. 조선 문학이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사례였다. '봄날의 향기(Printemps Parfumé)'로 번역된 춘향전은 1936년 러시아 발레 안무가 미하일 포킨이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 제목 발레극으로 각색했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합친 소설 '고춘목(枯春木, Le bois sec réfleuri)', 조선 점성술 서적 '점성과 운수에 관한 안내서'도 썼다.(국사편찬위원회 '재외동포사 총서 2' 해방 이전 한불간 교류)
1894년 6월 24일 프랑스‘르몽드 일뤼스트레’에 실린 홍종우 기사. 제목은 ‘어떤 정치적 자객(Un Assassin Politique)’이다.
1893년 7월 홍종우가 귀국했다. '르 피가로(Le Figaro)'가 쓴 평가는 '헌신적이고 숭고한 영혼의 애국주의자'였다. 기메박물관 한국관 설립은 무기 연기됐다.(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2013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프랑스는) 이기주의요'였다. 그런 그가 암살자가 된 것이다.
암살범 홍종우
홍종우가 유학을 다녀온 직후였다. 귀국길에 체류한 도쿄에서 박영효 암살 미수범 이일직(駐韓日本公使館記錄 2권)을 만나 김옥균 제거 계획에 동참한 것이다.(조재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가 직접 말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고, 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외국 군대를 끌고 궁중에 들어갔다.('일본외교문서 27권',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재인용)
그가 돌아오자 갑신정변 희생자 가족들이 거듭 잔치에 그를 초대했다. 그가 말했다. "개인의 적을 토멸한 게 아니라 동양 전국의 어려운 단계를 헤쳐나갈 수 없게 할 우려가 있기에 죽였다."('일본외교문서 5권', 조재곤 재인용)
충남 아산시에 있는 김옥균 유허. 참시(斬屍)를 당한 김옥균 사체는 팔도에 버려졌다. 이 유허에는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김옥균 암살 석 달 뒤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혁명이 벌어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한 사람은 민영준이다. 훗날 민영휘로 이름을 바꾸고 친일파가 된 자다. 그에게 홍종우가 찾아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 대감께서 청국에 원병을 청하신 것은 큰 실수입니다. 청군이 남하하면 몹시 피폐해질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이 기회를 타서 군대를 내보낸다면 국가의 안위가 달릴 것이니, 장래 일을 미리 내다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민씨는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해 단지 '그래, 그래'라고만 했다고 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일청 양국군 내방에 따른 국내외 탐정 보고', 1894년 6월 12일)
이승만을 살려준 재판장
홍종우는 1895년 음력 4월 21일 과거시험에 응시해 진사에 급제했다. 사람들은 홍종우를 뽑기 위해 만든 시험이라고 수군대며 종우과(鍾宇科)라 불렀다.(황현, '매천야록') 홍종우는 11회 상소를 올리며 근대화를 주장했다. 외세 의존 없는 근대화가 그가 꿈꾸는 이상이었다.
1899년 독립협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승만이 체포됐다. 반란 및 탈옥 혐의로 태(笞) 100대와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형 집행장에 판사가 들어왔다 나갔다. 간수가 몽둥이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내 몸에는 아무 상처가 나지 않았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조재곤 재인용) 그때 재판장이 홍종우였다. 이승만은 '정적 홍종우가 내 생명을 구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퍽 후에 들었다'고 했다.
1903년 홍종우는 제주 목사로 좌천됐다. 제주 주민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던 프랑스계 가톨릭 집단에 항거한 이재수의 난을 무마했다. 지금 제주도에 있는 황사평(黃沙平) 가톨릭성지는 그때 홍종우가 천주교도 매장지로 마련해준 땅이다. 홍종우는 제주에서 좋은 경치를 돌아다니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용담동 용연 절벽에 있는 그의 이름 석 자도 그중 하나다. 천지연폭포, 산방굴사와 방선문 계곡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이후 행적은 끊겼다. 2003년판 남양 홍씨 남양군파 세보에 따르면 홍종우는 1913년 음력 1월 2일 죽었다. 아들 둘과 출가한 딸이 둘 있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 아현리에 썼다. 지금 서울 만리동이다. 만리동 공동묘지는 일제 때 사라졌다. 그 묘도 사라졌다. 흔적은 여기까지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07-11)-
______________
갑신정변과 원세개(袁世凱)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연 배우는 김옥균(金玉均·1851~1894)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원세개(袁世凱·1859~1916)와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1841~1917)의 '수읽기'가 있었다. 정변 당시 김옥균은 만으로 33세, 원세개는 25세, 다케조에는 43세였다. 원세개가 불과 25세의 나이였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하다. 스물다섯 살 먹은 어린애(?)의 손에 조선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었던 것이다.
피를 묻히며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난세에서는 중년의 신중함이 우유부단한 실기(失機)가 되어 버리고, 20대의 철없는 혈기가 오히려 과단성 있는 판단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43세의 다케조에는 정변의 지휘부를 수비하기가 좋은 경우궁(景祐宮)에서 수비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긴 판단 착오가 있었다. 10·26 직후 긴박한 상황에서 김재규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향했던 사례가 생각난다. 반면에 원세개는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전격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창덕궁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원세개의 상관이었던 오조유(吳兆有)는 창덕궁 공격을 미적거렸다. 이홍장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지만 원세개는 '그러다가 세월 다 지나간다'며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거 쉬운 판단 아니다. 목숨 걸어야 한다.
이에 비해 다케조에는 책상물림이었다. 원세개의 공격이 개시되자 겁을 먹고 창덕궁의 수비를 담당하던 일본군 150명을 철수시켜 버렸다. 나중에 도쿄대 한학(漢學) 교수를 하면서 다케조에는 두고두고 곱씹었다. '새파란 어린애 원세개에게 당했다.' 원세개는 하남성 출신이다. 과거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책을 읽는 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무재(武才)가 있었다. 그 무재는 갑신정변의 과단성으로 나타났다. 갑신정변 진압의 성공으로 이홍장의 신임을 얻었고 북양군의 총책임자가 된다.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라간다. 조조와 같은 난세의 간웅 반열에 올랐다.
중국대사 추궈훙(邱國洪)이 사드 배치에 대해 '1시간이면 폭격할 수 있다'고 거침없이 내뱉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식자층은 원세개를 떠올렸다. 추궈훙도 앞으로 승진하는 것일까? 미국은 뭘까?
-조용헌, 조선일보(16-03-07)-
______________
원세개(위안스카이):
(중국어 정체: 袁世凱, 간체: 袁世凯, 병음: Yuán Shìkǎi, 1859년 8월20일~1916년 6월 6일)는 중국 허난 성 쉬창 부 샹청 현 출신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다.
그의 자(字)는 웨이팅(중국어 정체: 慰庭, 병음: wèi tíng; 위정)이며 호(號)는 룽안(중국어 정체: 容庵, 병음: róng ān, 용암)이다.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청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주하여 귀국하여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宣統帝)를 제위에서 끌어내려 중국 이천 년의 제국사에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성립 후 같은 해 4월 쑨원 임시 대총통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았고 이듬해 1913년 4월 1일 쑨원과의 약정에 따라 대총통직을 넘겨받아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제위의 욕망이 있던 그는, 만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중화제국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일으켜 칭제를 감행하였으나, 중국 전체에서 "토원(討袁)"의 깃발이 세워지자 이내 제위를 포기한다. 이후 얼마 안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제제운동은 지방 군벌의 세력이 중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키백과-
이홍장:
(중국어: 李鴻章, 병음: Lǐ Hóngzhāng 리훙장, 1823년 2월 15일~1901년 11월 7일)은 청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이홍장은 본래 청나라 말기 나라의 혼란에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래 '회군'이라 이름지어졌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 사후, 이홍장은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의 위치이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것과 더불어 그의 회군은 북양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위키백과-
______________
우리는 왜 망했나
올해 舊韓末을 공부했다
너무 많은 人材가 허무하게 죽었다
해방 70주년을 앞두고 작년 이맘때 세운 계획이 있다. 해방 이전 역사, 특히 구한말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시 우리가 왜 망했는지' 정리해 보자는 것이다. 공부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한줄기 흐름은 잡았다. 우리에게도 국권(國權)을 지킬 기회와 열정,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 년 공부해 겨우 그 정도 알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 의미를 둔다. '외세의 침탈 탓' '조상의 무능력 탓'이란 양극단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선배 논설위원에게서 국권 상실 이후 조선 양명학자들의 비장한 죽음을 기록한 귀한 논문을 얻었다. 고(故) 민영규 교수가 1987년 쓴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이란 글이다. 그동안 이 글이 읽고 싶었던 건 일본사(史)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은 토막 지식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열강 반열에 올린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양명학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니 실천가에게 맞는 사상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양명학파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논문은 양명학자 황현(黃玹) 형제가 국권 상실 후 34년의 시차를 두고 자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한 동지들은 '빙설(氷雪)로 갇힌 삼천리 산과 들을 뒹굴며' 만주로 떠나 '곤궁의 극치에서 장의(葬儀)는커녕 관 살 돈도 없이' 차례차례 죽어갔다. 스스로 안락을 버리고 사지(死地)를 택해 떠나는 최후의 광경이 소설보다 비장하다. 저자는 '동기(動機)의 순수성 때문'이라고 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뜻일까. '일제 밑에서 살아 무엇하냐'는 뜻일까. 황현은 유서에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저 분해서'라고 자결의 이유를 적었다.
양명학 문외한이라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다만 허무했다. 목숨을 바친 일본의 양명학파 역시 '동기의 순수성'을 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기만큼 중요한 지향점을 가졌고 죽음을 통해 달성했다. 우리 양명학파는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일까. 그들 이전에도 이 나라엔 기꺼이 목숨을 던진 수많은 실천가가 있었다. 그런데 두 나라 목숨 값은 왜 이렇게 다른가. 용기와 열정은 같은데 우리는 왜 망했을까. 식견이 부족한 탓에 지식 하나를 습득하면 열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역사를 읽을수록 무조건 외세를 탓하는 주장에 흥미를 잃었다. 강화도조약에서 국권 상실까지 우리에겐 30년 가까운 시간이 있었다. 역사에도 삼세번 규칙이 적용되는가. 갑신정변·갑오개혁·광무개혁은 소중한 기회였다. 역사를 읽을수록 흥미를 잃는 주장이 또 하나 있다. 조선은 국력이 고갈돼 이미 망한 나라였다는 숙명론이다. 당시 한국을 오래 본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우수한 재능, 뜨거운 교육열, 풍부한 자원을 높이 평가했다. 아직 강하지 못했지만 강해질 수 있는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황현은 왜 '인간 세상 식자(識者)노릇하기 어렵다'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죽었을까.
정말 식자 노릇 어려웠던 시대인 듯하다. 개화를 꿈꾸고 정변을 주도한 당대의 천재 김옥균은 피살 후 사지가 잘려 팔도에 조리돌림당했다. 개혁을 주도한 조선 최후의 영의정 김홍집은 실각 후 군중에게 내던져져 타살됐다. 외세의 폭거였다면 덜 허무했을 것이다. 가슴 아팠던 건 수많은 인재가 개혁을 시도하다가 섬기던 국왕에 의해 최후를 맞는 광경이었다. 왕은 개혁이 왕권을 제약했을 때 개혁 전체를 내쳤다. 민족의 열정·재능도, 하늘이 준 천금 같은 기회도 절대 왕권 앞에서 30년을 몸부림치다 끝내 사라졌다. 무능한 정치는 이렇게 무섭다.
열정과 희망이 고갈된 나라엔 황제만 남았다. 국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일제에 대해 황제는 "대신과 백성의 의향을 묻겠다"며 뒤로 피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며 황제를 비웃는다.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를 폐하가 결정하는 소위 전제군주국 아닙니까?" 이런 허깨비 같은 권력을 지키려고 충신과 개혁을 버렸는가.
구한말을 이야기하면 "지금은 국력이 다르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가 국력이 모자라 망했나, 국력을 키우는 개혁을 못 해 망했나.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민족의 재능과 열정, 개혁의 기회를 통합해 나라를 끌고 가지 못한 정치 때문에 망한 건 분명해 보인다. 100년 후 후손이 쓸 역사에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역사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만큼 교훈을 준다. 올해 깨달은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15-12-16)-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國史-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부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三國遺事)] [最古 史書 '삼국사기'] (0) | 2025.02.28 |
---|---|
[하늘과 바람과 별 그리고 윤동주] [조선일보 97년.. ] (0) | 2025.02.23 |
[태종과 원경왕후] [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 ] .... (0) | 2025.02.06 |
[조선 왕 호칭의 조(祖)와 종(宗), 알고보니 아첨의 결과였다고?] .... (0) | 2025.01.31 |
["인민에게 땅 공짜로 나눠준다"더니, 김일성이 북녘의 지주 됐다] .... (0) | 2025.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