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토(搜討)기행]
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는 충북 단양군 도담리 일대 모습. 남한강 물길 가운데로 도담삼봉(오른쪽 하단)이 서 있고, 석문으로 오르는 길의 정자(왼쪽 하단의 산자락)도 보인다. 도담삼봉과 석문은 단양8경에 속한다.
충북 단양(丹陽)은 지명에서 신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단양은 불로장생의 핵심인 단(丹)을 연마한다는 ‘연단(鍊丹)’과, 인체 생명력인 양기(陽氣)를 잘 다스린다는 ‘조양(調陽)’에서 한 글자씩 취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단양에는 이름만큼이나 건강해지고 힐링이 되는 명소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전통의 관광도시 단양이 예전보다 더 세련되고 친환경적으로 재무장한 ‘단 명소’들로 가을 나들이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 삼선암 바위에 이름 새긴 속내는?
단양에는 ‘단(丹) 여행’을 위한 특별할 길이 있다. 단양군이 조성해놓은 ‘느림보유람길’과 ‘느림보강물길’이다. 이들 길을 걷다 보면 양기 충만한 단 명소들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먼저 느림보유람길은 4개 구간 총 36.6km로 이뤄져 있다. 이 중 1구간(선암골생태유람길·14.8km)과 3구간(사인암숲소리길·9.2km)에서는 신선 세계를 표현하는 글과 전설들을 집중적으로 접할 수 있다.
먼저 선암골생태유람길은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길’로 불린다. 단성면 단성생활체육공원에서 단양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선암계곡의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연달아 만나게 된다. 신선이 이 세 곳 암반지대의 절경에 취해 노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명소들이다.
도락산에서 발원하는 선암계곡의 첫 번째 명소인 하선암(下仙巖)은 30여 개에 이르는 너른 마당바위가 펼쳐진 곳이다. 이 중 3층 구조의 흰색 너럭바위 위로는 둥글고 커다란 암반이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형상이 미륵 같다고 해서 불암(佛巖) 혹은 선암(仙巖)이라고 불린다.
하선암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명소단조’ 각자. 이명, 이소 형제가 단약(丹藥)을 제조하기 위해 쓰던 부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선암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들이 여러 개 있다. 이 중 전서체(篆書體)로 ‘명소단조(明紹丹竈)’라는 붉은빛 글씨가 눈길을 끈다. 신선처럼 노닐던 이명(李明), 이소(李紹) 형제가 선약(仙藥)을 굽던 부엌이라고 전해진다. 장생불사의 약을 만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선암은 명당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자 빼어난 경치로도 이름났다.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은 “바위의 사면(四面)에는 봄이면 철쭉꽃이 타는 노을 같고 가을이면 단풍이 찬란한 비단 같으니, 바위는 진실로 기이한 경치 중에서 더욱 기이하다”고 노래했다.
순백색 바위와 옥빛 계곡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선암 계곡.
가을빛 물속에 비친 바위가 무지개처럼 영롱해서 ‘홍암(虹巖)’으로도 불리는 하선암을 떠나 계곡을 더 오르면 중선암을 만나게 된다. 순백색 바위가 층층대를 이루고, 그 위로 옥빛 계곡수가 흘러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선암계곡을 상징하는 삼선구곡(三仙九曲)의 중심인 중선암 옥염대에는 1717년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가 직접 썼다고 하는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三仙水石)’이란 글씨가 암각돼 있다. 단양, 영춘, 제천, 청풍(조선시대 행정구역) 4개 군에서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물과 돌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신비로운 풍경에 반한 옛 선인들은 바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깊이 새겨놓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만도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단지 방문 기념 삼아 새겨 놓았겠는가. 자신의 이름을 좋은 기운이 서린 바위에 새김으로써 그 기운을 취하려 한 속내까지 읽힌다.
삼선구곡의 세 번째 명소인 상선암은 크고 웅장한 바위와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조화를 이뤄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운치를 더해준다. 옛사람들은 학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 유람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평가했다. 사람이 드러누울 수 있도록 길다랗게 펼쳐진 어느 바위 위에 앉아 폭포처럼 떨어지는 계곡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다.
조선 선비들이 수토(搜討) 대상 목록에 올렸던 사인암. 선조 임금의 손자 낭원군도 재차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조선의 핫플레이스이기도 했다.
네 번째 명소인 사인암을 만나기 위해선 느림보유람길 3구간(사인암숲소리길)으로 가야 한다. 공중으로 50m 치솟은 기암절벽이 마치 긴 암석을 끼워 맞춘 듯 기이한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다. 사인암은 고려말의 유학자 우탁이 ‘사인재관’ 벼슬에 있을 때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사’에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고 점을 치면 틀림이 없다”고 기록할 만큼 뛰어난 역학자 우탁이 즐겨 찾은 곳이다. 곳곳에 명당 기운이 빼곡하다 보니 조선 선비들의 수토(搜討) 답사 목록 중 우선 순위였다. 선조의 손자 낭원군도 “계유년(1693년) 겨울에 다시 유람을 왔다”는 글씨를 새겨놓았을 만큼 이곳은 당대의 핫플레이스였다.
● ‘느림보 물길’ 따라 펼쳐지는 선경
삼봉 정도전의 전설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는 도담삼봉. 정자가 들어선 가운데 봉우리를 장군봉이라고 한다.
단양 8경 중 으뜸이자 단 명소인 도담삼봉과 석문은 남한강 강변을 따라 걷는 ‘느림보강물길’에서 만날 수 있다.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가운데에서 솟은 세 개의 바위가 섬처럼 들어선 곳을 가리킨다. 강원 정선군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고, 호를 ‘삼봉’이라고 지은 정도전의 기지가 담긴 스토리도 전해진다. 삼봉 중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가운데 바위가 장군봉이다. 이곳에는 삼도정으로 불리는 정자가 들어서 있어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명당 기운이 맺힌 곳이어서 조선 선비들이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도담삼봉은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단원 김홍도, 이방운 등이 이곳을 화폭에 담았다. 실경(實景)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림에서도 실경의 기운(氣運)이 실린다. 이를 동양의 산수화 이론에서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고 표현한다. 그림을 통해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두 개의 바위 기둥 위로 또 하나의 바위가 가로질러 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석문(石門) 건너편으로는 또다른 풍경이 액자 속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방운은 도담삼봉과 함께 바로 인근의 석문도 화폭에 담았다. 이곳 역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깃든 ‘단 명소’에 해당한다. 석문은 너비 20m에 달하는 무지개 모양의 자연석을 가리킨다. 두 개의 커다란 바위 기둥 위로 또 하나의 바위가 가로질러 문의 형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연이 빚어낸 뛰어난 조형미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둥그런 석문을 통해서는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 햇살로 빛나는 남한강과 그 너머로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듯한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정겹다. 신령한 기운이 담긴 곳인 만큼 우리나라 창세 신화의 주인공인 ‘마고할미’의 전설이 담긴 동굴도 있다.
도담삼봉과 석문은 남한강 건너편 도담정원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좋다. 도담삼봉과 석문을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코스모스와 백일홍, 댑싸리가 가을 정취를 만끽하게 해준다. 특히 석문이 있는 절벽에서는 사람 모습의 바위, 자라바위 등 보물처럼 숨겨진 바위 풍광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아이 등 가족을 동반한 여행이라면 느림보강물길의 시내 쪽 강변에 있는 다누리아쿠아리움을 들러 볼 일이다. 한국관광공사 세종충북지사가 꼽은 강소형 잠재 관광지인 다누리아쿠아리움은 국내외 민물고기 234종, 총 2만3000여 마리를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민물고기 생태관이다. 높이 8m에 달하는 대형 수족관을 비롯해 다양한 모양의 수조 속에서 물고기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몸값이 비싼’ 물고기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들도 사람처럼 명당에서 더 잘 지낸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이곳은 ‘물 명당’인 셈이다.
한국관광공사 세종충북지사가 강소형 잠재 관광지로 추천한 다누리아쿠아리움은 국내외 민물고기 234종, 총 2만3000여 마리를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민물고기 생태관이자 ‘물 명당지’다.
다누리아쿠아리움에서는 천연기념물인 수달을 비롯해 ‘남한강의 귀족’으로 불리는 황쏘가리, 행운을 불러온다는 중국의 보호 어종 홍룡, 아마존의 거대어 피라루크 등 희귀한 민물고기를 만날 수 있다.
전통의 단양 유람선 나들이도 추천 코스다. 빼어난 산수비경으로 제2의 해금강이라고 불려왔던 단양은 수많은 풍류객이 선상 유람을 즐기던 곳이었다. 단양 장회나루에서는 구담봉과 옥순봉 등을 거쳐 청풍나루를 왕복하는 유람선이 있다. 단양팔경에 속하는 구담봉과 옥순봉은 강에서 감상해야 그 운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동아일보(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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